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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록의 동서남북] 잘못 짚은 민주당의 '乙 지키기'

도깨비-1 2013. 6. 3. 15:10


[신정록의 동서남북] 잘못 짚은 민주당의 '乙 지키기'

 

   신정록 정치부 부장대우/조선일보 2013. 06. 03.
 

   대통령 선거는 세상에서 가장 가혹한 '갑을(甲乙) 게임' 중의 하나다. 이기는 쪽은 전체를 갖게 되고, 지는 쪽은 무(無)가 된다. 2위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진 쪽이 을의 질곡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도 진 쪽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46%를 얻었는데…'(이회창), '48%나 얻었는데…'(문재인)라고 푸념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에서 세 번이나 졌으면서도 네 번째에 대통령이 됐던 김대중, 2002년 대선 패배에 이어 2004년 총선에서 궤멸 직전이었던 한나라당(새누리당)을 수습해낸 박근혜가 대단한 것이다.
   지금 민주당은 철저한 '을'이다. 누구도 민주당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지난 5월 4일 대선 패배 후유증을 수습한다면서 새 지도부를 뽑는 전당대회를 열었으나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전당대회를 했는지 기억하는 사람조차 많지 않다. 당 지지율은 20% 밑으로 내려간 뒤 반등의 기미가 전혀 없다. 심지어 지금 민주당의 최고위원이 누구인지 한두 사람이라도 이름을 댈 수 있는 유권자는 많지 않다. '김한길 대표 체제' 출범 한 달 만의 결과다.
   김한길 체제는 출범 이후 '을 지키기'를 대표 상품으로 내놓았다. 민주당 지도부는 지난 한 달 내내 지방과 산업현장을 다니면서 '을 지키기를 위한 최고위원회의' '을 지키기 현장 간담회' 같은 것을 했다. 일요일인 2일에도 최고위원들과 박원순 서울시장 등 당 소속 시·도 지사들이 모여 국회에서 정책간담회를 열었는데 그 이름이 '을을 위한 정책간담회'였다. 이들은 앞으로 민주당 소속 단체장이 있는 자치단체의 행정체제를 '을 지키기 체제'로 전환키로 했다. 박근혜 정부의 모든 길이 '창조경제'로 통한다면, 민주당의 모든 길은 '을'로 통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민주당이 말하는 '을을 위한 사회 만들기'는 또다시 세상을 갈라치기 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의미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시도다. 정부가 조달 예산을 바탕으로 기업 위에 군림하고,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대리점 위에 군림하고, 국회의원이 공천권을 바탕으로 지방의원 위에 군림하고, 심지어 어느 국제중학교가 힘있는 부모를 둔 자녀를 합격시키기 위해 입학 성적을 조작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주당의 주장에는 중요한 것 하나가 빠졌다. 공평한 시선이 빠졌다. 왜 어떤 갑은 도마 위에 올려놓고 난타하고 어떤 갑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가.
   지금 우리 사회에서 실제는 '수퍼갑'이면서 '을' 행세를 하는 대표적인 집단이 대기업의 정규직 노조다. 대기업 노조가 어떻게 비정규직 위에 군림하는지, 회사가 값싼 비정규직을 대거 고용하기 위해 어떻게 정규직 노조와 담합하고 있는지는 이제 알려질 만큼 알려졌다. 나아가 지금은 이 문제가 고용시장을 교란시키는 주요 요인으로까지 평가되고 있다. 그런데도 한국노총 출신 여러 명에게 비례대표 의원 자리를 내주고, 민주노총과 전략적 정책 연계 관계인 민주당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 사회는 청년·장년·노년을 모두 불안케 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 일자리나누기와 청년 고용 확대, 임금피크제 도입과 정년 연장 같은 문제들은 모두의 문제가 되었다. 이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쇠로 만들어진 기득권을 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당이 이 문제에 대해 계속 비겁하다면 '영원한 을'로 갈 수도 있다. 노동시장도 경제 민주화의 예외가 될 수 없다. ▣

 


[사설] 이 세상에 甲과 乙만 사는 게 아니다
  조선일보 2013. 06. 04(지방판)

 

   3일 개회한 6월 임시국회의 가장 큰 이슈는 이른바 '갑을(甲乙)관계법'이다. 민주당은 6월 국회가 '을(乙) 지키기 국회'라며 이번에 처리할 16개 핵심 입법 과제를 선정했다. 대리점주 보호를 위한 '대리점 거래 공정화법', 광역단체장이 불법행위를 한 '갑'에 대해 조사권·고발요청권·조정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하도급 거래 정상화법 등이 포함됐다.
   민주당의 이런 움직임은 남양유업의 대리점에 제품 밀어내기, 항공기 여승무원에게 모욕을 주고 난폭한 행동을 한 '라면 상무' 사건, 편의점 가맹점주의 잇따른 자살 등이 사회문제화하면서 경제적 강자(强者)인 '갑'과 약자(弱者)인 '을' 사이의 불공정·부당거래 실태가 새삼 관심을 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횡포를 부리는 '갑'에 시달림을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못 한 채 속병을 앓는 '을'이라는 전근대적 '갑을 관계'는 이제 확실하게 청산해야 할 때가 됐다. 새누리당 일부 의원도 '갑'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액의 최대 10배까지 배상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주장하고 나섰다. 여·야가 '갑을관계법' 추진 경쟁을 벌이는 형국이다.
   경제적 강자가 힘의 논리로 약자를 짓밟고 억압하지 못하도록 국가가 나서서 약자를 보호하고 힘의 균형을 맞춰주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관계를 '갑'과 '을'로 양분(兩分)하기도 힘들뿐더러 그 관계의 어느 한편은 '악(惡)', 다른 한편은 '선(善)'이라는 도식(圖式)으로 이 문제에 접근하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대기업의 분업(分業) 체제는 하도급 거래를 통해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다. 대기업이 직접 만드는 것보다 1차 하도급 업체가 제조한 부품이 더 싸고 품질도 좋다면 대기업은 1차 하도급 업체에 부품 공급을 맡긴다. 1차 하도급 업체 역시 똑같은 이유로 2차·3차 하도급 업체에 일감을 맡기는 것이 상례(常例)다.
   1차 하도급 업체는 대기업에 대해선 '을'이지만 2차 하도급 업체에 대해선 '갑'이다. 2차 하도급 업체는 1차 하도급 업체에 대해선 '을'이고, 3차 하도급 업체에 대해선 '갑'이다. 대리점주와 편의점 가맹점주들도 본사에 대해선 '을'이지만 대리점·편의점 직원과 아르바이트 임시직에 대해선 '갑'이다. 결국 기업과 사람 대부분은 '갑'인 동시에 '을'인 것이다.
   상당수 '갑'과 '을' 관계는 서로 의존하는 공생(共生) 관계다. 지난 2011년 삼성전자 휴대전화 부문의 주요 협력사 10곳의 영업이익률은 평균 8.4%였다. 삼성전자 영업이익률 8.1%는 물론 대기업 평균 영업이익률 5.3%보다 훨씬 높다. 삼성전자 휴대전화 사업이 잘나가면 삼성전자에 부품을 납품하는 협력업체들도 큰돈을 번다. 반면 최근 남양유업에 대한 불매운동으로 매출이 줄어들자 본사뿐 아니라 대리점주들까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갑'이면서 '을', '을'이면서도 '갑'이란 '갑을 관계'의 양면성(兩面性)을 정확히 보지 못하면 세상을 왜곡해 보게 된다.
   정치권이 '갑은 혼내고 을은 보호한다'는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해 바른 해법(解法)을 찾을 수 있다. 이 세상은 '갑'과 '을'만 사는 세상이 아니라 '병(丙)'과 '정(丁)'도 함께 사는 세상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