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

사벌(沙伐) ․ 4

도깨비-1 2008. 12. 2. 11:58

사벌(沙伐) ․ 1

- 경천대

 

서라벌, 달구벌, 사벌…

그렇습니다. 모래 벌 - 사벌입니다.

계곡을 숨 가쁘게 달려온 시내(川)들이 모여

드디어 강(江)이 되는 곳

낙동강이

찬 숨 좀 고르고

편안히 쉬었다가 가는

너른 모래 벌

- 사벌(沙伐)하고도 경천대입니다.

내 유년이 뒹굴고 뛰어놀던

구릉이며 들판이며 시내이며 강입니다

내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아버지들이

내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긍지와 자부심으로 지키고

고난과 설움과 싸워서 지킨

터전입니다

사벌국(沙伐國) 이래 착한이들 모여

오순도순 비와 바람과 이웃하며

터 일궈 농사짓고 생을 꾸린

세상에서 제일 넓었던 들판입니다.

상주하고도 사벌

그 들판 위로 雨水 뒤의 훈풍이붑니다

땅 기지개소리 들립니다.

겨우내 잠들었던 씨앗들이

자연의 기운을 먼저 알았습니다.

아, 그 흙냄새-봄 내음을 아시나요?

아지랑이 사이 우리네 농사꾼의

헛기침소리 들판을 가릅니다.

일상의 고단함 속에서도

달리 이름 하지 않아도 좋을

세월이며 삶이 있습니다.

사벌들에 바람이 분다고

사벌들엔 바람이 분다고

북서 삭풍을 지나

이제 봄바람, 신바람, 일바람…

그렇게 또 한 세월의 농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벌(沙伐) ․ 2

- 여름 장마

 

노고지리 하늘 높던

봄을 지나

밀, 보리타작

모내기 때면

젖먹이 동생 들쳐 업고

새참 길에 따라나섰던

구불구불한 논둑길사이로

피어오르던 아지랑이

그 너머 당신

모습도 아련한

세월입니다.

그 어느 해

장마 비, 장마 비

그 지루한 장마 속에서도

무너지진 않으셨지요?

세상에서 제일 넓은 그 초록 들판이

온통 흙탕물 바다가 되었어도

희망을 버리진 않으셨지요,

그 때 당신은.

더는 어찌할 수 없음에도

논 옆 터지다 만 천방(川防)

멍석 몇 장

말아 지고

빗속을 뚫고 나가셨을 때

그 때는 우셨지요, 아버지.

온 밤 내내

천둥 번개사이

한숨을 삼키던

헛기침

한 여름 뙤약볕

김매랴, 거름하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그래도

무럭무럭 자라는 벼들을 보며

행복하셨지요?

그때는

 

 

사벌(沙伐) ․ 3

- 가을 들판

 

寒露 ․ 霜降

아침저녁의 한기가 깊은

가을 들녘입니다.

볏 잎들 사이

거미줄에 걸린

이슬방울 영롱한 아침나절

햇살이 참 곱다 싶습니다.

벌판을 가로지르는 바람아래

열병식을 하듯

고개 숙인 벼 이삭들

물결이

어느 물결이

이보다 아름다울 수

이보다 더 넉넉할 수 있을까요

살랑살랑

이는 바람

오늘은 사벌들도 넓지요

그저 그 들판 가에

서있기만 하여도

저 끝자락

건너다 보기만하여도

좋으시지요?

벼메뚜기, 고추잠자리

논길을 뛰어다니던 아이들

그 재잘거림.

그 아이들의 노랫소리가

여기 어디

저기 어디

가을이 깊어

그리움이 깊어

더 넉넉한 모래 벌

오늘은 더 넓은 들판입니다.

 

 

사벌(沙伐) ․ 4

- 겨울 눈보라

 

겨울입니다.

바람입니다.

눈입니다. 아니 눈보라입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허허로운 벌판을 가로질러

북서풍 끝자락에 걸린

눈보라입니다.

온 세상을 다

꽁꽁 얼릴 기세로 달려드는

눈보라입니다.

앞을 가늠할 수 없는 눈보라 속에

하교 길의 자전거 한 대 갇힙니다.

저녁 어스름의 부엌은

밥 짓는 일로 분주하고

얼은 몸은 군불로 달궈진 아랫목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비명입니다.

밤이 들어 바람이 잦아들고

이른 새벽은 온통 눈 세상

강아지들의 세상입니다.

무릎까지 빠지는 언덕 위를

아이들 같이

폴 폴

아침 햇살에 날립니다.

초가지붕 위의 눈들이

한낮 햇살에 녹으면

각시방 영창에 매달 고드름

주렁주렁 열립니다.

그 눈보라 속에 갇힌 내 유년

아버지가 아래채 소죽 간에서 나오시고

어머니 그 눈길에 물동이 이고 부엌에 들어서며

이 아들을 반깁니다.

이제는 헐려진

아래채

소죽아궁이의 군고구마

아직 손이 뜨겁습니다.

그 때 내 작은 아이들은 없었어도

내 작은 아이들을 닮은 내가 서 있고

나보다는 더 아버지였던

아버지가 계십니다.

오늘은 눈

30여 년 전의 눈보라에

반백의 내가 갇힙니다

'한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당치 않음으로  (0) 2008.09.06
기 도 - 바람의 흔적  (0) 2008.08.05
아 내 . 36  (0) 2007.10.16
사벌(沙伐) ․ 3  (0) 2007.10.16
사벌(沙伐) ․ 2  (0) 2007.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