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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건축

도깨비-1 2005. 12. 12. 10:57

日本建築

Japanese architecture

일본의 건축.

일본의 전반적인 문화가 끊임없이 외국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수용하여 이를 일본 고유의 것으로 전개시켜 나갔듯이 건축도 유사한 속성을 갖고 전개되어왔다. 원시시대를 벗어나 본격적인 건축물이 지어지는 과정에서는 한국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으나 이후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중국식 목조건축술을 발전시켜나갔다. 19세기말 다시 서양과의 접촉이 시작되면서 서구식 새로운 건축을 만들어나갔다. 외래 건축의 수용과 함께 일본의 자연조건이나 종교, 그리고 일본인의 고유한 심미관 등이 영향을 주어 고유한 건축문화가 형성되었다.

특색

국토의 대부분이 수목이 울창한 산으로 덮여 있고, 양질의 목재가 풍부한 자연 조건 속에서 목재가 건축 재료의 주종을 이루었다. 이점에서 화강석이 많이 이용되는 한국이나 벽돌을 적극 활용한 중국의 건축과 크게 대조된다. 비가 자주 오고 여름에는 무더우며 습도가 높은 기후조건 때문에 대체로 지붕은 경사가 급하고 실내는 개방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보면 오랫동안 불교가 생활에 밀착되어 있어 건축에서도 불교사찰이 주류를 이루었지만 고유한 종교인 신도(神道)에 영향받은 신사건축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불교건축이 중국식 건축 형태를 갖고 있는 데 반해 신사건축은 원시시대 건축에서 유래되는 고유한 형태를 간직하는 점이 주목된다. 오랜 농경생활 속에서 자연과 동화된 가운데 일본의 고유한 건축관이 형성되었는데, 좌우 비대칭의 건물배치, 수평성을 강조한 외관, 굴곡이 없는 평탄한 실내공간, 단순한 형태, 치밀하게 정비된 세부의 처리 등이 특징이다. 건물배치에서는 여러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서거나 좌우가 서로 대칭이 되지 않도록 함으로써 경직된 딱딱한 외부공간을 만들지 않으려는 의도가 뚜렷이 나타난다. 건물 외관은 지붕 처마의 평탄한 선을 비롯하여 기둥을 연결하는 여러 개의 수평 부재들과 건물 사방에 설치된 툇마루들로 해서 전체적으로 수평적인 안정감을 이룬다. 실내는 네모 반듯한 단순한 내부와 반듯이 처리된 천장으로 밝고 반듯한 실내공간을 꾸미고, 복잡한 채색을 피해 색채를 단순화하고, 창살의 무늬도 수직과 수평선으로 구성하는 등 외관을 단순하게 처리한다. 각 부재의 가공에서는 부재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가공하고 이것들이 서로 치밀하게 맞물리고 서로간에 일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도록 하여 정연하게 정돈된 형태미를 추구한다.

고대

고대는 흔히 원시시대를 거쳐 고대 국가가 형성되는 6세기를 지나 중앙집권적 관료사회가 서서히 무너지는 12세기 중반까지를 지칭한다. 이 시기에는 한국에서 불교가 도입되면서 본격적인 건축물이 만들어졌고 다시 중국의 영향을 받으면서 건축술에 큰 발전을 보이다가 점차 일본의 풍토에 맞는 토착적인 건축으로 정착되어가는 과정을 밟았다. 불교 도입 이전, 원시시대에는 주로 움집과 일종의 다락집이 지어졌다. 움집은 땅바닥을 파내고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지붕을 설치한 것으로 대개 가족들의 일상적인 주거로 사용되었으며, 바닥을 지면에서 높이 올려 만든 다락집은 곡식을 저장하는 창고로 쓰였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부족민의 안녕을 비는 신사건축은 이때부터 발생했는데 주로 다락집의 구조를 갖춘 단순하면서도 상징적인 형태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세기 중반경에 한국을 통해 불교가 도입되었는데, 주로 백제 기술자들의 지도하에 사찰이 세워지면서 건축은 종전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획기적인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 사[法隆寺]의 금당과 5층탑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의 지도로 지어진 대표적인 현존 건물이다. 돌로 네모반듯한 기단(基壇)을 설치한 것이나 둥근 기둥 위에 공포(拱包)라고 하는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사용한 점, 처마에 곡선이 생기고 지붕에 기와를 덮는 방식 등은 그 전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던 새로운 기법들이었다. 특히 이 건물들에는 공포 부분에 구름 모양을 새긴 부재가 나타나고 건물 주변에는 만(卍)자를 무늬화한 난간 장식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고구려나 백제 건축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당(唐)나라와의 교류를 통하여 중국 건축의 영향을 받으면서 구조적인 발전을 거듭하는 한편 일본 고유의 조형 감각을 살린 건축물도 나타나게 되었는데, 8세기에 지어진 야쿠시 사[藥師寺] 동탑이 대표적인 예이다. 3층 목탑인 이 건물은 각층 탑신부에 다시 가늘고 섬세하게 가공한 벽체(壁體)를 부가하고 작은 크기의 지붕을 따로 설치하여 전체적으로 음악적인 율동감과 섬세한 외관을 구성하여 일본건축의 독특한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귀족층 사이에서 불교 중에서도 밀교나 정토교가 유행하게 됨에 따라 건축의 토착화가 촉진되었다. 밀교 영향으로 사찰은 산악 신앙을 반영하여 주로 산간에 짓게 되었으며 그에 따라 산의 자연지형에 영향받은 불규칙한 건물 배치가 나타나고 예불 방식도 변화하면서 평면도 달라지게 되었다. 불상을 모신 본당 앞에는 예불을 위한 하이덴[拜殿]이 생기고 두 건물이 하나의 지붕으로 연결되면서 건물 내부는 불상을 모신 나이진[內陣]과 예불을 하는 게진[外陣]으로 구분하게 된 것이다. 정토교의 유행은 서방 극락정토를 현세에 구현하려는 시도를 낳았고 그에 따라 건물들은 극락세계를 구현한 듯한 화려한 치장과 아름다운 누각으로 둘러싸인 모습을 하게 되었다. 우지[宇治] 시의 뵤도인[平等院] 아미타당은 당대의 건축관을 잘 나타내는 예이다. 이곳에는 아름다운 연못을 앞에 두고 좌우대칭으로 누각을 갖추고 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봉황 장식을 올린 건물이 있고 실내에는 금빛 화려한 불상을 모셨다. 실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문헌을 통하여 고대의 귀족 주택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신덴[寢殿]을 중심으로 동·서·북에 각각 부속 건물이 세워진 좌우대칭 구성을 하는 것이 특징이고 실내 공간이 기능상으로 명확히 분화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시기의 주택 형식을 신덴즈쿠리[寢殿造]라고 부른다.

중세

중세는 12세기초 정치 실권을 쥔 무사 세력이 가마쿠라[鎌倉]에 실질적인 행정부인 바쿠후[幕府]를 설치하면서 시작되어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지방 각지에 영주들이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면서 서로간에 대립적인 관계를 지속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건축의 중심은 주로 불교사찰이었다. 불교는 여러 교파로 나누어지고 지방 각지로 확산되었으며 그에 따라 교파나 지역에 따라 각기 특성을 달리하는 건축물이 지어졌다. 무엇보다도 중국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건축형태가 도입된 것은 중세 건축의 가장 중요한 점이다.

12세기초에 도다이 사[東大寺]의 대불전을 재건하면서 중국 남쪽 지역의 새로운 구조형식이 도입되었다. 높은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 사이를 누키[貫]라고 하는 횡부재를 여러 층으로 중첩하여 축부를 고정시키고 천장을 노출시키면서 굵고 흰 보를 걸치는 이 구조는 호방하면서도 구조적인 강력한 힘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구조형식을 취한 건물은 그 전에 지어지던 섬세한 외관을 중시하던 건물에 붙여진 명칭인 와요[和樣]와 구별하여 다이부쓰요[大佛樣]라고 불린다. 이와 별도로 13세기에는 다시 중국으로부터 선종이 도입되면서 그와 함께 새로운 구조형식이 전래되었는데 이러한 형식의 건물은 젠슈요[禪宗樣]라고 부른다. 젠슈요는 공포 부분에서 이제까지 기둥 위에만 처마를 받치는 부재인 포(包)를 설치하던 것과는 달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포를 설치하는 것으로 한국건축의 다포형식과 유사한 것이다. 한국건축의 다포형식 건물과 마찬가지로 젠슈요에 속하는 건물들은 우선 처마 밑에 복잡하게 가공된 많은 부재들이 중첩되고 실내에는 복잡하게 가공된 많은 부재들이 중첩되어 있어 화려하면서도 장엄한 느낌을 준다. 다만 일본의 젠슈요는 지붕을 구성하는 구조 방식이 변화한 결과, 건물 외관이 더욱 섬세하고도 정연하게 가공되는 점이 특징이다.

일본건축의 지붕은 일찍부터 많은 강우량에 대처하면서 경사가 급하게 되었는데 그결과 처음 한국이나 중국에서 도입될 때와 같이 서까래 위에 많은 흙을 덮던 방식을 바꾸었다. 즉 서까래와 지붕널 사이를 공간으로 만들고 그 사이에는 실제로 힘을 받치는 별도의 서까래를 내부에 설치하여 지붕의 경사는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도록 했으며 처마에는 시각적인 효과를 위한 장식적인 서까래를 걸치는 방식이 고안되었다. 그에 따라 처마 부분에 보이는 서까래는 실제 힘을 많이 받기 때문에 가늘어지게 되었으며, 따라서 서까래는 가늘면서 각 부재가 서로 일정한 치수로 질서정연하게 배열될 수 있게 되었다. 서까래가 가늘어지고 정연한 배열을 한 것과 동시에 나머지 공포 부분을 비롯한 다른 부재들 역시 서로 정연한 치수관계를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섬세하고도 치밀한 외관을 갖추게 되었다. 물론 여기에는 이러한 부재 가공을 가능하게 한 양질의 목재를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자연조건도 작용했다. 3가지 건축형식 가운데 다이부쓰요는 재래식 구조에 익숙해 있던 기술자들의 호응이 낮아 오래 지속되지 못했으며 중세의 일본건축은 주로 와요와 젠슈요, 그리고 각 형식이 서로 절충된 절충형식이 주류를 이루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나라 도다이 사의 남대문과 효고 현의 조도 사[淨土寺] 정토당이 다이부쓰요의 대표적 예이며 가나가와 현의 엔카쿠 사[圓覺寺] 사리전은 젠슈요의 전형적인 예로 손꼽힌다.

근세

근세는 전국이 각 지역 영주인 다이묘[大名]간의 세력다툼으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린 시기를 시작으로 하여 전국이 통일되고 이후 약 250년간 도쿠가와[德川] 집안이 봉건적인 통치권을 행사한 시기를 지칭한다. 근세 초기에는 전국에 수많은 성곽이 건립되었고 통일 후에는 각 지방도시에 인구가 늘고 상업이 번성하면서 도시 생활과 관련한 건축물들이 크게 늘어났으며 특히 주택건축이 세련된 조형미를 갖추면서 전개되었다. 성곽은 중세에는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 따라 산에 지어졌으나 전국이 통일되는 단계로 접어들면서 인구가 밀집한 교통의 요지에 자리잡았고 주변에 여러 겹의 호를 둘러싸고 굴곡이 많은 통행로와 다양한 형태의 높은 성벽을 겹겹이 쌓았으며 가장 중심부에는 천수(天守)라고 부르는 높은 누각을 세워 위용을 자랑하는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즈치[安土] 성의 천수는 화려한 7층의 것이었다고 전하며 현존하는 성곽으로는 효고 현의 히메지[姬路] 성이 유명한데 크고 작은 지붕들이 서로 겹겹이 중첩되면서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외관을 잘 남기고 있다. 이들 성곽 입구에는 상인들이나 일반 주민들이 밀집하여 거주하는 조카마치[城下町]라는 거리가 형성되었다. 여기에는 상업시설들을 비롯하여 연극을 공연하는 극장이나 숙박시설 등 활기 넘치는 도시시설들이 즐비하게 이어져 독특한 도시 경관을 형성했다.

근세의 상류계층 주택은 쇼인즈쿠리[書院造]라고 부르는 독특한 형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들 상류계층 주택에서는 외래 손님을 접대하는 기능이 특별히 강조되었으며 안쪽 깊숙이 가족들의 생활공간이 있고 그 중간에 심부름하는 사람들의 방들이 마련되었다. 접객 장소인 쇼인은 그림이나 꽃을 장식한 선반이 따로 장식되고 정원을 즐길 수 있도록 꾸몄으며, 전체적으로 비대칭적인 공간구성을 갖추었다. 이 시기에 상류층 주택이? ? 불교사원에는 차를 마시기 위한 별도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널리 유행했다. 이 다실(茶室)은 최소한도의 크기만을 유지하고 거의 장식을 가미하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양식이었으며, 쇼인즈쿠리의 접객 공간이 절충되면서 자연경관과 조화된 뛰어난 주택건축이 지어졌는데, 교토부[京都府]의 가쓰라이 궁[桂離宮]이 가장 대표적인 예로 손꼽힌다. 이 건물은 흑색과 백색의 대비, 장식의 철저한 배제, 자연과의 조화가 하나의 건축물 속에서 완벽하게 실현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근대

19세기 중반 이후 서양문물과의 본격적인 접촉이 시작되면서 일본건축은 근대기로 접어들었다. 처음에는 외국인 건축가나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했으나, 곧 대학 교육과정에 건축학을 도입하여 일본인 건축가들을 양성하는 한편, 건설 산업 자체를 서구식으로 개편하여 서양의 건축기술을 적극 수용하게 되었다.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가타야마 도쿠마[片山東熊]는 대표적인 초기 건축가들이다. 이들은 주로 당시 서양에서 유행하던 설계 수법을 습득하여 그것을 일본의 기술 수준 속에서 모방하면서 서구식 건축물들을 곳곳에 세워나갔다. 이후 1920년 대에 관동대지진을 거치면서 구조적인 보강에 힘을 기울이게 됨에 따라 서구식 건축술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와 함께 일본 주택에서도 서양식이 가미되어 응접실이 새로 나타나고 종래의 좌식 생활과 함께 의자식 생활이 도입되었으며, 가족 공동의 공간보다 점차 개인의 공간을 확보하려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후의 혼란이 극복되면서 서양의 새로운 건축사조를 수용한 합리적인 건축이 점차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러한 움직임의 견인차 역할을 한 건축가로 마에카와 구니오[前川國男], 단게 겐조[丹下健三]를 들 수 있다. 특히 단게는 1964년의 도쿄 올림픽 경기장의 여러 시설을 설계하면서 새로운 구조기술을 바탕으로 한 일본 고유의 형태미를 살려냄으로써 일본건축을 국제적인 수준에 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밖에도 1960년대 이후에 무라노 도고[村野藤吾], 시라이 세이이치[白井晟一] 등 장식성이 풍부하고 섬세한 감각과 토착적인 조형성을 살린 건축가들의 활동을 통해 일본건축은 질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출처 : 다음백과사전 (http://enc.daum.net/)

 


 
일본 건축의 발달

역사적으로 일본의 건축은 중국건축의 영향을 받았으나 양자의 건축적 차이는 현저하다. 중국의 건축물에는 나무가 그려진 반면에 일본의 건축물에는 전통적으로 그러한 그림이 없다.
또한 중국의 건물은 의자를 사용하는 생활방식을 반영하였으나 일본인들은 바닥에 앉는 것이 관습이다.(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년]에 이러한 관습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건축은 기후의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일본의 여름은 대부분 길고, 매우 후덥지근한데 이러한 기후적 특성은 건축양식에 반영되었다.
전통적인 가옥은 통풍이 잘 되도록 다소 높게 지어졌다. 건축물 재료로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며, 지진이 일어날 경우를 대비하여 유연성이 있는 목재가 주종을 이루었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593∼710년)에는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전래되어 대륙양식의 불교사찰이 건축되었는데 이후로 불교건축은 일본의 건축양식과 혼합되어 영향을 미쳤다.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94년)에는 ‘헤이조쿄’(平城京)라고 불리던 수도의 거리가 중국과 비슷하게 바둑판형식으로 정리되었다. 607년에 불교의 영향아래 건축된 호류지사(法隆寺)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이 건물은 1993년에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년)에는 귀족의 저택이 ‘신덴즈쿠리’(寢殿造) 형식으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중심에 있는 본 건물과 숙소가 주변의 건물과 복도로 연결된 형식이다. ‘토산조’궁(宮)(1043)이 이 형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1333∼1568년)에 다도의식이 인기를 모으면서 건축된 다정(茶停)은 섬세한 감각의 나무자재, 간결한 장식이 특징인 ‘스키야즈쿠리’(數寄屋造)양식으로 제작되었다. 교토의 ‘카츠라 리큐’는 이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정자와 정원의 완벽한 조화를 좋아한다.
16세기에 봉건군주가 일본사회를 지배하게 되자 많은 성이 건축되었다. 이들은 군사적인 방어를 목적으로 세워졌으나 군주의 저택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성들 중에 몇몇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데 그곳의 ‘텐슈카쿠’(天守閣-성의 중심부에 가장 높게 만든 망루)가 특히 유명하다. 성안의 응접실은 매우 호화롭게 장식되어있으며 독서실과 대기실은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으로 발달되었다. 일본의 국보로 교토의 ‘니시-혼겐지’에 있는 ‘시로쇼인’은 이러한 형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메이지 유신이후 서구의 건축이 일본에 소개되어 돌과 벽돌이 건축에 쓰이기 시작 하였다. 최근에는 현대적기술과 새로운 자재를 사용하여 일본의 전통적 건축요소를 혼합한 건축이 유행 하고있다.

 

불교 건축

불교가 16 세기에 전래되자 불교사원이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그 건축 형태는 중국과 한국에서 기원된 것이었다. 각 사원의 택지에는 그곳에 기거하는 승려와 비구니들을 위해 여러 건물이 세워졌고 신도들이 모일 수 있는 시설들이 만들어졌다.
18세기에 이러한 불교사원들은 7개의 기본구조-탑, 본당, 강당, 종탑, 경전을 보관하는 창고, 기숙사, 식당-으로 구성된다. 양옆에 문이 달린 흙으로 만든 담이 사원을 둘러싸고 있는데 문은 일반적으로 2층짜리 건물이다.
본당은 경배를 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곳이다. 초기의 불교사원에서는 그 규모가 가장 컸었던 강당은 승려들이 공부하거나 강의 또는 설법을 하는 곳이다.
두 종류의 탑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하나는 종이 달린것으로써 매일의 종교의식시간을 알려주는 기능을 하였으며 또다른 하나는 불교 경전을 보관하는 기능을 하였다. 기숙사와 식당은 주로 절내부의 뒷편이나 가장자리에 있다. 불교가 전래된 초기에 불탑은 주로 사원의 중심에 서있었는데 이는 불탑이 주로 경배의 대상이 된 성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신도(神道) 건축

신도인들은 화산과 아름다운 산, 나무, 바위, 폭포 등의 모든 자연물과 현상에 ‘카미’(神)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신도의 신사(神社)들은 이러한 카미가 번성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경배할 수 있는 장소에 세워졌다.
신사건물들은 일정한 건축질서에 따르기 보다 주위의 환경에 따라 배치되었다. 신사에는 독특한 모양의 ‘토리’문에서 부터 본 건물에 이르는 길에 석등(石燈)이 이어져있으며 신사내의 신성함을 유지하기 위해 신도들의 입과 손을 씻을 수 있는 물이 담긴 동이도 있다.
그리고 신사를 수호하는 두 개의 사자모양 조각상인 ‘코마이누’(こま犬)가 본당의 문 앞에 있다. '카미'를 위한 임시본당이 특별한 때에 건축되는데 이러한 임시건물은 그 역사가 기원전300년까지 거슬러올라간다. 오사카에 있는 ‘스미요시 신사’의 주 건물은 이 임시건물 형태를 닮았는데 고대 종교건물의 외관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본당의 또다른 형태적 특징은 선사 시대의 곡물이나 보물창고와 같은 단순한 모양에 있다. 이러한 형태의 대표적인 예로는 ‘미에’현의 ‘이세신사’(伊勢神社)가 있는데 이 신사의 내부는 태양의 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를 위해 바쳐진 것이며, 그 외부는 곡물의 신 ‘토요우케 노 오미카미’를 위한 것이다. 시마네 현에 있는 ‘이즈모 신사’에서는 주택건축의 요소가 발견되는데 땅에서 곧바로 세워진 기둥과 높은 바닥이 그 예이다.
불교가 전래됨에 따라 신도숭배의 성향은 변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사의 건축 양식도 불교적인 요소를 빌려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많은 신사가 중국식으로 기둥을 빨갛게, 벽을 흰색으로 칠하였다.
건물이 있는 장소를 정화시키기 위해 신사건물을 재건하거나 재료를 교체하는 것은 전통적인 관습이었다. 이러한 이유 또는 화재와 천재지변 때문에 가장 오래된 신사건물도 그 역사가 고작 11세기또는 12세기 이상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디자인 컨셉

과거에 일본 가옥의 내부는 개인 공간을 분할하는 칸막이조차 없는 개방적 구조였다. 점차적으로 먹고, 잠자고, 옷을 입는 등 특별한 공간과 그 기능성에 대한 개념이 등장하게되자 ‘뵤부’(屛風)라고 하는 가리개가 사용되었는데, 그후 아직도 전통가옥에서 볼 수 있는 종이로 만들어진 미닫이문(‘쇼지’(障子) 또는 ‘푸스마’( ))이 등장하였다.
이 문은 소리를 차단하지는 못하지만 얼마간의 사적인 공간을 제공해 주었고 더 넓은 공간이 필요할 떈 없앨 수도 있다. ‘쇼지’는 빛도 통과시킨다.
일본가옥의 내외관은 안과 밖을 두 개의 다른 환경으로 생각하지 않고 연결된 부분으로 본 전통적 건축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생각은 안에서 밖으로 가고있는 중간적 공간인 베란다 (엔가와-緣側)에서 나타난다. 집의 가장자리에 붙어있어서 비가 오면 젖는 ‘누레엔’(濡れ緣)은 ‘엔가와’의 한 형태이다. 미적인 관점에서 전통가옥은 좌식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따라서 바깥의 정원을 앉은자리에서 볼 수 있도록 문과 창문, 정자를 배치하였다.
현대화로 인해 가옥의 형태도 많이 변화하였으나 전통 일본형식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서구화된 주택에도 ‘다다미’(일본의 바닥)를 깐 방이 있으며 집안에 들어오기 전에 신발을 벗는 것이 여전히 관습이다.

 

현대 건축

현대 건축기술은 1868년 메이지유신의 시작과 함께 일본에 도입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건축된 최초의 건물에는 일본의 전통적 목조건축양식과 서구의 방식이 혼합되어있다.
나가노 현의 국민학교 건물은 전국에 건축된 많은 학교건물의 표준이 되었다.
1880년대에는 서구화를 반대하는 보수주의 경향이 건축 분야에서도 나타나 아시아풍의 양식이 선호되었다. 1차 세계대전이후에 전통적인 일본건축은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9~1959년)와 독일의 브루노 토트(1880~1938년) 와 같은 건축가들이 일본으로 건너옴에 따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에는 전통건축과 현대기술을 혼합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하며 영향력 있는 건축가인 ‘탄게 겐조’는 일본의 전통건축과 과학적,기술적 요소를 결합시켰다. 1950년대와 60년대에 그는 1964년 동경 올림픽이 개최되었던 요요기 국제경기장을 포함하여 여러 개의 훌륭한 건축물을 디자인하였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일본에서는 지진에 견딜 수 있는 건축기술의 개발이 중요한 과제였다.
일본최초의 고층빌딩은 1968년에 완공된 카스미가제 빌딩으로 여기에는 최첨단의 지진저항 기술이 사용되었는데 그 이후로 동경의 ‘니시신주쿠’(西新宿) 의 마천루와 요코하마(橫浜)의 랜드마크 빌딩(296미터) 등 수많은 고층빌딩들이 만들어졌다.
순수한 상업주의에서 탈피한 건축의 개혁이 ‘탄게’의 젊은 제자였던 ‘이소자키 아라타’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그의 작품과 글은 젊은 세대의 건축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전에는 기술적인 전문성을 강조되었으나 1970년대에 이르자 건축에 대한 예술적인 접근을 시도하는 건축가들이 등장하였다. 일본으로 건너온 유명한 외국 건축가들처럼 국내 건축회사들도 80년대의 고도성장 기간 동안 호황을 누렸는데 90년대초반에 거품경제가 무너지자 건축산업은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많은 일본건축가들이 여전히 일본을 비롯한 여러곳에서 높은지위를 누리고 있으며 수많은 외국 건축가들이 일본의 사업시장을 넘보고 있는데 이러한 추세는 지방에도 확산되었다.
1980년대와 90년대에는 일본의 건축가들이 점차 외국으로 진출하였는데 그들 중에는 로스엔젤레스의 미술박물관을 만든 ‘이소자키’와 파리의 퍼시픽 타워를 만든 ‘쿠로가와 키쇼’, 네델란드 그로닝겐 축제의 임시별관을 만든 ‘마키 후미히코’, 싱가폴의 OUB 센터와 상하이, 광저우, 치바의 도시계획을 한 ‘탄게’, 파리 유네스코 건물의 메디테이션 타워를 만든 ‘안도 타다오’가 있다. ‘안도’는 특히 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1995년에 하이얏트 재단에서 수여하는 프릿츠커 건축상과 1997 년 영국의 왕립건축가협회가 수여하는 건축분야의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출처 : http://www.kr.emb-japan.go.jp/

 

일본정원의 특징

일본 정원에는 교목과 관목뿐 아니라 바위, 모래, 인공 언덕, 연못, 유수 등이 예술적으로 사용된다. 기하학적으로 배치된 서양식의 정원과는 달리 일본정원은 전통적으로 가능한한 인공적인 요소를 배제하여 자연에 가까운 경관을 조성하였다.
경관조성을 위해 정원 조경사들은 3가지의 기본 원칙을 따르는데 그 원칙이란 바로 규모의 축소, 상징화, ‘경치의 차용’ 등이다. 첫번째 원칙은 산과 강의 자연적 경관을 축소하여 만듦으로서 제한된 공간에 모두 재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도시 안에 산간마을의 경관을 창조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상징화’는 예를 들자면 흰모래가 바다를 상징하는데 쓰이는 것과 같은 추상성을 뜻한다. 조경사들은 정원 뒤 또는 주위의 배경경관을 이용하여 그 ‘경치를 차용’ 하는데 이는 경관조성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일본정원의 기본골격은 바위와 그 바위가 모여있는 방식에 따라 출발한다. 고대 일본인들은 바위로 둘러싸인 곳에 신이 살고있다고 믿었으며 이 곳을 ‘아마츠 이와사케’(천국으로가는 관문), 또는 ‘아마츠 이와쿠라’(천국의 자리)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울창한 나무숲은 ‘히모로기’(신의 울타리)라고 불렸는데 신성한 장소를 둘러싸고 있다고 믿어지는 해자(垓字)와 도랑은 ‘미즈가키’(水垣-神社의 울타리)라고 불렸다.
일본의 정원은 일반적으로 2개의 종류로 나뉘는데 언덕과 연못으로 구성된 ‘츠키야마’(언덕 정원)와 언덕과 연못이 없는 ‘히라니와’(평지정원)가 그것이다.저택의 정원에는 언덕형식 정원이 사용되었으며, 제한된 공간에서는 평지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평지정원은 다도의식과 ‘차시츠’(茶室-다도방)가 전래되면서 더욱 인기를 끌게되었다.

 

고대의 정원

최초의 정원은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593∼710)와 나라시대(奈良時代710∼794)로 거슬러 올라간다. 야마토(大和) 지방(현재의 나라(奈良)현) 의 왕족이나 권력층의 조경사들은 섬이 있는 큰 연못을 만들어 바다경치를 묘사하였다. 불교가 한반도를 거쳐 대륙으로부터 전래된 때도 바로 이시기이다. 대륙에서 온 이주자들은 일본 정원에 대륙적 요소를 도입하였는데 중국식의 돌분수와 석교(石橋)가 그 예이다.

 

신덴-즈쿠리 형식의 정원

794년에 일본의 수도가 나라에서 교토로 바뀌면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794∼1185)가 시작되었다. 귀족가문인 ‘후지와라’는 그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전통예술과 문화를 발달시켰다. 이러한 귀족계층들은 ‘신덴-즈쿠리’(寢殿造り) 형식의 사치스런 저택에서 살았는데 이 시대의 정원 또한 매우 호화로웠다.몇 개의 강이 교토에서 합쳐지는데 교토사람들은 도시의 여러곳으로 물이 흐를 수 있도록 수로를 팠다. 교토의 여름은 덥고 습도가 높아서 사람들은 시원함을 느낄 수 있는 폭포와 연못을 좋아하였다. 따라서 ‘야리미즈’(遣り水)라고 불리는 개울이 건물과 저택의 정원사이에 흘렀다. 이러한‘후나 아소비’(船遊び)형식의 정원에는 종종 보트를 탈 수 있을 만큼 큰 타원형의 연못이 있었는데, 물위에 설치된 천막건물이 낚시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저택의 다른 건물들과 통하는 복도도 있었다.
주 건물과 연못사이의 넓은 공간에는 하얀 모래가 깔려 있었는데 이곳은 의식행사를 치르기 좋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또 다른 정원으로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위치에서 다른 경치를 즐기며 산책할수 있는 ‘슈유’(周遊-산책) 형식의 정원이 있다. 이러한 정원에는 종종 헤이안(平安), 가마쿠라(鎌倉), 무로마치(室町) 시대의 사찰이나 큰 저택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승려 ‘무소 소세키’가 만든 교토의 ‘사이호지’(寺)의 정원은 전형적인 ‘산책’ 형식의 정원이다. 이 정원은 배경의 산을 이용하여 연못이 자연적으로 조화되도록 디자인되었다.

 

‘조우도’형식의 정원

10세기에 일본의 귀족계층들은 점차 불교의 관습에 심취하였다. ‘조우도’(淨土)라고 하는 낙원에 대한 믿음이 확산됨에 따라 정원들도 불교의 경전이나 책자에서 묘사된 ‘조우도’의 이미지를 표현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고대 일본정원의 결정체가 되었다. 이러한 형식의 정원은 주로 중앙의 섬과 연결된 아치형의 다리가 있는 연못에 중점을 두었다. 우지(宇治 - 교토 근교)에 있는 절인 뵤도인(平等院)의 정원은 ‘조우도’형식의 대표적 예이다. 이 절은 한때 ‘후지와라 노미치나가’라는 권력자의 시골집이었다. 상류계층이 정원에 흥미를 가진 까닭에 정원들은 수많은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했는데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는 ‘타치바나 노 토시츠나(1028-1094)’가 쓴 ‘사쿠테이키’(정원조경에 대한 논문)가 있다.

 

선종의 정원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 1185∼1333년)에는 중국의 선종의 영향을 받은 무사계급이 성장하였는데 이러한 이유로 주택과 정원의 양식이 변화되었다. 정원에서 화려한 의식을 치르는 것은 무사들의 관습이 아니었다. 대신 그들은 집안에서 정원을 감상하는 것을 더 즐겼는데 그에 따라 정원도 그들의 시각적인 흥미를 끌만한 형식으로 디자인되었다. 바로 이시기에 조경사와 ‘이시타테소’(직역하면 바위를 배치하는 수도사)가 등장하였다. 일본정원의 황금기는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1333∼1568)라고 전해진다. ‘센즈이 카와라모노’(산, 도랑, 강바닥을 만드는 사람들)라고 불리던 숙련된 장인집단들은 ‘카레산스이’(枯山水-돌과 모래로만 산수를 표현한 정원)라고 하는 새로운 양식의 정원을 만들었다. 선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러한 정원들은 매우 추상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는데 바위들은 산과 폭포를, 흰모래는 유수를 표현하는데 쓰였다.
다른 곳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이러한 형식의 정원은 민둥산 과 건조한 강바닥을 그린 중국 수묵풍경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 예로는 교토에 있는 ‘료안지’(龍安寺) 와 ‘다이토쿠지’(大德寺)의 바위 정원이 있다. 15개의 바위와 평지의 흰모래로 꾸며진 료안지의 정원은 평지정원의 전형적인 예로 바다, 호수 연못 등이 주제이며 돌, 나무, 석등, 물동이, 우물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덧붙여 이 시기의 정원들에는 ‘쇼인 즈쿠리’(書院造り)라는 건축양식의 영향을 받은 ‘도코노마’(床の間 - 베란다), ‘치가이다나’(違棚 - 흔들이는 선반), ‘후스마’( -종이 미닫이문) 등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정원은 오늘날 일본 가옥의 원형이 되었다. 이러한 ‘칸쇼’(感想) 또는 ‘자칸(관조)’라고 불리는 형식의 정원은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운 ‘쇼인 즈쿠리’ 형식의 건물에 있는 방인 ‘쇼인’(書院 )에서 감상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다도 정원

고요한 정신세계가 깃들어 있는 다도 정원은 ‘센 노 리큐’(1522∼1591)가 가르친 다도의식과 함께 발달하였다.
인공적인 요소를 피하고 자연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었던 다도정원은 다도방과 이어져있다. 오늘날의 일본 정원은 돌길, 석등, 나무 등과 같은 다도 정원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장소인 단순한 모양의 전망대도 이 다도정원에서 유래되었다.

 

‘카이유’형식의 정원

수세기에 걸쳐 생겨난 다양한 정원형태는 에도 시대(江戶時代 1600∼1868년)에 이르러 ‘카이유(回遊) 형식’으로 종합되었는데 이 형식의 정원은 봉건영주를 위한 것이었다. 거대한 바위와 나무가 명승지의 경관을 재현하는데 쓰였는데, 사람들은 작은 정원을 걸어다니며 중앙의 연못을 감상하였다. 초기 에도 시대에 축조된 교토의 ‘가쓰라’(柱) 별궁의 정원은 전형적인 ‘카이유’ 형식으로, 중앙에는 연못이 있으며 그 주위에 다도정자가 있다. 이 정원은 독일인 건축가 ‘브루노 토트’의 글을 통해 독자들의 관심을 끌게되었다. 교토에 있는 또 다른 유명한 정원은 교토 천황궁의 정원이다. 17세기에 만들어진 이 정원은 연못 정원이라는 뜻으로 ‘오이케 니와’라고 불린다. 이곳에는 몇 개의 작은 소나무 섬이 있는 큰 연못들이 정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926년에 만들어진 동경의 ‘고라쿠엔’(甲子園) 정원도 ‘카이유’ 형식의 정원중 하나다. 이 정원의 호수에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7신 중 하나로 알려진 인도의 신 ‘벤자이텐’ 을 위한 작은 사찰이 있는 섬이 있다. 이 섬으로 통하는 석교(石橋)는 반원형의 모양 때문에 ‘보름달’ 다리라고 불린다. 물에 비친 이 다리의 모양은 완전한 원형이다. 에도 시대에 건축된 ‘하마’(浜)별궁의 정원에는 3개의 다리가 놓여진 예쁜 호수가 있다. 각 다리들은 등나무 덩굴로 덮여있으며 섬으로 통한다. 연못, 잔디밭, 승마장의 배치는 에도 시대 봉건영주들의 별장의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일본의 3대 정원으로는 이바라키(茨城)현의 미토(水戶)에 있는 ‘가이라쿠엔’, 이시카와(石川)현의 가나자와(金澤)에 있는 ‘겐로쿠엔’(兼六園), 오카야마(岡山)현의 오카야마에 있는 ‘코라쿠엔’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카이유’형식의 정원들이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912)초기에는 서양의 정원양식이 전통 일본 정원에도 영향을 미쳐 잔디밭의 규모가 더욱 커졌다. 동경 신주쿠에 있는‘교엔’ (御苑)국립공원이 그 좋은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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