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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근일 칼럼] '北 홀로코스트'에 분노의 공감대를

도깨비-1 2013. 12. 25. 10:37

[류근일 칼럼]

'北 홀로코스트'에 분노의 공감대를

北 판결문만으로는 張은 무죄, 북한 거덜 낸 장본인은 김씨 집안
정치권·시민단체 침묵해도 자유 민주 공화의 시민 정신은
北의 폭정과 야만에 개입해야… 아니면 역사의 비판 받을 것

 

입력 : 2013.12.24 05:49 | 수정 : 2013.12.24 06:48/조선일보

류근일/언론인

 

조선중앙통신이 전한 장성택 판결문만 보면 그는 적어도 '국가 전복 음모'에 관한 한 무죄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판결문 어느 구석에도 그가 '인민공화국'을 없애려 했다거나, 김씨 왕조를 폐지하려 했다거나, 조선노동당 일당독재를 철폐하려 했다거나, 폭력을 쓰려 했다거나, 미제의 간첩이라거나 하는 대목은 없으니 말이다.

기껏해야 "경제가 완전히 붕괴하면 자기가 총리가 되겠다는 개꿈을 꿨다" "총리가 돼 돈을 풀면 인민과 군대가 자기 만세를 부를 것이라고 망상했다"는 정도다. 개꿈과 망상이 어떻게 '국가 전복 행위'가 된다는 것인가?

결국 김정은과 '반(反)장성택 연합'이 장(張)을 참살한 것은 그가 진짜 '국가 전복'을 꾀해서라기보다는, 너무 많이 거느렸고, 너무 많이 '문어발'이었고, 너무 많이 보따리를 찼고, 너무 많이 챙겼고, 너무 많이 '1번 동지' 행세를 한 탓이었을 듯싶다. 그러나 권력투쟁은 항상 명분 투쟁을 동반한다. "선군(先軍)주의냐 경제주의냐, 교조주의냐 수정주의냐" 같은 게 그것이다.

공산당 숙청사(史)에 등장하는 흔한 죄목 중 하나가 수정주의란 것이다. 공산주의자면서도 경제는 경제 논리로 다루려 한 '이윤파(利潤派)'를 뜻했다. 스탈린, 마오쩌둥도 정적(政敵) 부하린, 류사오치를 다 그 명목으로 죽였다. 장성택도 그런 수정주의 부패 분자로 몰렸다. "자본주의 날라리풍을 불러들이고…" 같은 판결문 대목이 그걸 말해 준다.

북한을 거덜 낸 장본인은 그러나 수정주의 이윤파가 아니라, 선군주의로 경제를 파탄시킨 김씨 왕조와 그 훈구(勳舊)파였다. 그러나 '절대 진리'인 그들이 잘못을 시인할 순 없다. 모든 나쁜 일은 안팎의 적 탓이어야 한다. 그래서 적은 계속 있어야만 한다. 과도기일수록 그 적들에 대한 무자비한 투쟁은 더욱더 있어야 한다.

근래에 와 그들은 특히 "돈벌이를 장려하고… 안일 해이하고 무규율적인 독소를 퍼뜨리는" 장성택식 세속주의를 마냥 놓아두었다간 그것이 장차 자신들의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손(聖孫)'의 3대 신정(神政) 체제를 흐트러뜨리지나 않을까, 우려했을 수도 있다. 이래서도 누군가는 반드시 역적 자리에 와 있어야 했다. 그것이 마침 장성택이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역적 몰이는 이것으로 다 끝나는 것인가?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둬야 하는가? 지금으로선 그저 두고 볼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 그러나 21세기 대명천지에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 러시아의 이반 4세, 프랑스혁명 과격파 로베스피에르, 아이티의 파파 독, 우간다의 이디 아민 같은 폭압이 한반도 북쪽에서 저렇듯 피비린내를 풍기는데도 문명(文明) 세계가 아무런 분노도 의협도 표하지 않는다면 그건 문명적이라 할 수 없다.

더군다나 한반도의 문명됨을 대표하는 대한민국의 자유 민주 공화의 시민 정신은 이 참극을 더욱더 방관할 수만은 없다. 통렬한 도덕적·감성적 개입을 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천황제 파시스트' 체제의 권력 핵심부가 자행한 친위 쿠데타로 규정하고, 정적들에 대한 그들의 야만적 살육을 문명 세계 전체의 긴급 의제로 상정해야 한다.

관료는 관료이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새누리 웰빙족은 그렇게 안 하는 게 오히려 제격이다. 민주당과 재야 '민주 투사'들은 '박근혜 유신 독재(?)'엔 천막 농성으로 맞섰지만 '김정은 살인 독재'엔 너무나 차분하다. 국정원 댓글에 '박근혜 아웃'으로 맞선 신부 운동꾼들도 보위부 특별 군사재판의 인간 도살엔 '김정은 아웃'으로 맞서질 않는다. 그런 김정은 체제를 "강화해줘야 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홀로코스트의 주범 히틀러를 강화해주자는 것인가? 교황 비오 12세는 그것에 침묵한 것만으로도 비난을 샀다.

자유 민주 공화의 시민 정신은 그런 부류와는 달라야 한다. 남북을 통틀어 "박수 좀 건성건성 했다고 사람을 어떻게 기관총으로 찢어발기고 화염방사기로 지지느냐?"는 인간 분노의 공감대를 이뤄야 한다. 그 공감대 위에 남북을 트는 '반(反)폭정 피플스 파워'를 엮어 세워야 한다. 남북 양쪽의 분노한 사람들, 요덕을 거부하는 사람들, 잔인함에 몸서리치는 사람들, 국제사회 양심들, 그리고 맞아 죽고 굶어 죽고 처형당한 원귀(寃鬼)들까지 '폭정 종식'의 대합창에 초대해야 한다. 그리고 노래해야 한다. "시대의 학살이여/ 학살의 시대여/ 핏빛 강물 흐르면/ 너의 시대도 끝나리/ 끝나게 하리." 한반도 북쪽의 홀로코스트에 침묵하는 것, 훗날 역사의 냉엄한 비판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