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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칼럼] 정규軍은 뒷짐지고 民兵이 치른 전투

도깨비-1 2011. 8. 26. 11:12


[김창균 칼럼] 정규軍은 뒷짐지고 民兵이 치른 전투

한나라, "주민투표 승산없다"… '오세훈 개인 전투' 線 긋고 패배 후 출구전략에만 골몰
투표장 향한 유권자 215만… 총선 웃도는 결집력 보여줘, 지리멸렬 與엔 실망과 분노


   - 김창균 논설위원/2011. 08. 25. 조선일보

 

   무상급식 주민투표를 앞두고 만난 한나라당 관계자 중에 24일 꼭 투표해 달라고, 주변에 투표를 권해달라고 부탁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번 주민투표가 왜 중요한지, 왜 주민투표에서 이겨야 하는지 설득하는 사람도 없었다. 주민투표에서 이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도 물론 없었다.
   한나라당 관계자들은 내부적으로 투표율을 22% 정도로 예상하고 있었다. 투표함을 열 수 있는 조건인 33.3%에 크게 못 미칠 뿐 아니라, 실제 나온 투표율보다도 4% 가까이 낮은 수치다. 선거에 출마하는 당사자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득표율보다 10% 정도 더 높게 목표를 잡는다. 그런 기대와 착각이 있어야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쥐어짜며 최선을 다할 수 있다. 한나라당 사람들에게 이번 주민투표는 오세훈 서울시장 개인의 승부일 뿐, 자신의 승부가 아니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투표 며칠 전부터 주민투표 패배 이후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는 출구전략을 짜느라 바빴다.
   주민투표 6일 전 한나라당 유승민 최고위원은 "주민투표에서 이겨도 져도 당이 곤란해진다"고 말했다. 여야 표 대결에서 지면 당연히 타격일 테고, 이겨도 곤란해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한나라당 사람들 설명은 이랬다. "내년 선거에서 최대 쟁점은 복지정책이다. 요즘 분위기에선 한나라당도 복지를 늘리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다. 전면적 무상급식에 반대하는 표 대결을 벌이고 나면 내년 선거를 앞두고 스스로 족쇄를 차게 된다."
   우파정당도 복지 확대를 주장할 수 있다. 그렇더라도 한정된 재원 안에서 어려운 사람에 대한 복지를 강화하는 '선별적 복지'로 가야 한다. 여유있는 사람이나 어려운 사람이나 똑같은 복지를 누리게 하기 위해 무한정 세금을 걷자는 '보편적 복지'는 결코 우파정당의 선택이 될 수 없다. 한나라당은 당당하게 자본주의 4.0을 외치지 못하고, 사회주의 1.0에 묻어갈 궁리만 하는 패배주의에 절어 있었다.
   한나라당 정두언 전 최고위원은 투표를 닷새 앞두고 "당이 조중동 프레임에 빠져서 주민투표에 대한 바닥여론이 나쁜 걸 모른다"고 했다. 공휴일에 치러졌던 2008년 총선 때 한나라당 서울후보 48명이 얻은 총 득표가 183만4534표였다. 평일 실시된 이번 주민투표에서 투표한 사람은 그보다 30만명 이상 많았다. 서울 48개 선거구 가운데 한나라당이 40곳을 휩쓸었을 때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바닥여론보다 오 시장의 이번 승부수에 대한 바닥여론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얼치기 좌파 프레임에 빠진 한나라당 사람들이 그걸 몰랐을 뿐이다.
   한나라당은 보수우파 이념을 위해 싸워야 하는 정규군이다. 이 정규군 집단은 이번 주민투표 전투를 앞두고 승리할 수 있다는 신념도, 싸워보겠다는 의지도 없었다. 정규군이 손 놓아버린 전장(戰場)을 지키며 대신 싸운 것은 민병대였다. 이들은 24일 투표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수시로 전화를 걸어와 투표율을 챙기며 걱정했다. 이들은 투표율이 33.3%에 미달할 것이 분명해진 퇴근시간 이후에도 투표장에 줄을 섰다. 그래서 오 시장이 작년 전국 지방선거에서 얻은 표보다 더 많은 투표수가 나왔다.
   야권이 주민투표를 전면 보이콧한 상황에서 투표율 33.3%를 채우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 싸움판으로 당을 끌고 들어가는 오 시장에 대해 한나라당 사람들이 짜증 섞인 원망을 늘어놓는 심정도 이해는 된다. 그러나 전투는 자기가 원할 때, 원하는 전선(戰線)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니다. 군인이 "나는 싸울 채비가 안 됐는데 옆 동료가 잘못 방아쇠를 당겨 벌어진 전투니까 진지를 지키지 않겠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패배가 예고돼 있어도 전력을 쏟아부어 싸워야 하는 게임이 정치다. 민노당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믿고 후보를 내는 것은 아니다. 자신들의 가치를 내걸고 유권자를 설득하며 득표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당의 터전이 다져지고 넓어진다. 5% 정도 얻을 줄 알았던 후보가 10% 얻으면 박수를 받고, 30% 얻을 줄 알았던 후보가 25% 얻으면 패자 취급하는 게 정치다. 33.3% 투표율이 불가능하더라도 30%선을 넘기기 위해, 그것도 어려우면 25%만이라도 넘기기 위해 사력(死力)을 다해야 한다. 한나라당 지지자들은 한나라당에 그런 모습을 기대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수수방관했고 지리멸렬했다.
   우파 유권자들은 주민투표 전투에 등을 돌린 한나라당 사람들의 태도에 실망했고 분노했다. 이들에게 내년 두 차례 선거라는 큰 전투를 맡겨도 좋을지 회의를 느끼게 됐다. 그 점이 33.3%에 미달한 투표율보다 한나라당에 더 큰 위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