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어이 고바우, 요즘 정치판 참 웃기지 않나"

도깨비-1 2011. 10. 30. 19:00


"어이 고바우, 요즘 정치판 참 웃기지 않나"

[김윤덕의 사람人] 4컷 시사만화의 大家서 '현대판 김홍도'로… '고바우영감' 김성환 화백
"서슬 퍼렇던 중앙정보부 애들, 몰래 와서 사인 부탁합디다… 팬이라고


 - 김윤덕 기획취재부 차장/ 조선일보 2011. 10. 29.


 

   "정치고 인생이고 대단한 게 있어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성분후객산거(成墳後客散去)지요. 사람이 죽어 무덤에 들어가면 손님은 다 떠나요. 그게 인생사예요."
   '고바우영감'은 여전히 깐깐했다. 정치의 계절, 미디어를 가득 채운 정치인들의 말과 행태가, 반세기 동안 한국 정치판을 풍자해온 김성환(79) 화백에겐 마뜩잖은 눈치였다. "상식적으로 이해 안 되는 일이 많지요. 나라의 미래는 생각하지 않고 맨 구수한 말들, 당장 인기 끌 말들만 해대니까. 옛날 정치인들이 구식이고 고약하긴 했지만 요즘처럼 근시안적이진 않았어요."
   '고바우영감'은 1955년 동아일보에 첫선을 보인 뒤 조선일보, 문화일보에 걸쳐 45년간 연재된 시사만화다. 뭉툭한 코, 납작머리 위에 솟은 머리카락 한 올로 자신의 감정을 익살스럽게 표현해온 고바우 영감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정치시사만화로 주목을 받았다. 1977년 '고바우의 언어'라는 제목의 박사학위논문이 하버드대학에서 나왔고, 2006년 '고바우작가'를 연구한 박사학위논문이 일본에서 다시 나왔다. 고바우 탄생 50주년을 기념한 우표도 발행됐다. 시사만화의 생명이 살아있는 권력과 위정자를 풍자하는 것이니 탄압도 예사였다. "박통의 긴급조치 9호 시절에는 그야말로 면도날 위를 걷는 심정"이었다고 했다. 온갖 협박과 회유를 뚫고 고바우영감이 반세기를 풍미한 비결은 뭐였을까.
   경기도 분당 자택에서 김 화백을 만났다. 문화일보 2000년 9월 29일자로 고바우영감의 연재를 종료한 뒤에도 그는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지난 10년간 네 번의 전시, 네 권의 책을 펴냈다. '현대판 김홍도'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풍속화에 매진하다, 요즘은 장생도 그리는 일에 푹 빠져 있다. 인터뷰하는 동안 그가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공수래공수거'였다. 꼬장꼬장한 말투 탓인지, 그 또한 독설로 들렸다.
   ◇화려한 꽃나무보다는
   ―정치의 계절입니다. 엊그제 서울시장 선거가 치러졌지요.
   "아름답게 피었다 지는 꽃나무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몇십 년 따먹을 수 있는 과일나무를 심어야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장래는 생각하지 않고 당장 인기 끌 말들만 쏟아내니 보기가 싫어요. 특히 복지 말이에요. 눈앞의 떡이 맛있어 보이니 너도나도 좋다고 주워먹지만 그 부담 나중에 우리 아이들에게 다 돌아가지 않겠어요? 아주 세금을 걷지 말라고 하지 그래요."
   ―젊은 세대의 분노가 정치판 물갈이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권력이 민심을 제대로 못 읽어 그렇지요. 연못 밑에 구멍을 내 개울을 만들어야지요. 큰 연못에 비가 많이 오면 물이 넘쳐 흘러서 주변 논농사를 망치는 수가 있어요. 항상 물이 고이는 곳에는 구멍을 뚫어놓아야 해요. 예나 지금이나 권력을 잡으면 눈앞에 뵈는 게 없잖아요? 해도 달도 다 자기 밑에 있는 거죠. 그 속성을 버리지 못하면 민심이 돌아서요."
   ―현 정부의 정책을 고바우영감이 풍자했다면 무엇이 주로 도마 위에 올랐을까요?
   "주택 관련 정책이었을 거예요. 돈귀신으로 알려진 몇몇 유력 정치인들도 그렸을 거고. 정당 불문하고 공천장사하는 세태도 어처구니없지요. 그래서 내가 국회의원들 잘났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고바우영감이 있었다면 어떤 만화를 그렸을까요.
   "쓴소리 했겠지요. 북한에 그렇게 퍼줬으면 보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버릇만 잘못 들여놨어요. 권 여사랑 평양 다녀오면서 판문점에서 기념촬영한 건 소학생 수준이었어요. 하긴 뭐 여태껏 대통령 된 분들, 대선 후보였던 사람들 간혹 만나봤지만 저들이 대통령이 되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수준 이하도 많습디다."
   ―시사만화가 예전의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짝하는 만화들이 없는 탓이기도 하고, 매체들 사고방식에도 문제가 있고요. 고바우영감이 신문에 처음 실리니까 너도나도 실었다가, 내가 또 그만두니 여기저기 다 없애데요. 창의성이 있어야 하는데."
   ―시대가 그만큼 민주화되었다는 뜻일까요?
   "만화의 소재가 줄어든 건 사실이지요."
   ◇고바우영감 고개를 넘다가
   김성환의 4컷 시사만화 '고바우영감'은 1955년 동아일보 2월 1일자에 첫선을 보였다. 1980년 9월부터는 조선일보로 지면을 옮겨, 87년 1만회를 돌파하고, 다시 문화일보로 자리를 옮긴 고바우는 2000년 9월 29일자로 총 1만4139회를 기록하며 연재를 마감한다. 권력에 대한 통렬한 비판과 해학으로 고바우영감은 전국민적 사랑을 받았다. '고바우영감이 고개를 넘다가 고개를 다쳐서 고약을 발랐더니 고만 낫더래'라는 작자미상의 동요 '고바우영감'이 고무줄놀이에까지 퍼졌을 정도다. 그만큼 탄압도 심했다. 자유당 정권 시절 절대권력으로 통한 경무대를 모욕한 죄, '인혁당 사건'을 무죄로 주장한 죄 등 필화사건이 부지기수. 1966~1978년 사이 삭제 수정된 것만 250편에 이른다.
   그래도 붓을 꺾지 않았다. 이어령 교수는 "국민의 한숨 속에 고바우가 자라났다"고 했고, 조선일보 선우휘 전 주필은 "그 웃음은 자신에 대한 위안의 웃음이자 자책의 비웃음이며 더러는 작은 저항의 웃음이었다"고 썼다.
   ―만화주인공일 뿐인 고바우영감이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가 될 만큼 사랑받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민심을 잘 반영했으니까 그랬겠죠. 어렵게 사는 사람들 배경을 내가 잘 아니까요. 찌그러진 3평반짜리 판잣집에서 일곱 식구가 잠을 잤으니 말 다했지요. 밤에 자려고 누우면 위에서 뭐가 반짝거려요. 지붕 틈새로 비치는 별이지요. 날품으로 끼니 때우는 길거리 빵장수, 지게꾼들이랑 몇 달을 살아서 그 심정 잘 알아요."
   ―고바우는 왜 납작머리에 머리카락은 한 올뿐이고, 젊은이가 아닌 영감님인가요?
   "만화는 어린애들 보는 걸로 돼 있는데 할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넣으면 노인들까지 보지 않을까 했지요. 또, 만화 주인공이라면 죄다 눈이 동그래 가지고는 웃을 때 입이 찢어지도록 벌어지잖아요? 난 그게 싫었어요. 머리카락 하나로만 (감정을) 표현해보고 싶었지요."
   ―이름은 왜 고바우인가요?
   "옛날에 아이 낳으면 바위같이 튼튼하게 자라라고 '바우야, 바우야' 그랬어요. 바우에는 성이 뭐가 맞을까 하다가 고바우라고 했지요. 김바우, 박바우는 이상하잖아요?"
   ―자유당, 유신시절, 군부정권에 걸쳐 필화사건을 여러 번 겪으셨지요?
   "4·19 혁명 직후에 이기붕이 참석한 전국치안회의가 열렸는데, 누가 고바우부터 잡아들이라고 하더래요. 그놈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고.(웃음) 박통 시절엔 한달이 멀다 하고 중앙정보부에 불려다녔고, 전두환 정권 시절에는 이민 가라는 압력을 받았어요. 하도 여러 번 불려가다 보니 나중엔 심문하는 순서, 배역까지 알게 되데요. 보통 6명인데 한 놈이 큰 소리치면서 때리는 시늉을 하면 또 한 놈은 말리는 식이에요.(웃음)"
   ―고문도 당하신 건가요?
   "누구든지 왝왝 소리 지르면 자지러질 것 같은데 나는 반대예요. 박통 시절 중앙정보부에 불려가면 무조건 매 맞는 걸로 돼 있잖아요? 근데 나는 매 맞는 게 희망사항이었어요. 믿는 구석이 있었거든요. 그때 이미 고바우영감이 해외까지 소문이 나 있어서 외신에 나고 그랬어요. 아시아 특파원들이 유신정권을 눈여겨보고 있었고, 김성환이 불려갔다 하면 촉각을 곤두세웠으니 나한테 손끝 하나만 대봐라 했지요. 만화가를 고문했다고 전 세계에 바로 기사가 나지 않겠어요? 내가 또 밑바닥 인생을 살아서 웬만한 공갈 협박에는 눈도 꿈쩍 안 해요. 반말로 막 대들면 저희들이 기가 죽어서 다시 대책회의를 하러 나가고 그랬어요.(웃음)"
   ―중앙정보부가 예사 기관이 아니지 않습니까. 자기검열도 하셨을 것 같은데요.
   "개인이 명예훼손을 걸 수 있는 부분을 신경 썼지 관은 개떡같이 봤어요. 사실 박통은 나를 금이 간 유리병이라고 여기고 조심스럽게 다루려 했던 것 같아요."
   ◇삶아도 구워도 못 먹을 놈
   ―보통 배짱이 아닙니다.
   "일본 신문이 자기네 속담으로 나를 평한 말이 있어요. 삶아도 구워도 못 먹을 사람이라고.(웃음)"
   ―권력도 고바우영감의 인기를 막지 못했습니다.
   "인기보다도, '가짜 고바우' 때문에 내가 속을 썩었어요. 자기가 고바우라면서 밥집, 술집에서 외상 밥과 술을 먹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긴 거예요. 한번은 을지로 입구에 자동차 부품회사가 있는데 거기서 내 이름을 대고 외상으로 부품을 사간 모양이에요. 내게 돈을 받으러 왔더라고요. 더이상은 곤란하다 싶어 신문 가십난에 공고를 했지요. 김성환은 외상 짓고 다니는 일 없으니 피해 보시지 말라고. 한번은 웬 여성이 전화를 해왔어요. 누구냐고 하니까, 요전에 대천에서 만났는데 기억 못하냐고 해요. 가짜 고바우가 대천서 그 여인과 연애를 한 모양이에요. 대천 간 적 없다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한번 만나볼 걸 그랬나 봐요. 조금 아깝긴 해요.(웃음)"
   ―중앙정보부에도 팬들이 많았다면서요?
   "여태껏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놈들이 휴식시간에 나 혼자 남아 있으면 종이 한 장 들고 들어와서는 사인 좀 해달라고 해요. 양주 한 병 사 들고 가면 고바우 그림 한 장 그려줄 수 있냐고 묻는 놈도 있었지요.(웃음)"
   ―박정희 대통령 서거했을 때는 기분이 묘하셨겠습니다.
   "당일엔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어요. 며칠 지난 뒤 박통 서거 소식에 고바우가 깜짝 놀라 책상 위에서 껑충 뛰어오르는 장면으로 대신했죠. 육영수 여사 저격 당시에는 총소리에 놀란 측근들이 죄다 땅바닥을 기어다니는 모습을 그려서 풍자했어요."
   ―김종필, 김영삼, 김대중 등 주요 정치인들도 자주 풍자하셨지요?
   "예외가 있나요. 대선이 다가오면 여기저기 부르는 데가 많아 불편하고 힘들었어요. 잘 그려달라는 부탁이 아니라 불이익만 안 당하게 해달라는 거지요. 그렇다고 안 그릴 수 있나요? 반응도 제각각이에요. 김영삼씨는 무엇을 그리든 이렇다저렇다 얘기가 없는데, DJ는 그렸다 하면 항의전화와 편지가 쇄도를 해요. 우리 선생님을 감히 모욕했다고.(웃음)"
   ―매일매일 네 칸 만화에 넣을 그림 소재를 생각해내려면 힘드셨겠습니다.
   "일기 쓰는 것보다 조금 더 신경을 썼지요. 심각하게, 시시콜콜 걱정하며 앉아 있으면 뭘 해요? 대범하게 생각해야 훨씬 쉬워요."
   ―고바우영감의 주장이 다 옳았다고 생각하십니까.
   "80% 정도는요. 조금 지나쳤다고 여겨지는 것도 있지요. 미안한 사람도 있고. 박통시절 어떤 장관을 만화로 풍자한 적이 있어요. 그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고 들려오대요. 그런데 얼마 후 그 양반이 세상을 떠났어요. 내게도 책임이 있는 것 같아 자책이 됐지요. 젊어서나 악쓰고 비평하지, 지금은 그렇게 못해요."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건…
   김성환이 만화에 입문한 건 가난 때문이었다. 경복중학교 5학년 때인 1949년 연합신문에 '멍텅구리'라는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시작했다. "독립운동을 하신 아버지는 생활력이 전혀 없으셨지요. 집도 없고, 교복도 졸업할 때쯤 맞게끔 아예 큰 걸로 사서 단벌로 살았고요. 대학생이 고학했다는 얘기는 흔해도 중학생이 고학했다는 얘기는 드물지요?(웃음)" 권력의 협박과 회유에도 꿈쩍 안 했던 패기는 이 '밑바닥시절'에 다져진 거란다. "요즘 말로 왕따지요. 몸집이 작아 집적거리는 놈들이 많았어요. 한번은 세 명한테 뭇매를 맞았지요. 그 시절 좌우익 학생들 충돌이 많았어요. 내가 가난하고 허수룩해보이니 좌익으로 오래요. 안 가겠다고 하니 나를 바위투성이 산에 데려가 엄청 때려요. 1대3이니 실컷 맞아주고 나서 퇴계원 아버지 친구에게 가서 주먹질 연습을 했지요. 난 주먹으로 정면돌파하는 타입이거든요.(웃음)" 가난 때문에 만화가가 되었지만 회화에 대한 꿈을 저버리지 않았던 김성환은 6·25전쟁 때 역사에 남을 전쟁기록화를 105점 남긴다. 열아홉 살 종군화가로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방 전투부대 참호에서 기록한 그림들은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이 최초로 소장한 만화가의 작품으로 화제가 됐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잘 그리셨겠지요?
   "서너 살부터 그림 잘 그린 걸로 돼 있어요.(웃음) 방바닥에 성한 게 하나 없을 정도로 기어다닐 때부터 그렸대요."
   ―전쟁 중에 그린 그림은 우리 현대사에 매우 중요한 기록화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인민군 피해 다락방에서 숨어서 그리기 시작하다가 종군화가로 참여하게 됐지요. 화가단에 미대 교수 등 40여명이 등록돼 있었지만 최전방에 가서 그린 사람은 나 혼자였어요. 그림이니까 그렇지, 이 안에는 기관총 소리,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굉장하지요. 제일 기분 나쁜 건 귓전으로 '팽' 하고 탄환이 지나갈 때예요. 1·4후퇴 후 2년간 고지전할 때 그린 그림들이 많지요. 일본에서는 이걸 보석같이 알아서, 화집을 내고 초청전시까지 했는데, 한국에선 푸대접받았어요."
   ―무슨 말씀인가요?
   "이걸 발표한 게 노무현 대통령 때인데 보기도, 듣기도 싫다는 거지요. 남침이란 증거가 이보다 뚜렷한 게 어디 있어요? 좌익들은 그냥 싫은 거지요."
   ―박수근 화백도 종군화가단에서 만나셨다면서요?
   "화가단은 아니에요. 집이 서로 가까워 다방에서 몇 번 만나면서 친하게 지냈지요. 그때 서양 여성 한 명이 박수근씨 그림을 많이 사갔어요. 한국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고 해서. 그분께 영어로 감사편지를 써야 하는데 그걸 도와달라고 자주 왔어요. 그 사람 그림값이 이렇게 높아질 줄 알았으면 그림이나 한두 개 받아둘 걸.(웃음) 그림이 팔린다는 건 꿈도 못 꾸던 시절이었지요."
   ―전쟁 당시 삐라도 그리셨더라고요.
   "중공군용, 북한군용을 따로 그렸어요. 한번은 유엔연합군 본부에서 숨이 턱에 찬 젊은 장교가 나를 찾아요. 중공군이 대공세로 나왔으니 삐라를 만들어 함박눈같이 뿌려야 한대요. 선 채로 10분 만에 2개의 도안을 그려줬지요. 그때는 삐라가 양측 심리전에 큰 영향을 미쳤어요."
   ―전쟁통인데, 두렵지 않으셨나요?
   "가진 게 없으니 목숨도 안 아까워요. 당장 끝나도 그만이고. 겁날 게 없지요.(웃음) 사실 전쟁 때 고통스러운 건 포탄을 맞는 게 아니에요. 배가 고픈 게 무서운 거지."
   ◇아홉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
   고백하자면, 김성환 화백에게 사죄할거리가 기자에게는 있었다. 2주 전 '우표'를 주제로 쓴 기사에서, 세계적인 우표 수집가이기도 한 김성환 화백이 '에로우표'를 수집한다고 쓴 것이다. 에로우표는 '에러(error)우표'의 오류였다. 화백이 껄껄 웃었다. "덕분에 전국에 색골로 알려졌지요. 내가 목사나 교수가 아니고 만화가인 게 다행이지요."
   ―에러우표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실수로 잘못 찍혀 나온 우표들이죠. 인쇄 롤러에 들어갈 때 다른 종이가 딸려 들어가 그 부분이 공백이 된 것, 색도가 엇갈린 것, 구멍이 찍힐 때 빗나가서 우표 한가운데 구멍이 난 것 등 여러가지예요. '에로우표'가 있다면 내가 제일 먼저 수집하지요.(웃음) 굳이 에로우표로 분류하자면 딱 두 장일 거예요. 오스트리아에서 나온 클림트의 '키스' 우표하고 스페인에서 나온 고야의 '벌거벗은 마야' 우표지요. 아무리 벌거벗어도 남자가 옆에 있어야 에로가 되는 거지, 히프 쪽에 검정고양이라도 앉아 있으면 모를까.(웃음)"
   ―우표는 왜 모으기 시작한 겁니까.
   "박통 때 집 근처까지 요동을 치며 미행하는 괴한들 때문에 잠을 못 자니까 수면효과를 내려고 시작했어요. 우표를 확대해보면 천공이라고 가장자리 우둘두툴한 부분이 있잖아요? 1㎝ 안에 구멍이 몇 개인가를 세는 작업을 시작했지요. 취미로 끝나야 하는데 거기 너무 몰입해서…. 은행 금고에 보관돼 있는 우표도 있을 만큼 귀중한 게 많다 보니 남들이 세계적인 콜렉터라고 하데요."
   ―고바우 그리는 틈틈이 1961년 첫 개인전을 엽니다. 선생의 50~60년대 풍속화를 두고 시인 김규동 선생은 '현대판 김홍도'라고 칭송했습니다.
   "과장이지요. 유화부터 동양화, 풍속화, 만화, 삽화까지 그렸으니 난 잡화가예요.(웃음) 풍속화는 찢어지게 어려웠지만 사람살이에 정이 넘쳐났던 그 시절 풍경을 남겨놓고 싶어 그려둔 거예요. 그게 상상이 아니고, 사진 자료들 꼼꼼히 고증해서 그린 거지요."
   ―요즘은 장생도를 그리신다고요?
   "해와 구름, 소나무와 거북이…. 장생을 보면 누구든 마음이 푸짐해지니까. 그림 위에 내가 좋아하는 한시, 시경에 있는 문구를 써서 곁들여요. 이건 지족상락(知足常樂). 만족함을 알면 항상 즐겁지요. 요건 구사일언(九思一言). 아홉 번 생각하고 한 번 말하라. 괜찮지요? 내후년쯤 전시할 거예요."
   ―고바우 영감이 술병을 든 채 개구리 위에 올라타고 있네요. 동화 같습니다. 글씨도 그림처럼 보이고요.
   "이게 전서체라고 진시황이 만든 글씨체예요. 글씨 하나를 이삼십 가지로 쓸 수 있지요. 2007년에 서화소품전을 한 적이 있는데 한승주씨가 글씨는 누가 썼느냐고 조용히 물어요. '내가 쓰지 누가 써요' 했더니 놀라대요. 내가 만화가니까 그림만 그리고 딴 건 일절 못하는 걸로 알아요.(웃음)"
   ―그림은 언제 그리십니까.
   "기분 나면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하고, 맹탕으로 쉬는 날도 많고요."
   ―내년이 여든인데 참으로 정정하십니다.
   "90세, 100세가 되어도 그림은 그리는 거지요. 자기수양이 아니고, 그냥 생활이에요. 이게 적지않은 운동이 돼요. 판화는 판목을 놓고 문질러야 하는데 힘이 많이 들어가지요."
   ―'고바우영감' 마지막 회에 춘풍추우(春風秋雨)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살다 보면 즐거운 날도 있고 우울한 날도 있지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인생, 너무 연연해하지 말자고요.(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