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천석 칼럼] 盧 전 대통령이 화나고 기(氣)가 찰 일들
말은 포퓰리스트처럼 행동으론 한미 FTA 밀고 나간 노무현
공짜 중독된 국민… 마지막엔 공짜 판 정치인들 잡아먹어
2011년 6월 25일/ 조선일보 주필
본바닥 마피아는 얼치기와 어디가 달라도 다르다. 시칠리아 출신 어느 은퇴한 마피아의 회고담이다. "대여섯살 무렵이었어요. 그때 아버지는 마피아 현역이셨죠. 한번은 저를 번쩍 안아 제 키 두 배 높이의 담장 위에 올려세워 놓더니, 아래쪽에서 저를 받아줄 자세를 취하며 '뛰어내려…'라고 말씀하셨어요. 겁은 났지만 '어서, 어서…' 하는 재촉에 떠밀려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렸죠. 어떻게 됐을 것 같아요. 뛰어내리면 받아줄 듯 팔을 벌리고 있던 아버지는 그 순간 손을 슬쩍 치워버렸고, 저는 여지없이 땅바닥에 이마를 처박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제 손에 쥐여주려 하셨던 지혜가 뭐라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 후였지요. '남의 말을 그대로 믿지 말라, 가족, 심지어 아버지 말도 의심해보는 습관을 몸에 붙이라'는 것이죠." 그 아들이 장성해 수십년간 마피아 현역 복무를 탈 없이 마치고 회고담을 들려줄 정도가 됐으니 마피아의 자식 교육은 성공을 거둔 셈이다.
올해 들어 여·야는 경쟁적으로 복지사회 대책이란 이름으로 '반값' '완전 공짜'를 외쳐대며 국민 소매를 잡아끄는 호객(呼客)행위를 벌여왔다. 국민들은 한쪽에서 '반값' 하면 거기 혹(惑)해 그쪽으로 쏠렸다가 다른 쪽에서 '공짜'라고 치고나오면 이번에는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꽤 안다는 사람, 말 좀 한다는 사람, 글줄이나 쓴다는 사람들도 일당(日當)받는 엑스트라처럼 양쪽 가게의 확성기 노릇이나 해댔다. 대학 등록금 문제 하나로 나라가 이리 휘청거리는데 총선·대선까지 '건강보험 무료 고개', '무상보육 고개', '무상급식 고개'라는 첩첩고개를 이런 식으로 넘다간 필시 나라를 결딴내고 말 것이다. 국가 부도(不渡)가 코앞에 닥쳤는데도 복지예산 삭감에 항의하며 의사당을 둘러싸고 철야 횃불시위를 벌이는 그리스 국민들 모습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공짜에 중독된 국민은 마지막엔 공짜를 팔던 정치인을 잡아먹으려 덤비는 법이다.
돌팔이 의사는 당뇨병 환자에게 매일 알약 몇 개 목 너머로 털어 넣기만 해도 된다는 처방전을 내민다. 식사를 절반으로 줄여 체중(體重)을 감량하고, 술은 절대 삼가며, 어지간한 거리라면 무조건 걷는 습관을 들이라는 말은 입 밖에도 내지 않는다. 지각없는 환자들 사이에선 이런 의사가 명의(名醫)로 통한다. 고교 졸업생의 82%가 허깨비 같은 대학 안으로 꾸역꾸역 밀려가 대학생 숫자가 300만명이 넘는 이상(異常) 비대(肥大)의 대학 현실에 눈을 감고 앞으로 3년 동안 8조3000억을 퍼넣어 등록금을 30% 낮추겠다는 한나라당의 처방전이 꼭 이 꼴이다. 한 술 더 떠 '반값'을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민주당 모습은 의사 면허증을 갖고 있고 개업(開業)을 한 적도 있다는 그들 말이 거짓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저 세상에서 지금 나라 꼴을 내려다보고 있다면 화가 치밀고 기(氣)가 찰 것이다. 재임(在任)시엔 대통령답지 않은 말투와 내편·네편의 이분법(二分法)으로 나라를 쪼개는 정치방식 때문에 포퓰리스트라고 흉도 많이 잡혔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 미국 바짓가랑이에나 매달려' '진보 언론까지 나를 조져대니' 등등의 표현은 거친 게 사실이었다. 이런 대목은 포퓰리스트 정치가의 모델로 꼽히는 아르헨티나 대통령 페론이 1953년 일부러 상스러운 말투를 써가며 '아르헨티나를 세계 최고의 복지국가로 만들겠다'는 연설로 광장을 메운 수십만 군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말과는 달리 몇몇 분야를 제외하곤 포퓰리즘 정책을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무역으로 먹고사는 대한민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한미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서둘렀다. 지지자들의 맹렬한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쇠고기 문제를 양보하며 FTA를 밀고 나가는 데는 번민도 컸을 것이다. 이라크 파병 역시 마찬가지다.
그랬던 노 전 대통령으로선 무슨 때만 닥치면 자기의 정치적 상속자라는 도장을 받으려 무덤 앞에 찾아와 큰절을 해대는 민주당이 한·미 FTA 비준 저지에 목을 거는 걸 보고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또 걸핏하면 자기더러 포퓰리스트라고 손가락질하던 한나라당이 '반값 플래카드'를 가슴에 안고 민주당 '공짜 깃발'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가는 모습에는 얼마나 기(氣)가 차겠는가. 지금 노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란 마피아만도 못해…, '반값이니까, 공짜니까 안심하고 뛰어내려' 하는 그들 꾐에 빠져 뛰어내리다간 목뼈가 부러지고 말 것"이라고 국민에게 귀띔해주고 싶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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