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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식 칼럼]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를 만난 뒤

도깨비-1 2011. 8. 26. 11:18


[최보식 칼럼]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를 만난 뒤

국정원의 前身 안기부는 그녀를 체포했고
좌파 정권의 국정원은 그녀를 '가짜'로 몰아…
국정원의 존재 이유와 직업 윤리를 묻게 돼


 - 최보식 선임기자/ 2011. 08. 25 조선일보

   'KAL기 폭파범' 김현희씨의 인터뷰가 나간 뒤, 그녀의 육성(肉聲) 녹음을 다시 들었다.
   "내가 바레인에서 못 죽고 살아서 이 고생인가. 이민 가면 정말 '가짜'가 되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 사건의 증인인 내가 살아있어도 뒤집으려고 하는데. 자국민(113명)이 숨진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이런 비열한 공작이 세상 어디에 있느냐."
   그녀가 '등에 비수가 꽂히는' 느낌을 받았다는 대상은 우리의 국정원이었다. 국정원의 전신(前身)인 안기부는 그녀를 체포했고, 지난 정권의 국정원은 그녀를 '가짜'로 몰아간 것이다. 같은 뿌리인데 정권이 바뀐 차이밖에 없다. 정권만 바뀌면 '사실(事實)'을 180도 뒤집을 수 있음을 국정원이 보여준 것이다.
   국정원 안에는 'KAL기 사건'과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여전히 보관돼 있다. 바보가 아닌 수사관이라면 일람(一覽)만 해도 그 사건이 조작될 수 없음을 안다. 당시 그 사건의 진상파악을 위해, 폭파범 '마유미'의 신병인도를 위해, 그녀의 자백을 받기 위해, 숱한 수사관과 외교관들이 뛰었다. 그녀 진술을 뒷받침할 증거물도 보강됐다.
   국정원은 이런 수사결과물 중 초동수사 때의 몇 가지 오류를 방송국에 흘렸다. 선별적 자료제공이었다. 정권과 결탁한 방송과 시민단체가 이를 '조작사건'으로 여론몰이를 할 수 있게 해준 것이다. 방송 3사는 돌아가며 '의혹' 시리즈를 방영했고, 그녀의 출연을 국정원이 압박했다. 지난 정권 동안 KAL기 폭파사건을 '자작극', 김현희를 '안기부 공작원'으로 만들어냈다.
   이 국가정보기관은 청와대 쪽을 쳐다봤을 것이다. '정권 안보'가 우선이었는지 모른다. 국정원은 자신의 과거(過去)인 안기부의 수사를 뒤집기 위해 다시 조사를 벌였다. 당시 사건 관계자들을 만나 다른 말을 듣기를 원했다. 1987년 12월 7일 김현희의 신병인도를 위해 바레인에 갔던 박수길 외무부 차관보도 그런 조사를 받았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북한과 친한 시리아의 언론매체는 '한국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미국은 외교적으로 우리를 도왔다. 바레인 정부는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신들은 북한의 단련된 공작원에 대해 잘 모른다. 왜 이런 폭탄을 품고 있나. 북한의 테러가 뒤따를지 모른다. 내게 주어진 시간은 13일까지다. 나도 들어가서 할 일이 많다'고 압박했다.
   바레인 정부는 그녀의 한국행이 노출될 경우 발생할 테러를 가장 신경썼다. '데려갈 비행기는 도착 한 시간 만에 떠나야 한다'. 하지만 13일 출발하기로 된 이 결정은 내각회의에서 한 각료의 반대로 하루 연기됐다. 다음날 국왕 앞에서 수사책임자가 사건진상을 설명해 최종승인을 받았다.
   그녀를 압송할 대한항공 특별기는 정규편인 것처럼 왔다. 관제탑에 '급한 환자가 있어 착륙한다'고 알렸다. 12월 15일 새벽 3시였다. 이렇게 해서 비행기가 국내에 도착한 날이 대통령 선거 하루 전날이 됐다. 일각에서 비행기가 싱가포르 혹은 제주도에서 하루 기다렸다가 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내가 협상하면서 본국과 교신한 전보 등 문건이 다 남아있다. 있는 사실을 뒤집어서는 안 된다."
   지난 좌파 정권의 사실 뒤집기는 어디서 본 듯한 낯익은 감이 없지 않다. KAL기 폭파사건 두 달 뒤, 유엔 안보리가 소집됐다. 이 자리에서 지금도 재임 중인 북한의 박길연 유엔대사가 단상에서 2시간 동안 떠들었다.
   "남조선의 외교관이 금은보화와 200만달러를 받고서 바레인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기생년을 공작원으로 만들어 싣고 왔다."
   듣고 있던 바레인 대사가 흥분했다. 우리는 북한처럼 될 수는 없었다. 니체의 말을 인용해 "악마와 싸우기 위해 우리가 그 과정에서 같은 악마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고 연설했다. 중국과 소련조차 북한 편을 들지 못하고 "국제 테러리즘을 규탄한다"고 짧게 말했다.
   지난 정권의 국정원도 이런 과정을 다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당시 분위기상 불가피했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북한의 테러범행을 남한이 저지른 것으로 뒤집으려는 공작은 이적(利敵)행위와 다름없었다. 이는 국가안보를 지킨다는 국정원의 존재이유를, 음지(陰地)에서 일하는 구성원의 직업윤리를 묻는 것이다.
   현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녀는 모든 게 제자리를 찾을 줄 알았을 것이다. 이런 내용을 편지로 국정원장에게 전했다. 하지만 국정원은 별로 심각하게 느끼지 않은 것 같다. 한 국정원 직원은 그녀에게 "너무 그러지 마라. 또 정권이 바뀌면 어떡할래"라고 했다고 한다. 사실이 거짓이 되고 거짓이 사실이 되는 공작과 선동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