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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갑식]일본 동화 '소바 한 그릇'에서 건져 올린 獨島 망언의 뿌리

도깨비-1 2011. 4. 5. 10:03


[문갑식의 세상읽기] 일본 동화 '소바 한 그릇'에서 건져 올린 獨島 망언의 뿌리

감동적인 픽션을 사실로 만들려다 엉뚱한 폭로로 끝나
객관적 역사서술 없고 '대세사관'이 주류
독도 억지나 엉터리 原電 대응도 따져 보면 같은 뿌리
      문갑식 선임기자/조선일보 2011. 04. 05

 

'이 이야기는 지금부터 15년 전 12월 31일 삿포로시 소바집 북해정(北海亭)에서 시작된다….' 지난 주말 이렇게 시작되는 일본 동화 '소바 한 그릇'을 다시 꺼냈다. 열 번도 더 읽은 구리 료헤이(栗良平)의 작품을 또 손에 쥐게 된 건 그날 조간신문 때문이었다.
   1면에 '독도(獨島)는 일본 땅이니 미사일을 맞으면 우리가 대응하겠다'는 뉴스가 실려 있었다. 자위대 출신 의원의 엉뚱한 질문에 이등박문(伊藤博文)의 외고손자가 장단 맞춘 황당한 답이었다. 그는 동일본이 지진·해일로 쑥밭이 되기 이틀 전 외상이 됐다.
   눈물 없이 못 볼 글을 '고관대작의 헛소리는 그네나 우리나 같다'고 생각하며 감상하는 것만큼 객쩍은 일도 없겠지만 '소바 한 그릇'은 여전히 감동적이었다. 등장인물은 사고로 남편을 잃고 두 아들과 사는 어머니, 북해정에서 소바 파는 주인 부부다.
   섣달 그믐날 밤 모자(母子)가 북해정에서 150엔짜리 도시코시(年越·해넘기기) 소바 한 그릇을 나눠 먹고 간다. 몇 년째 같은 시각에 찾아오는 모자를 이젠 북해정 부부가 기다린다. 주문한 소바가 1인분에서 2인분으로 바뀔 때, 모자의 사연이 공개된다. 아버지 빚을 다 갚았다는 어머니에게 큰아들도 비밀을 털어놓는다. "동생 작문이 도(道) 대표작이 됐어요. '소바 한 그릇', 북해정 이야기래요. 동생은 우리에게 큰소리로 인사해준 아저씨 아주머니의 말이 격려처럼 들렸대요. '지면 안 돼, 열심히 살아야 해!'라는."….


 ■   이 작품은 1987년에 발표됐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그랬던 게 1년 뒤 FM 도쿄의 송년 프로그램에서 낭독되면서 반향이 시작됐다. 산케이신문이 사회면 톱으로 다뤘고 주간문춘(文春)이 전문(全文)을 게재했다. 이 주간지가 당시 단 제목은 '편집부원도 울었다!'였다. 그때부터 전 일본이 울음바다 속으로 침몰했다. 지하철에는 '전차 속에선 이 책을 읽지 마십시오'라는 광고가 등장했다. 명사를 동원해 '눈물 흘리기 콘테스트'를 시작한 TV도 있었다.
   '1억 총(總)눈물', 안 울었다간 왕따당할 것 같은 분위기는 1년 만에 신화(神話)가 허무하게 끝나며 바뀌었다. 엄연한 픽션을 두고 주간지들이 '실화냐 아니냐'며 주인공 찾기에 골몰하던 차에 엉뚱한 폭로가 나온 것이다. "내가 잘 아는데…, 구리 료헤이는 사기꾼이다!"
   '허구'조차 어떻게든 '사실(事實)' '사실(史實)'로 만들고 싶어하는 일본인을 이어령(李御寧)은 이렇게 해석한다. "한국·중국에서 역사 서술의 비조(鼻祖)는 사마천(司馬遷)이다. 역사는 객관적으로 적어야 했고 군주도 손댈 수 없는 전통이 거기서 비롯됐다. 반면 일본에선 권력 쥔 막부(幕府)의 필요에 따라 상인의 장부처럼 가감하거나 날조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걸 '대세사관(大勢史觀)'이라 한다. '이기면 관군, 지면 역적'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둔갑시키는 것이다."

 ■  둔갑의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일본인이 군신(軍神)처럼 여기는 노기(乃木) 대장은 청빈(淸貧)의 상징이지만 실은 도쿄 대저택에서 하인 40명을 부렸다. "어떻게 그 월급으로…"라고 물으니 "일본 군대의 군화를 오쿠라(大倉) 것만 사게 해줬더니"라고 답했다고 한다.
   '둔갑'이 산업에선 재활용이 된다. 일본인들은 생선가시조차 어묵으로 만들 만큼 치밀하다. 지금은 끝장난 후쿠시마 원전(原電)을 재활용해 보려 별의별 악수(惡手)를 다 두고 있다. 이걸 종합해 보면 그들이 일제 때 수탈을 '수용', 신사참배 강요를 '장려', 징용을 '동원'으로 탈바꿈시킨 구조를 알 수 있다. 외국인 눈에 영락없는 토끼집이 '맨션(豪邸)'으로, 미친 사람이 '색다른 사람'이 되는 건 일본인이 예의 바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고 보니 동화 '소바 한 그릇' 속 주인공들도 예사 사람이 아니다.
우리 같으면 체면 때문이라도 셋이 소바 한 그릇 놓고 궁상떠느니 집에서 편히 라면을 끓여 먹었을 것이다. 가게 주인도 십중팔구 '그 돈 없어 굶어 죽을 것도 아닌데'라며 모자에게 공짜 밥을 줬을 것이다. 그런데 이 모자는 섣달 그믐엔 꼭 소바를 먹겠다는 뜻을 버리지 않는다. 질세라 소바집 주인 부부도 '인정은 인정, 장사는 장사'라는 상도(商道)를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은 세계에서 홀로 핵폭탄을 맞아봤다. 이번엔 원전(原電)사고로 세계에서 유일하게 핵으로 두 번 고통받게 됐다. 그 기구한 팔자를 지닌 나라 사람들이 한때 열광했던 '소바 한 그릇'의 이면에서 독도와 원전사고의 뿌리를 건져 올렸다. 참 야릇한 주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