아들 잃은 박완서의 '밥'
입력 : 2014.05.20 05:44 /조선일보
"주님, 당신을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믿어서도 아닙니다. 만에 하나라도 당신이 계실까 봐, 계셔서 남은 내 식구 중 누군가를 또 탐내실까 봐 무서워서 바치는 기도입니다."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작가 박완서(1931~2011)는 남편과 외아들을 잃고 하늘을 향해 이렇게 절규했다. 남편은 병으로 잃었지만 25년 5개월간 자랑스럽게 키워온 의사 아들이 사고로 창졸간에 떠난 것은 견딜 수가 없었다. 당시 천주교에 입교한 지 4년째였던 작가는 작품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참척(慘慽)의 고통을 처절하게 기록했다.
"내가 이 나이까지 겪어본 울음에는, 그 울음이 설사 일생의 반려를 잃은 울음이라 할지라도, 지내놓고 보면 약간이나마 감미로움이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아무리 미량이라 해도 그 감미로움에는 고통을 견딜 만하게 해주는 진통제 같은 게 들어 있었다. 오직 참척의 고통에만 전혀 감미로움이 섞여 있지 않았다. 구원의 가망이 없는 극형이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도대체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삶에 대한 거부였다. 보다 못한 큰딸이 어머니를 자기 집이 있는 부산으로 모셨다. 그러나 아파트 베란다에서 보이는 수영만에선 올림픽 열기가 한창이었다. 그 또한 못 견딜 일이었다.
이해인 수녀가 작가에게 인근 수녀원에서 지내기를 권했다. 수녀원에 간 그녀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다"고 적었다.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신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신(神)의 '한 말씀'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밥이 넘어가기 시작했다. 작가는 그게 또 참담했다.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펐던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밥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국의 막내딸 집으로 여행을 떠나기 전 본당 신부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가 탁자 위 백자 필통에 적힌 '밥이 되어라'는 글귀를 보고 수녀원에서 맡은 밥 냄새를 떠올린다. 그리고 그토록 간구했던 절대자의 '한 말씀'을 깨닫는다. "하도 답답해서 몸소 밥이 되어 찾아오셨던 거야. 우선 먹고 살아라 하는 응답으로."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 '극복'은 아니었다. 근 20년이 지난 후 작가는 이해인 수녀와의 대담집 '대화'에서 '아픔을 어떻게 극복했느냐'고 묻는 게 참 싫었다고 말했다. "아픔은, 슬픔은 절대 극복할 수가 없는 거예요. (…) 그냥 견디며 사는 거죠." 오히려 남편·아들과 서로 깊이 사랑하고 믿었던 좋은 추억이 홀로 서는 데 도움이 됐다고 했다.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될 때 다시금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게 되는 거죠."
세월호 참사 후 한 달 넘게 흘렀다. 19일 대통령이 대(對)국민 사과를 했다. 진상 규명과 대책, 처벌이 잇따를 것이다. 하지만 유가족들의 아픔과 슬픔이 대책과 처벌로 치유되지는 않을 것이다. 아픔은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 '견디며 사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지금 유가족들의 마음일 것이다. 작가를 고통에서 일상으로 이끈 '밥'은 유가족들에게 무엇일까. 좋았던 추억을 잊지 않도록 돕는 것,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도록 진심으로 함께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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