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닫집

도깨비-1 2005. 10. 18. 22:49

 

 

2000년 편찬부 탐방

 

 

불전속의 불전 닫집
(이미지로딩에 약간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작하는 글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산세는 대체적으로 무난하여 절묘한 절경을 이루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소박하고 무난한 모습들은 어느 깊은 계곡에 들어서도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고 찾는 사람들의 노고를 풀어주고 있다. 이러한 산들처럼 그 안의 사찰의 모습 또한 수수한데, 우리나라의 사찰은 그 도량을 산 전체로 하고 있기 때문에 불전을 제외한 다른 건축물들을 필요이상으로 크게 짓는다거나 주위 환경에 거슬릴 정도로 화려하게 지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불전을 둘러싼 건축물들의 단순함과 수수함은 주위의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며 그 안에서 우아한 멋을 잃지 않고 이 단아함과 소박함은 불전의 장식이라든가 단청등의 화려함을 한층 더 부각시키고 있다. 화려함만으로 장식된 장소에 들어섰을 때 경외감과 동시에 어느 정도의 거부감을 일으키는데 우리나라의 사찰의 경우 그러한 거부감이 없는 이유는 조화로움 속에서 아름다움을 이끌어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푸르름이 한창인 날에 푸른 하늘과 나무들을 배경으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단색들의 집합인 단청을 바라보면 시간과 공간을 잊을 정도의 신비로움에 저절로 탄성이 나올 때가 있다. 가람의 배치나 거기에 장식된 문양들의 상징성들은 불경에서 찾을 수 있는데 말로서는 표현할 수 없는 진리의 가르침들을 우리의 하늘과 산과 사찰이 조화를 이룸으로서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그 진리의 향기를 맛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사찰에 깃든 아름다움은 무엇보다도 그 안에 진리의 가르침을 담고 있기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소중하다고 생각하여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의 자연과 그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사찰에 담긴 진리의 가르침을 찾고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석림지는 이번 34집의 닫집 탐방을 시작으로 여러 해에 걸쳐 사찰 전반에 걸친 상징성의 의미를 찾고자 한다.

 

                      닫집의 의미를 찾기 위한 여행

 닫집 탐방에 앞서 가진 세미나에서는 편집부원 스님들의 각자의 소임을 정하고 그동안 준비해온 자료를 정리하고 탐방을 떠날 장소와 시간등을 계획하였다. 우선 닫집의 형식과 설치된 사찰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닫집 시설이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사찰은 닫집을 설치하고 있는데 그 유형은 운궁형(雲宮形), 보궁형(寶宮形), 보개형(寶蓋形)의 세가지형태로 나누어진다. 보개형(寶蓋形)닫집은 고려말 조선초의 불전에서 주로 볼 수 있는 것으로 봉정사 대웅전(15세기), 무위사 극락전(1430), 장곡사 상대웅전등이 있다. 보개형은 지붕을 천장 속으로 밀어넣은 형태인데, 천장을 파고 들어간 공간의 사면에 목조 건축에서 중요한 장식 요소인 포작(包作)이 섬세하게 결구 되어 있다.
 운궁형의 닫집은 간단한 판재(板材)로만 구성된 것과 허주까지 내려 보궁형 닫집의 모습을 약식화한 것과 같은 유형으로 비교적 간결한 구조이지만 불상 위에 천장에 구름무늬와 용, 봉황 등의 상징물들로 화려한 장식을 이루고 있다. 보궁입식판(寶宮立飾板)으로 구성된 것으로는 쌍계사(雙磎寺) 대웅전(大雄殿), 법주사(法住寺) 대웅보전(大雄寶殿), 개심사(開心寺) 대웅전(大雄殿), 선암사(仙岩寺) 대웅전(大雄殿), 완주 송광사(松廣寺)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운궁형(雲宮形)으로는 개목사(開目寺) 원통전(圓通殿), 송광사(松廣寺) 국사전(國師殿), 천은사(泉隱寺) 극락보전(極樂寶殿), 금탑사(金塔寺) 극락전(極樂殿), 은해사(銀海寺) 백흥암(百興庵) 극락전(極樂殿), 대흥사(大興寺) 대웅보전(大雄寶殿)등이 있다.
 보궁형은 운궁형과는 달리 독립된 집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닫집의 물림부분에 따라 일자형(一字形), 정자형(丁字形), 아자형(亞字形), 중아자형(重亞字形)의 형식이 있다. 일자형의 닫집이 설치되어있는 불전으로는 봉정사 극락전(1210), 위봉사  보광명전 협간(1673)등이 있고, 정자형의 닫집이 설치되어 있는 불전으로는 정수사 법당(1423초창 1689 6중창), 전등사 대웅전(1621), 개암사 대웅전(1636초창 1749중창), 하동 쌍계사 대웅전 어간(1641), 안심사 대웅전(1672), 위봉사 보광명전 어간(1673), 율곡사 대웅전(1679), 흥국사 대웅전(1690), 미황사 대웅전(1754)등이 있다. 아자형의 닫집은 조선중기 이후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태이며, 중층의 경우도 있어 하중 때문에 천정에 매달수 없어 불단과의 지지주가 필수적인 것이 특징이다. 아자형 닫집이 설치되어 있는 불전으로는 부석사 무량수전(13세기), 고산사 대웅전(16세기), 화암사 극락전(1605), 숭림사 보광전(1682중수), 범어사 대웅전(1658), 불갑사 대웅전(1680초창 1870중창), 금산사 대적광전(1686), 논산 쌍계사 대웅전(1739), 청룡사 대웅전(1771), 마곡사 대광보전(1785중건)등이 있다.
 편집부스님들 모두의 마음 같아서는 조사한 사찰의 모두를 둘러보고 싶지만 종강을 하더라도 각자의 해야할 일들이 있음으로 탐방이 기간을 오래 잡을 수 없어 홍천 수타사, 논산 쌍계사, 완주 화암사, 부안 개암사, 영광 불갑사의 역사적 의미와 장식성이 뛰어난 보궁형의 닫집을 둘러보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이번 탐방의 목적은 대부분의 사찰에 설치되어진 닫집의 의미와 상징성, 그리고 그 아름다움의 근원을 찾는 것에 목적을 두었다.

    

 

 

 

 

 

 

 

 

 

 

 

 

 

 

 

 

 

 

 

 

 

 

 

 

 

 

 

 

 


 처음의 목적지인 수타사(壽陀寺)는 세조(世祖) 2년(1457)에 지금의 위치로 이건(移建)되면서 수타사(水陀寺)라 했는데, 임진왜란때 화마(火魔)로 인조(仁祖) 14년(1636) 공잠(工岑)이 재건하고 뒤이어 동왕 22년 학준대사(學俊大師)가 당우(堂宇)를 확장하고 그 뒤를 이어 꾸준한 불사로 숙종(肅宗) 9년(1683)까지 범종의 주성, 사천왕사의 등 옛모습을 재현했다. 이 절이 현재와 같이 개액(改額)된 것은 순조(純祖) 11년(1811)이다.
 석림회의 소쩍새 마을 봉사활동과 수련회를 마치고 영월에서 3∼4시간 걸려 저녁 무렵에서야 수타사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수타사의 계곡이 그 비경(秘經)을 드러냄으로서 바쁜 일정 속에서 지치고 긴장되었던 편집부스님들의 몸과 마음을 풀어주는 듯 했다. 마침 일행이 도착한 시간이 저녁 기도시간이라서 그곳에 상주하고 계신 스님의 상세한 자문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대적광전에 봉안된 비로자나 부처님의 머리위로 화려하고 정교하게 설치된 닫집을 보는 것만으로도 힘든 몸을 이끌고 찾아온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포(包)로 보궁형(寶宮形)의 닫집을 만들었는데, 기둥의 끝에서 다른 닫집에서는 보기 어려운 아주 화려하게 만개한 연꽃을 장식함으로 이 연꽃이 포(包)와 균형을 이루어 이 화려하고 장엄한 궁전이 전혀 무개감없이 하늘에 떠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닫집의 중앙에는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약간은 익살스러운 표정의 황룡 한 마리가 누가 왔는지 보려는 듯 아래로 머리를 내리고 있고, 닫집의 좌우에는 극락조와 어울려 악기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옷깃을 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 이러한 신비로운 모습은 서까래 밑의 '적멸궁(寂滅宮)'이라는 편액이 뜻하는 바처럼 저곳이 바로 불국정토의 영원하고 번뇌가 사라진 적멸의 세계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이 닫집 옆의 대들보에는 두 마리의 용(龍) 밑으로 여섯 개의 종이 달려있는 악기가 장치되어있는데, 이는 큰 불공이 있을 때 실제로 사용했던 악기로, 지금도 법당의 뒤쪽으로 이 악기를 울리게 하는 줄이 연결되어있다. 또 닫집의 양식은 아자형(亞字形)으로 조선중기 이후에 가장 많이 나타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 형태의 닫집은 장식성이 강하고 복잡하며 그 무게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불단과의 지지대인 당주가 필수적으로 있기 마련인데 수타사 대적광전의 닫집은 이 당주가 없는 것이 특색 있게 보였다.
 수타사를 거쳐 숙소로 돌아 갈때는 공작산(孔雀山)의 산(山)맛 이나 고요하고 너무나 편안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계곡에 잠시동안 이라도 앉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숙소에서 여정을 푼 답사단은 강원도에서 다음목적지인 논산 쌍계사와 완주 화암사를 탐방하고 숙소인 내장사에 저녁 공양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위해서 더군다나 토요일이었기 때문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길을 떠날 준비를 해야했다.


 첫날 지도를 잘 봤다는 이유로 스님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어 계속해서 내가 지도를 보게 되었는데, 이날 나의 작은 실수하나가 그동안 쌓았던 신임을 땅바닥으로 떨어지게 했다. 하남을 지날 무렵 논산까지 가장 빠른 경로인 경부고속도를 타자는 여러 스님들의 의견에 이왕이면 조금 더 가서 경치 좋은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나의 의견이 전날의 신임에 힘입어 채택되었고 이것이 뜻하지 않게 하루의 절반을 길에서 보내게되는 결과를 초래하게되었다. 결과적으로는 큰 문제가 아니었지만 당시의 촉박한 일정 속에서는 단 몇 분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스님들의 따가운 시선 속에 마음을 졸일 수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옳게 가던 길도 되돌아가 마을사람들에게 길을 물어 가는 수모도 겪어야 했다. 오후 2시가 넘어서야 비로소 쌍계사(雙溪寺)가 자리한 충청남도 논산의 작봉산(鵲峰山)에 이를 수 있었다.
 쌍계사의 창건연대나 창건자는 알려지지 않고 고려 초기에 창건 되었다고만 전해진다.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여진 쌍계사는 매우 한적해 보였다. 이 절을 대표할만한 것은 역시 보물 제408호인 대웅전이라 할 수 있는데, 대웅전의 문살, 닫집, 봉설(鳳舌), 용두(龍頭), 천장장식 등은 그 어느 사찰의 장식보다도 세련되었다. 정면의 꽃 문살은 연꽃, 무궁화, 국화, 난초, 작약, 목단의 6가지 종류의 꽃을 정교한 조각과 채색으로 변화와 통일을 주어 한참을 바라보고 있으면 때때로 원모양과 육각형, 마름모의 모양으로 변화하여 살아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예술에 문외한인 누가 보더라도 훌륭한 예술품인걸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쌍계사의 문은 걸작이라 할 수 있다. 오른쪽의 세 번째 기둥은 굵은 칡덩쿨로 만들어져 있는데 노인들이 이 기둥을 안고 기도하면 죽을 때 고통을 면하게 된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대웅전의 안쪽에 들어서면, 화려한 천장장식이 일품이다. 비록 단청의 빛이 바래긴 하였지만 옛 시절의 화려한 품격은 잃지 않고 있다.
 쌍계사 대웅전의 닫집은 석가모니 부처님과 아미타부처님, 약사여래의 위로 보궁형(寶宮形)의 아자형(亞字形)닫집으로 각각 적멸궁(寂滅宮), 칠보궁(七寶宮), 만월궁(萬月宮)의 편액이 걸린 닫집이 설치되어있다. 이는 각각의 부처님들이 계신 불국정토의 궁전을 상징하는 것으로 적멸궁(寂滅宮)은 적멸위락(寂滅爲樂)의 열반에 드신 석가모니부처님이 칠보궁(七寶宮)은 칠보(七寶)등으로 장식된 서방정토의 극락세계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미타부처님이, 만월궁(萬月宮)은 동방정유리국의 궁전으로 약사여래부처님이 상주하는 곳임을 상징하고 있다. 중층으로 만들어진 닫집을 지탱하기 위해 당주를 수미단까지 늘어 뜰였는데, 시각적으로 닫집과 부처님이 계신 공간을 법당에서 다른 공간으로 분리되어 그곳에 어떤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는 듯하다. 또 닫집의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과 색조등은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밖에 어떤 말로 표현하기가 힘들다. 균형이 잘 잡힌 이 세련되고 우아한 자태의 닫집을 만든 사람은 장인이 아닌 천재적인 예술가의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라북도 완주의 화암사(花巖寺)에 가면서도 하나의 훌륭한 예술품을 본 듯한 기분에 젖어 쌍계사 닫집의 모습이 머리 속에서 좀처럼 떠나지 않았다.


 화암사(花巖寺)를 지도상에서 보았을 때는 대둔산의 밑자락에 사찰표시가 되어있어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있구나했는데, 막상 국도에서 조그맣게 난 신작로를 따라 화암사 주차장까지 가는 길은 만만치 않은 길이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에 이 길을 걸어 저 숲속의 수행처를 찾아가는 구도자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옛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마저 일었다.
 탐방을 떠날 때부터 장마전선이 북상하고 있어서인지 항상 흐리고 가끔씩 비가 오곤 했는데, 화암사에 도착했을 때엔 잠시 햇빛이 숲 속에 쏟아지고 있었다. 비가 내린 뒤의 맑은 시야 속에서 화암사 계곡의 모습은 잘 조작된 카메라가 보여주는 영상처럼 아름다울 뿐이다. 그림 같은 그 속을 걸어 폭포위로 놓여진 계단을 타고 화암사에 도착하였다. 처음 일행을 맞이하는 것은 기둥도 주춧돌도 밑에 깔린 흙도 모두 황토색인 불명산(佛明山) 화암사(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린 누각이었다. 이 누각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색이 다 바래 단청의 흔적만 남은 극락전이 힘들게 올라온 손님들을 반갑게 맞이하듯 깨끗이 씻은 듯한 얼굴로 단정히 앉아 있는 듯 하다. 이 극락전은 보물 제 663호로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생존하였던 무과 출신의 성달생(成達生)이라는 사람이 이 사찰을 중창하여 1429년에 마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 극락전이 특이할 만한 점은 안에 봉안된 불상이 아미타부처님이 아니고 관세음 보살상이 봉안되어있으며, 그 위에 닫집이 설치된 것인데, 이 극락전이 아미타불이 계신 극락세계로 향하는, 관세음 보살이 인도하는 반야용선임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도 극락전 지붕의 장식에 있어 정면에는 다른 장식을 거의 배제하고 용두(龍頭)만을 한 줄로 나열하였으며, 극락전의 뒤쪽에는 용미(龍尾)를 장식한 것에서 보이듯(용은 반야용선을 이끄는 선수로 표현되고 있다.) 그 뜻하는 바가 확실하다고 하겠다.
 화암사 극락전의 닫집은 전형적인 아자형(亞字形)의 보궁형(寶宮形)닫집으로 시기적으로 최초의 아자형(亞字形)닫집으로 알려져 있다. 단아한 모습의 극락전과는 달리 내부의 닫집은 화려한 장식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 세 겹으로 된 지붕의 서까래와 공포가 치밀하게 짜여져 있고, 그 안에 섬세하게 조각하여 현실감을 주는 용과 비천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 닫집안에 있는 용의 발가락이 네 개뿐인 것이 유난히 눈에 띄었는데 이는 중국 황제의 소유물이나 유적 외에는 용의 발가락을 다섯으로 표현하지 못하게 했던 우리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한다. 기둥의 밑에 달린 연꽃은 처음 들렀던 홍천 수타사(壽陀寺)의 만개한 연꽃과는 대조적으로 봉우리들과 이제 조금 피기 시작하려는 연꽃들뿐인데,  바라보면서 아마도 연화화생(蓮華化生)으로 저 불국토에 탄생할 연꽃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았나 보구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관세음 보살님이 이끄시는 이 반야용선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 저 연꽃의 주인의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세음 보살님께 삼배를 올리고 화암사를 내려왔다.
 오전에 길에서 많은 시간을 낭비했음에도 다행히 계획된 일정을 마치고, 때때로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무사히 탐방의 절반을 마쳤다는 안도감과 함께 숙소인 내장사에 도착하였다. 각자 맡은 소임의 중간점검을 마치고 편집부스님들의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새로  편찬부에 들어오신 스님들이 많은 관계로 이번 탐방을 경험 삼아 앞으로 어떠한 주제로 어떤식의 탐방이 이루어져야 하겠다는 안건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석림회 수련회와 탐방 내내 운전소임을 맡아 피로가 많이 쌓였음에도 편집부에 이렇게라도 도움을 줄 수 있어 기쁘다는 각경스님과 함께 다음날 가야할 도로를 체크하고, 오랜만인 것 같은 정말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는데, 이는 모두 내장사 주지스님과 여러 스님들의 따뜻한 배려덕분이었다.
 탐방의 마지막날, 앞으로 두 곳을 남겨두고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몇 군데를 더 둘러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앞섰지만 스님들 모두 시간에 쫓겨 사는 상황이어서 이런 나의 생각은 생각으로 그쳐야만했다.


 전라북도 부안군에 위치한 개암사(開巖寺)는 634년에 묘련이 창건한 백제의 고찰로 개암(開巖)이라는 이름은 기원전 282년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여 이곳에 도성을 쌓을 때 우(禹)와 진(陳)의 두 장군으로 하여금 좌우계곡에 왕궁전각을 짓게 하였는데, 동쪽을 묘암(妙巖), 서쪽을 개암(開巖)이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개암사의 도량에 들어서면 멀리 울금 바위라 불리 우는 바위가 보이는 데, 바위에는 세 개의 동굴이 있어서, 그 가운데 방이 원효방이라 불리는 굴로 그곳에 조그만 웅덩이가 있어 물이 괴는데 원효 스님이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면서부터 샘이 솟았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개암사(開巖寺)의 대웅전은 보물 제292호이고, 대웅전의 양측 귀공포와 측며공포의 소첨자, 대첨자들이 모두 교두형(翹頭形)으로 되어있으나 어간과 변간(邊間)의 공포첨자들은 모두 밑면을 'W'형태로 조각하여 정면의 위계성을 나타낸 것이 특색 있어 보였다. 대웅전 안의 용들은 모두 부처님을 호위하듯 머리를 모두 불단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용들의 몸통을 굴곡이 심한 자연목을 그대로 살려 만들어서 마치 살아서 꿈틀대는 듯한 느낌을 준다. 개암사의 닫집은 정자형(丁字形)의 구조로 중우한 느낌은 준다. 닫집의 내부에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세 마리의 용과 안쪽 기둥의 끝에 용두(龍頭)를 만들어 모두 다섯 마리의 용이 있다. 불전의 다섯 마리의 용과 함께 불법(佛法)과 부처님을 완벽하게 수호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듯하다. 불전의 오랜 역사처럼 단청도 그 색이 바래 천장의 장식이나 대들보와 기둥의 문양들을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예전에는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오랜 세월의 흔적에서 오는 아쉬운 감정 때문에 더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로에서 시야가 끝나는 저 멀리 언덕까지 어떤 차도 달리고 있지 않지만, 시속 40㎞이상으로는 달리지 않는 앞의 차처럼 부안에서 영광으로 향하는 23번 국도의 풍경은 편하고 여유로웠으며 그 풍경처럼 마지막 목적지로 향하는 스님들의 마음도 그저 여유로울 뿐이었다. 탐방을 떠나기 전에는 기본적인 자료들과 어렴풋이 떠오르는 전에 보았던 닫집들을 다시 떠올리며 그 의미라든가 상징성 등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하고 고민이 많이 되었는데,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렇게 탐방을 통한 체험으로 한결 고민이 덜어짐을 느낀 나로서는 누구보다도 더욱 그러했다.
 전라남도 영광군 불갑면 모악리 불갑산 북쪽능선에 자리한 불갑사(佛甲寺)는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지만 일설에 따르면 384년(침류왕 1년)에 마라난타(摩羅難陀)가 백제에 불교를 전래한 뒤세운 최초의 절이라고 한다. 마라난타는 불갑사 부근의 법성포를 통하여 들어왔으므로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보물 제 830호인 대웅전은 불단의 위치와 불상의 위치가 다른 사찰과는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법당에 들어서면 정면이 아닌 서쪽으로 불단이 자리하고 있는데, 1869년(고종 6년)에 지금과 같은 위치에 배치시킴으로서 불단이 남쪽을 향하도록 한 것이다. 닫집은 좌우대칭으로 중앙을 앞뒤로 두 칸, 좌우를 두 칸씩 나누어 모두 여섯 칸으로 되어있고 뒤쪽 칸에 각각 용머리를 하나씩 조각하고 앞쪽 물림부분에 황룡의 몸통을 조각하였으며, 좌우 칸에는 극락조를 한 마리씩 조각되어 달려있다. 고주 사이의 가로 재(材)는 상부고조를 잡아매기 위해 후대에 끼운 것이다. 모두 10개의 허주를 배치하고 그 사이엔 가운데 붉은 연화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낙양각을 장식하였다. 특이한 점은 내부 고주에 기어 내려가는 짐승들을 쫓는 용이 조각된 것인데, -어쩌면 쫓기는 짐승이 아니고 상서로운 짐승인지도 모르겠다,- 절과 관련된 어떤 일화가 있을 텐데 거기에 대한 자문이라든가 자료를 구하지 못한 것이 끝내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러저러한 여러 아쉬움을 남기고 불갑사에서 발길을 돌렸다. 닫집을 주제로 한 탐방이었지만 이번 탐방을 통해 소홀히 지나치기만 했던 사찰 장엄물등이나 문양 등이 모두 소중한 가르침을 담고 있으며, 작은 선에서부터 불전전체가 모두 부처님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닫집만이 아니라 불전에 나타난 모든 것들의 미적 가치라든가 그 의미들을 조금이나마 알고 불전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항상 그 자리에서 말없는 가르침을 설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하였고, 많은 닫집을 볼 수는 없었지만 이번 탐방을 토대로 어느 정도의 개념을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에 보람을 느낀다.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목적지

 법당은 여러 가지 상징성들이 함축되어 구성되어진 건물이다. 법당이 사바세계에서 피안으로 건너갈때타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기 위해 법당 어간의 양쪽에 용두(龍頭)를 장식하여 반야용선(般若龍船)의 선수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법당의 외형은 불, 보살이 이끄는 반야용선임을 상징하고 있으며, 법당의 안에는 항상 삼매에 들어 말없는 가르침을 펼치시고 계신 부처님과 보살님들을 봉안하고 여러 가지 장식을 통하여 반야용선(般若龍船)의 목적지인 불국정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모든 사찰의 법당 천장에는 연꽃을 비롯하여 다채로운 형태의 온갖 꽃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부처님이 삼매에 들때나 정각을 이루었을 때 나타나는 법화육서(法華六瑞)중 우화(雨花)의 상서(祥瑞)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삼매에 들면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기 위해서 하늘이나 천신들이 꽃비를 흩날리는 광경이 여러 경전에 나타난다.―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 제 6권에는 "부처님이 도리천궁에 들어가서 미간의 백호광(白毫光)을 놓으니 그 빛이 의 칠보(七寶)의 대개(大蓋)를 이루어 마야부인의 위를 덮었다.", "동방의 선덕불(善德佛)이 묘보화를 석가모니불과 마야부인의 위에 흩었더니 변화하여 화개를 이루었다."등 여러경전의 기록에서 보이는 상서의 현상들을 화개(花蓋)로서 부처님의 머리위에 장식하게 되었다. 일본이나 중국의 경우 지금도 화개의 형태로 금속과 천으로 만든 파라솔모양의 화개를 설치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경우 꽃들의 흩날리는 모습은 법당의 천장 전체로 그 공간이 확대되고 화개의 모양은 닫집으로 변화하여 부처님의 거주처인 불국정토의 궁전으로 발전된 것으로 보여진다. 우리나라의 불전(佛展)은 부처님의 설법시의 상황을 재현하는데 그치지 않고 반야용선(般若龍船)을 탄 모두가 깨달음을 얻어 도달해야할 피안의 모습까지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닫집의 모양은《아미타경》에서 극락세계의 모습을 설한 부처님의 말씀중에서 "극락세계에는 일곱겹으로된 난간과 일곱겹으로된 나망(羅網)과 일곱겹 가로수가 있는데, 다 금, 은, 청옥, 수정의 네가지 보석으로 눈부시게 장식되어있다. … 하늘에서 음악이 들리고 대지는 아름다운 황금색이며, 주야로 세 번씩 천상의 꽃이 떨어진다. 백조, 앵무, 공작등이 노래를 부르며, 이는 그대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노래로, 이 노래를 듣는 자들은 모두 불(佛), 법(法), 승(僧)의 삼보(三寶)를 생각한다. 이 새들은 모두 아미타불에 의해 화작(化作)된 것이다."에서 보이듯 극락의 여러 모습을 비교적 충실하게 조합하여 묘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기둥의 끝에 달린 연꽃은 아미타경, 무량수경과 함께 정토삼부경으로 이루어진 관무량수경의 상배관중에서 "그 때 수행자가 자신을 돌아보면, 자기는 이미 자마금의 연화대에 앉아 있느니라. 수행자는 합장하여 여러 부처님을 찬탄하고, 한 생각 동안에 바로 처 극락세계의 칠보 연못에 연화대위에 태어나느니라. 이 자마금의 연화대는 큰 보배꽃과 같은데, 하룻밤 사이에 그 보배꽃이 피어나면, 수행자의 몸은 자마금색으로 빛나고 그 발 밑에도 또한 칠보의 연꽃이 있느니라. … 지성으로 그치지 않고 아미타부처님을 열 번만 온전히 부르면 이 사람은 염불하는 동안에 80억 겁 동안 생사에서 헤매는 무거운 죄업을 없애느니라. 그리고 목숨을 마칠때는 마치 태양처럼 찬란한 황금연꽃이 그 사람 앞에 나타나느니라, 그래서 그는 순간에 바로 보배연못의 연꽃 속에서 태어나느니라."에서처럼 상품중생에서부터 하품 하생의 중생들이 정토에 태어날 때의 모습이 설해져 있는데, 이처럼 연꽃은 정토에 들어서는 하나의 관문으로서 닫집에서는 사람의 시선이 가장 먼저 닫는 기둥의 끝에 아직 만개하지 않은 봉우리, 만개한 모습 등으로 장식함으로서 이를 보는 사람모두가 연꽃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어서 불국정토에 이르기를 바라는 것이다.
 연꽃은 정화(淨化)의 상징이다. 진흙 속에서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연꽃이 피어나듯 예토(穢土)인 이 사바세계에서의 모든 번뇌와 업을 소멸하고 청정한 모습으로 정토에 태어남을 연꽃으로 형상화 한 것으로 이 이치를 관하여 깨달은 사람은 연꽃에 몸을 실어 저 정토에서 그 진리의 꽃을 피울 것이다.
 닫집의 내부와 주위에는 용, 비천(飛天), 극락조, 오색구름등을 장식하여 불국토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용은 연꽃만큼이나 사찰에서 많이 쓰이는 장식이다. 인도의 킹코브라의 형상에서 생겨난 용신은 불교의 성립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의 성격으로 수용되어진 것이  중국에 전래되어 정착하는 과정에서 용신은 인도용의 모습을 벗고 중국 전통용의 도상(圖像)을 따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용은 이러한 모습의 그대로 따르고 있지만, 그 성격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불교적 상징성과 함께 우리 사찰의 곳곳에 장식되어 천변만화(千變萬化)의 능력으로 조성된 장소에서 도량을 수호하기도 하며, 중생들을 저 피안의 극락세계로 인도하기도 하고, 부처님과 불법(佛法)을 수호하기도 한다. 닫집안에 장식되어진 용은 다른 장소의 것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만들어져 봉안된 부처님과 닫집의 주변을 더욱 상서로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불국토를 장엄하고 있는 닫집은 사찰의 다른 건축물들의 상징성과 함께 연관하여 살펴보게 되면, 그 의미를 좀 더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구도자에게 있어서 사원은 깨달음이라는 산을 넘기 위한 대기소와 같은 곳이다. 그 산을 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곳을 찾고, 절은 그 방법을 전하기 위하여 곳곳에 그 길과 방법을 새겨놓고 있는 듯하다. 사찰에 단계적으로 서 있는 문들처럼 마음을 한곳으로 모아 귀의하고 진리의 가르침을 통해 금강력사처럼 용맹스러운 지혜로 번뇌를 끊고, 생사(生死)와 열반(涅槃)이 둘이 아니고, 아(我)와 무아(無我)가 둘이 아니고, 밝음과 어둠이 둘이 아닌 것처럼 모든 일체의 현상에 대한 차별견해가 끊어진 경지에 이르러 불이(不二)의 관문(關門)을 넘어서 수미산의 정상쯤에 다다르면 드디어 불(佛), 보살(菩薩)님들을 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불(佛), 보살(菩薩)을 말하는 것이지만, 사찰의 구조 속에서 보면 바로 이곳이 불(佛), 보살(菩薩)님들이 모셔져있는 불전에 해당한다. 그 안에서 부처님과 보살(菩薩)님들의 가르침을 받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菩薩)님들처럼 그와 같은 진리의 실천과 보살행(菩薩行)을 통해 불국토(佛國土)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화려하게 불전(佛展)을 장엄하고 있는 닫집은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의 이상향과 목적지를 함께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탐방을 통해 그동안 등안시 하였던 닫집을 둘러보고 닫집이 상징하는 바라든가 의미를 찾고자 노력하면서 불전과 사찰내의 모든 장엄물들이나 문양, 그림들 그 하나 하나가 뜻하는 바는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게되어 큰 보람이 느껴졌다. 작지만 의미가 큰 것들이 주변에 정말 많이 있다. 그런 부분들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글을 마친다.      

 

 

출처:http://www.sukrim.or.kr

 

'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본건축  (0) 2005.12.12
궁궐의 건물이름  (0) 2005.11.07
크라토파니  (0) 2005.10.30
천장  (0) 2005.10.10
[스크랩] 자연 속으로 마실 나온 우암 송시열  (0) 2005.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