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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史劇, 역사 왜곡 해도 너무 한다

도깨비-1 2011. 10. 30. 19:13


[태평로] 史劇, 역사 왜곡 해도 너무 한다

- 이한우 기획취재부장/조선일보 2011. 10. 27.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가 인기를 끈다고 해서 몇 편을 보다가 접었다. 픽션을 가미해도 어느 정도 해야지, 장인 심온을 죽였다고 해서 아버지 태종에 정면대립하는 모습은 결코 세종이 아니다. 그런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600년 전인 1418년 12월 24일로 시간을 돌려보자. 그 전날 심온은 태종의 명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24일 조선왕조실록은 세종의 불편한 마음을 간접적으로 전한다. "꿈자리가 사나웠다"는 것이다. 이날 저녁 태종은 잔인하게도 대신들을 불러 주연(酒宴)을 크게 연다. 그 자리에는 전날 장인을 잃은 세종도 참석했다. 아마도 태종은 이를 통해 임금이라는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세종에게 일깨워 주려고 했을 것이다.
   드라마에서는 세종이 아버지의 칼에 호위무사의 칼로 맞서려 했지만 역사 속의 세종은 크게 달랐다. 태종이 "주상(主上)이 나를 성심껏 위로하니 내 어찌 크게 즐기지 않겠는가? 다만 주상의 몸이 편안하지 못한 것이 염려될 뿐이로다"고 말하자, 세종은 "신(臣)이 비록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몸은 이미 편안합니다"고 답한다. 세종은 끝까지 자식의 도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태종의 제왕(帝王) 훈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실록은 당시 상황을 "상왕(上王)이 일어나서 춤을 추자 여러 신하들도 춤을 추었다"고 기록했다. 세종의 반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하지만 세종이 그 자리에서 느꼈을 자괴감과 비참함은 쉽게 헤아려 볼 수 있다. 주관적 판단인지 몰라도 드라마보다 역사가 훨씬 극적이지 않은가? '1418년 12월 24일 저녁 술자리'를 드라마처럼 왜곡하면 그 이후 세종의 극도로 인내하는 정치스타일을 제대로 풀어내기 어렵다.
   정도전과의 대립구도도 뜨악하다. 정도전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그 중 세 명은 '1차 왕자의 난(亂)' 때 아버지와 함께 세상을 떠났지만, 정진(鄭津·1361~1427)은 중앙 고위직에 있다가 전라도 수군으로 쫓겨 내려갔다가 훗날 태종이 즉위하자 다시 불러올려 충청도관찰사를 시켰고, 세종 때는 공조판서와 형조판서를 지낸다. 이것만 보아도 태종·세종과 정도전 잔존세력의 대립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황당한 허구적 설정이다.
   모르긴 해도 이 드라마의 중심주제인 훈민정음 창제 또한 집현전 학사들이 만들었다는 식으로 그려갈 텐데, 실록에 따르면 집현전은 고려사를 편찬한 학술기관일 뿐이고 훈민정음 창제와는 거리가 멀다. 훈민정음은 온전히 세종 개인의 비밀스러운 작품이다. 신숙주나 성삼문이 명나라 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러 간 것은 이미 완성된 훈민정음이 제대로 언어로 작동할 수 있는지 여부를 점검하고 이론적인 뒷받침을 하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이 부분이 드라마에서 어떻게 그려질지도 지켜볼 일이다.
   역사 '드라마'라고 해서 마구잡이로 왜곡하고 허구를 지어낸다면 그것은 이미 '역사' 드라마가 아니다. 어쩌면 역사드라마는 현재 우리가 역사를 읽어내는 수준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얼마 전 끝난 드라마 '공주의 남자'도 '역사' 드라마의 범주에 넣기 곤란하고, 지금 방영되는 '뿌리깊은 나무'는 그 왜곡 정도가 훨씬 심하다. 차라리 현대사회를 배경으로 한 추리극이나 방영하는 게 훨씬 좋지 않을까? 굳이 '역사' 드라마를 하고 싶다면 일정한 선을 지켜줄 것을 부탁드린다. 역사드라마의 교육적 기능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