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한국 최고의 산악인들

도깨비-1 2017. 2. 18. 18:18

산악인 김정섭의 3형제

 

슬프고도 안타가운 이야기

산악인 김정섭형제는 1971년 마나슬루봉(8163미터 세계7위봉) 첫 등반에서

동생 김기섭을 돌풍에 잃어버렸다

이듬해 김정섭 호섭 형제는 2년전 동생 기섭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마나슬루에 재도전합니다만 7250미터 지점에서 대형 눈사태가 발생하여

동생 김기섭을 비롯하여 대원 5명과 10 명의 셰르파가 사망하는 대형사고가 납니다.

(히말라야 등반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사고)

두 동생을 히말라야에 묻은 김정섭은 1976년 또다시 세 번째

마나술루에 도전합니다만 또다시 실패합니다.

왜? 그는 두 동생 을 차례로 잃어가면서 집념의 도전을 했을까요?

 

한으로 남은 김정섭의 마나슬루봉 도전은

1980년 동국대 산악부에 의하여 성공을 하게됩니다

 

고상돈

<1948∼1979. 제주도 출생>

 

“여기는 정상!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다 ”

1977년 9월 15일

에베레스트 정상에서 날아온 고상돈의 메시지는 전 국민을 열광하게 하였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의 지붕에 올라선 순간이었다.

1962년 경희대 산악부가 다움라기봉 정찰등반이후

2003년 까지 한국의 원정대는 457개팀 3421명이 히말라야에 도전하여

8000미터급 14좌 완등자 3명(엄홍길 박영석 한완용)

1977년 고상돈의 쾌거에 이어

1987년 허영호가 두 번째로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86명의 산악대원의 시신이 히말라야에 묻혔답니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산악인이다.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전매청 청주 연초제조창에 근무하면서 청주대학교 경영학과 2년을 수료했다.

대학산악연맹에 소속되어 활동하다가 한국일보사와 대한산악연맹이 공동후원한 한국 에베레스트 원정대(대장 김영도, 대원 19명)의 제주대표로 참가,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해발 8,848m) 정복에 성공하였다.

이로써,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여덟번째로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국가가 되었고, 포스트·몬순 기간의 등정으로는 세계 세번째라는 기록을 세웠다.

그후 대한산악연맹 충청북도지부 이사로 있으면서 1979년 북아메리카 최고봉인 알래스카 매킨리(해발 6,191m) 원정대의 대장으로 참가했다. 등정에는 성공했으나 이일교·박훈규와 함께 5월 29일 하산 도중 자일사고로 추락, 사망했다. 제주도의 한라산 해발 1,100m 고지에 묘소가 있으며 고 고상돈대원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매년 추모사업을 벌이고 있다.[Daum백과]

 

산악인 허영호 1954. 4. 16, 충북 제천

 

1987년 한국인으로 두 번째로 허영호가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한다.

그는 등반가라기보다는 탐험가에 가깝다

에베레스트 등정 후에는 남극점 북극점을 차례로 밟았고

91년도에는 7대륙 최고봉과 지구의 3극점을 모두 올라서

세계3번째로 어드벤처 그랜드 슬램의 대기록을 세웠다

3극점과 7대륙의 최고봉을 모두 정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이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8년 한국 산악회 안나푸르나 4봉 훈련대원으로 참여했고, 1982년 세계 제5위 봉인 마칼루 등정, 1983년 마나슬루 무산소 단독 등정, 1985년 투쿠체 등정, 1986년 타우체 등정, 알프스 3대 북벽 등정 등 국내 산악인 중 높이 8,000m 이상의 고봉을 가장 많이 등정한 산악인이 되었다. 1987년 한국인으로서는 2번째, 동계 등정으로는 3번째로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를 등정했다. <BR>1989년 아시아 로체, 1992년 남아메리카 아콩카과, 북아메리카 매킨리,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정상에 올랐다. 1994년 남극점 도보탐험과 1995년 북극대륙 도보횡단에 성공, 1995년 남극대륙의 최고봉인 빈슨매시프 정상에 올랐다. [Daum백과]

 

산악인 엄홍길

(嚴弘吉, 1960년 9월 14일 ~ )

 

한국 산악계의 계보를 따지면

고상돈 허영호에 이어서 엄홍길을 꼽지요

그는 아시아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는 28번 도전 끝에 상공했기에 거의 절반은 실패했다오.

특히 안나푸르나 등정은 다섯 번 도전 끝에 성공했다

(안나푸르나봉 도전 시에 지현옥을 잃었다)

무명 산악인 엄홍길의 이름은 1988년 서울 올림픽과 맞추어 기획한 이벤트중

에베레스트(8848미터)와 로체(8516미터) 동시 등정에 참가하여

엄홍길은 에베레스트를 밟으므로 유명해진다

그전 엄홍길은 85년 에베레스트에 도전했으나 7500미터 지점에서 발길을 돌렸고

또다시 86년 또다시 도전했으나 8600미터 지점에서 좌절하고야 만다

엄홍길은 경남 고성출신으로 나이 겨우 3세 때 의정부 도봉산 자락으로 이사 온 후에

도봉산 자락에서 매점을 하시던 부모님 밑에서 도봉산을 놀이터로 자랍니다.

그는 날다람쥐처럼 도봉산 북한산 수락산등을 누비면서 산악인으로의 길을 갑니다만

산악인 엘리트 코스를 거치지 않은 무명 산악인에 불과했지요.

키는 167센치 체중 66키로 정도의 보통체구이지만 체력은 좋았다

동두천의 양주고를 졸업한 뒤에 해군특수부대 udt를 제대한 후에

그를 유심히 본 산악인 어느 선배가 85년 에베레스트에 한번 가보자고 한 것이

해외 원정 산행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88년도에 에베레스트에 오른 후에도 --

이후 92년도 까지 6번이나 에베레스트의 봉우리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93년도에 2주간 사이에 희말라야의 초오유봉(8021) 사사팡마봉(8021)

연속등정에 성공하였고 이듬해부터 브로드피크(8047) 로체(8516) 다울라기리(8167) 마나슬로(8163)을 차레로 정복하였다

엄홍길을 가장 힘들게 했던 정상은 안나푸르나였다

89년 첫 도전 실패 이후 꼭 10년이 소요되었다

97년 세 번째 도전에서 셰르파가 크레파스에 빠져 사망하는 사고를-

그리고 98년 안나푸르나 네 번째 도전에서 7700미터 지점에서 셰르파가 빙벽으로 추락했다

추락한 셰르파를 구하려던 엄홍길은 로프에 발목이 걸려 180도로 뒤틀리고

2박3일 동안 거의 기다시피 켐프로 기적 같은 상황에서 내려와 헬기에 의하여 구조되었다

재기가 불가능 하다던 엄홍길은 1년 뒤 1999년 안나푸르나에 또다시 도전한다.

10년 동안 다섯 번의 도전 끝에 기어이 성공했으나 동행한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산악인

지현옥을 이곳에서 잃어버린다.

(지현옥의 추모비가 조령산에 있었지요)

그리고 2000년 7/31일 k2(8611미터)에 오르며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세계에서 8번째

14좌 등정에 성공한 산악인이 되었다

엄홍길은 그동안 28번 도전하여 드디어 대기록의 보유자가 되었다

그러나 많은 동료들의 시신을 희말라야의 산속에다 묻었다

그중 박병태 지현옥 한도규 박주훈 황선덕 한명근 등 전문 산악인의 시신을 히말라야의

얼음과 눈의 산에다 묻었고, 셰르파 술염도로지 나티 카미도로미 앙다와다망도 희말리아의 산에서 보내야만 했다

엄홍길은 등반도중 시체마자 잃어버린 동료 산악인 박무택의 시신을 찾기 위하여

영하30도의 강추위속에서 비박을 해가며 결국 시신을 찾아서 묻어주는 초모랑마 휴먼 원정도 성공했다

14좌 등정이후 2004년 알룽캉(8505)에 오르고 16좌인 로체사르에 2007년 5월 31일 4번째 도전만에 등정에 성공했다.

수많은 죽음을 담보로 오늘의 영광을 쟁취한 운이 좋으면서 한편으로 비운의 산악 왕.

로체샤르는 히말라야 산맥중에서도 등정이 가장 어려운 산맥으로 엄홍길은 2001년 첫 도전에 실패했으며 2003년 도전에서 정상을 150미터 앞두고 판상 눈사태가 일어나 동료 두 명을 잃었다. 2006년에 3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2007년 5월 31일에 4번째 도전에서 로체샤르 남벽을 통해 등정했다.

 

박영석

(朴英碩, 1963년 11월 2일 ~ 2011년 10월 18일

 

엄홍길과 함께 한국등반계의 양대 거봉인 박영석

1993년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무산소 등정에 성공한다.

도전 4번 만에 성공한 것이다

91년 첫 에베레스트 도전 시에는 얼굴이 함몰되어 헬기로 이송되기까지 하였다

그는 97년 한 해 동안 8000미터 급 5개를 등정했고

2001년 14좌 완등에 성공한다.

그리고 14좌 완등 후엔 극점으로 시야를 돌려서

산악 그랜드 슬램 (14좌완등 +7대륙 최고봉+남북극점)을 달성했다

박영석(朴英碩, 1963년 11월 2일 ~ 2011년 10월)은 대한민국의 산악인이다. 2005년 4월 30일(한국시간 기준: 5월 1일)에 북극점에 도달함으로써, 세계 최초로 탐험가 그랜드슬램(Explorers Grand Slam)을 달성하여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최초, 세계에서 8번째로 히말라야 8000미터 이상의 봉우리 14좌를 완등(세계 최단기간)한 산악인이기도 하다. 2011년 10월 20일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실종 된 후 2명의 대원과 함께 소식이 끊겼다. 이후 대한산악연맹을 중심으로 두 차례 구조대를 파견했지만 아무런 흔적을 찾지 못했다. 거대한 눈사태에 휘말려 5,600~5,700미터 빙하지대에 묻혔을 것이라고 추정한 뒤 수색을 중단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 7대륙 최고봉 완등, 남극점·북극점 원정에 성공하여 세계 최초로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산악인이다. 1988년 알프스 3대 북벽을 오른 뒤 1991년 에베레스트산 남서벽에 올랐고,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산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1997년 6개월 만에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6개를 등정했다. 2001년 히말라야 14좌를 8년 2개월 만에 모두 등정해 세계 최단기간 완등 기록을 세웠다. 2006년 에베레스트 횡단등반에 성공했고,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코리안 루트를 뚫었다.

2011년 박영석은 안나푸르나 코리안 루트를 개발하는 도중 10월 18일 남벽 5,800m 부근에서 마지막 교신을 남긴 채 연락이 끊겼으며, 수색·구조작업을 진행했지만 찾지 못했다. [Daum백과]

 

한왕용 (1966년 9월~ )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를 세계에서 11번째, 국내에서 3번째로 완등한 대한민국 산악인이다.

2003년 한국인으로 세 번째 히말라야 14좌 등정에 성공한 한왕용은 엄홍길이나 박영석

만큼은 주목받지를 못했다

그러나 한왕용은 14좌 등정 내내 단 한명의 대원도 잃지를 않았다

물론 몇 번은 엄홍길을 대장으로 몇 번은 박영석을 대장으로 한 대원신분으로

참가하여 대장으로의 기회가 적었다고는 하지만--

2002년 k2(8611)등반 때에는 산소통이 고장 난 선배에게 자신의 산소통을

양보하고 무산소 등정을 했다

14좌 완등 후 지금은 그의 등반대원들이 히말라야에 남기고 온 쓰레기를 치우는

청소등반대를 꾸려 에베레스트, k2 ,마나슬루 등을 찾고 있다

 

■ 백준호

 

백준호는 1967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 대건고 재학 시절부터 등반을 시작한 전문 산악인이다. 86년 계명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이후 대학 산악부원으로 활동하며 국내외의 산들을 쏘다녔다.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친 뒤 동아제약에서 근무하다 2000년 직장을 그만두고 개인 사업자로 나서면서 오랫동안 꿈꿔 왔던 히말라야 등반에 매달렸다.

 

2000년 초오유(8,201m), 2002년 로체(8,586m) 등반에 성공한 다음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을 기념하는 '2004 계명대 에베레스트 원정대'를 꾸려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러나 자신의 정상 공격일을 하루 앞둔 2004년 5월18일, 같은 원정대의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이 조난을 당하자 홀로 구조작업에 나섰다가 불귀의 객이 됐다.

2005년 '한국 초모랑마 휴먼원정대'가 그의 시신 수색작업을 벌였으나 찾지 못했다. 에베레스트의 북측 베이스캠프에는 그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향년 37세.

 

     모교 지키는 국내 첫 산악 의사자 백준호

             - 대구 대건중고에 흉상 세워

      입력 : 2016-10-11 23:06 /서울신문

 

국내 첫 산악 의사자인 고 백준호 산악인의 흉상이 그의 모교 대구 대건중고등학교 교정에 세워졌다. 백준호 산악인은 2004년 계명대 개교 50주년 기념 에베레스트 원정대원으로 나섰다가 후배 산악인 박무택과 장민 대원이 조난당하자 위험한 상황인 줄 알면서도 구조에 나섰다. 당시 모든 산악인이 구조요청을 외면했었다.

백준호는 악천후 속에서 12시간 산행 끝에 박무택 대원을 발견, 안전 조치한 후 박 대원이 숨을 거둘 때까지 지켰고 그도 결국 그곳에서 숨졌다. 엄홍길 대장이 이끄는 휴먼등반대를 영화화해 1000만 관객이 든 ‘히말라야’는 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백준호 산악인은 2005년 체육훈장 백마장 수상과 함께 산악인 최초 의사자로 인정되었다.

흉상 제막식은 지난 9일에 있었다. [출처: 서울신문]

 

 

지현옥

93년 한국여성 등반대 대장으로

한국여성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오른 지현옥

그녀는 1999년 엄홍길과 함께한 안나푸르나 등정 하산 길에서

악천후로 인하여 지현옥 대원은 실종되었다

 

오은선

오은선(1966년 3월 5일 ~ )은 대한민국의 산악인으로 블랙야크 소속이다.

히말라야 8,000미터급 14좌 완등을 목표로 삼은 대표적인 여성 산악인이다]

불의의 사고로 떠난 지현옥의 빈자리는 오은선이 채웠다

그녀는 2004년 에베레스트 단독등정에 성공한 첫 한국 여성등반가가 되었다

1993년 故 지현옥 대장을 중심으로 한 한국최초 '여성 에베레스트 원정대' 대원으로 첫 해외 원정 시작.

그로부터 11년 후인 2004년 한국,아시아 여성산악인 최초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8,848m) 단독 등정 성공.

2006년 한국 여성 산악인 최초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완등했으며, 현재 아시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최고봉을 11개봉을 오른 세계적인 여성산악인이다.

2008년 세계 여성산악인 최초로 히말라야 14좌 중 한 해 4개봉 연속 등정에 성공(마칼루(8,463m)-로체(8,516m)-브로드피크(8,047m)-마나슬루(8,163m))했다.

 

◈ 7대륙 최고봉 한국 여성 최초 등정

2002. 8. 24. 유럽 최고봉 엘브르즈(5,642m) - 동봉(23일), 서봉(24일)

2003. 5. 24.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아시아 여성 최초‘단독 등정’

2004. 1. 9.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2004. 5. 20. 세계(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여성 최초‘단독 등정’

2004. 8. 19.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5,895m)

2004. 11. 12. 호주 최고봉 코지어스코(2,230m)

2004. 12. 19.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2006. 12. 3. 오세아니아주 최고봉 칼스텐츠(4,884m)

 

◈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중 11개봉 등정 (한국.아시아 최초)

1997. 7. 17. 가셔브롬 II봉(8,035m) 무산소

2004. 5. 20. 세계(아시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 아시아 여성 최초 단독 등정

2006. 10. 13. 시샤팡마(8,046m) 무산소

2007. 5. 8. 초오유(8,201m) 무산소, 단독

2007. 7. 20. K2(8,611m) 한국 여성 최초 등정

2008. 5. 13. 마칼루(8,463m) 무산소

2008. 5. 26. 로체(8,516m) 무산소, 단독

2008. 7. 31. 브로드피크(8,047m) 무산소, 단독

2008. 10. 12. 마나슬루(8,163m) 무산소

※ 2008년, 세계 여성 산악인 최초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중 한해 4개봉 연속 등정 성공

2009. 5. 6. 칸첸중가(8,586m) 무산소

2009. 5. 21. 다울라기리(8,167m) 무산소

2009. 7. 10. 낭가파르밧(8,126m) 무산소

 

고미영(高美英)

생몰 : 1967년 7월 3일 ~ 2009년 7월

(지난 7월 11일 여성 산악인 최초 14좌 완등을 목표로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해발 8,126m) 정상을 등정했다 3좌만을 남겨두고 하산도중 실족사고로 숨짐)

대한민국 전북 부안 출생의 산악인이다. 작은 체구임에도 2007년 여성 산악인으로는 최초로 8,000 미터급 산 3개 등정에 성공하는 등 대한민국 내 여성 산악인의 대표주자로 꼽혀 왔다.

고미영은 2009년 7월 10일, 히말라야 낭가파르밧 산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2009년에만 4개 봉우리를 오르는 등 총 11좌 등정에 성공했다. 다음날 11일 낭가파르밧에서 하산하던 중 해발 6,200 미터 지점 '칼날 능선'에서 실족하여 목숨을 잃었다.[1] 그녀가 추락한 장소는 눈사태와 낙석이 자주 발생하여 대원들끼리 로프로 몸을 묶을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에 변을 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사고 직전까지 또다른 산악인인 오은선과 함께 8,000 미터급 14좌 등정 기록을 놓고 경쟁을 벌여 왔다. 그런데 둘 사이의 과도한 경쟁이 이번 사건의 원인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소속 : 코오롱스포츠 챌린지팀

학력 : 상명대학교 체육학과 석사과정

경력 : 2009년 히말라야 낭가파르바트(8126m) 등정

수상 : 2006년 제2회 노스페이스 아이스 클라이밍 페스티벌 여자부 우승

 

⊙「움직이는 베이스캠프」의 사나이 의리

              沈 相 敦(심상돈)

 

다친 동료와 함께 8일간 버틴 닐기리 중앙봉 조난의 드라마

82년 닐기리 중앙봉 등정후 下山때 부상당한 동료 대원 곁에서 11일을 보낸 의리의 사나이,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살아 돌아온 그는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남았다』고 무심히 한 마디 던졌을 뿐이다. 그의 뚝심과 의리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安重局 조선일보 월간산부 기자

 

故高相敦(고상돈)이라면 몰라도, 沈相敦(39)이란 이름은 산악인이 아니면 아마 잘 모르리라. 그러나 산악인들 사이에선 77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른 高相敦에 못지않게 경외감으로 떠올려지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움직이는 베이스캠프」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베이스캠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등반시 최상의 안전지대이자 안락한 휴식처가 베이스캠프다. 옆에 있으면, 바로 그런 베이스캠프에 있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동료... 그것은 산악인으로선 어쩌면 최고로 영예로운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산악인들 사이에선 에베레스트 등정을 비롯한 그 어떤 등정도 「움직이는 베이스캠프」 沈相敦의 닐기리 중앙봉 등반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되새겨지는 것이 없다.

닐기리 중앙봉은 워낙 높은 봉이 많은 네팔 히말라야에선 그저 훈련 삼아 오를뿐인 6천m급의, 상대적으로 낮은 봉우리이다. 그러나 6천m가 넘으니 만년설, 크레바스(빙하의 만년빙이 흐르며 가로로 길게 벌어져 생기는 깊은 틈) 등, 고봉이 갖출 악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다. 沈相敦은 그런 닐기리 중앙봉을 등정한 뒤 하산 하다가 부상당한 동료와 무려 열하루를 버티었고, 결국 함께 회생(回生)했다. 혼자 내려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부상당한 동료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82년 봄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다섯 명의 대원과 두 명의 셰르파(高所의 짐꾼 등)는 이듬해의 8천m 고봉 원정을 대비한 훈련으로 닐기리 중앙봉 등반에 나서서 4월25일 오후 3시께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등정 때 장비를 모두 소비해버리는 바람에 40m 로프 한 동과 아이스하켄(氷壁 등반시 지점확보를 위해 박아두는 기구) 몇 개 등 소량의 장비밖에 남지 않았다.

 

     8일간의 고립, 환청과 환각의 연속

 

이것만으로 하산하다 보니 제 3캠프에 이르기 전에 어둠이 닥쳤고 사고가 났다. 랜턴도 불이 제대로 들어오는 것은 한 개 뿐이었다. 서로 소리쳐 알려주며 하산하던 중 김광 대원(당시 26세)이 가파른 절벽을 로프 하강하다가 실족, 발목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일곱 명의 일행은 김광 대원을 부축해 이튿날인 4월26일 새벽 3시께 6천1백50m지점의 제3캠프에 도착, 하루 종일 쉬었다. 그 다음날인 27일 제3캠프를 철수할 때 이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산더미만한 배낭을 진 데다 환자 썰매마저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이들은 고통을 덜기 위해 진통제를 다량 복용하여 혼미한 상태인 김광 대원을 그 다음날 다시 올라와서 하산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자연 누가 김광 대원과 함께 남아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장비를 추스르고 있던 沈相敦 대원이 자연스레 환자와 남게 되었다.

김광과 沈相敦을 제외한 일행은 제2캠프로 내려가 모두 고소증으로 지쳐 떨어져 움직이질 못한다는 무전연락을 쳤다. 그러면서 안창렬 대장은 헬기를 부르겠다고 했다.

 

헬기를 수배해 띄우기까지는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 같아 沈相敦은 텐트 바깥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연료용 가스 한통, 고소용 쌀인 알파미를 비롯한 라면 과자 등 식량 조금을 찾아내 확보해두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조하러 갈 테니 움직이지 말라는 교신이 왔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두 사람은 먹을 때 와 용변 볼 때, 텐트에 쌓이는 눈을 치울 때 이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의 혹독한 추위와 한낮의 한증막 같은 텐트 안의 열기, 그리고 지속되는 긴장 때문에 두 사람은 급속히 탈진해 갔다. 식욕이 떨어져 두 사람이 끓인 라면 한 개를 다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그나마 나중에는 먹을 것도 떨어졌다. 사람들 여러 명이 텐트 밖에서 웅성거리는 것 같은 환청 등이 연속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꿈속에서 흰 옷 입은 산신령을 보기도 했다.

고립 엿새째인 5월3일, 비로소 헬기가 간다는 교신이 왔다. 沈相敦은 부상자에게 안전벨트를 채우는 등,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 그러나 헬기는 위에서 한 바퀴 맴돌기만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고소(高所)지역이라 공기가 희박해 착륙도, 공중에서의 로프 구조도 불가능하다 』는 회신이 왔다. 그러면서『셰르파들의 급료를 두 배로 주면서 설득해 올려 보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월5일 고립 8일째, 『그 셰르파들이 크레바스에 막혀 제2캠프로 일단 철수했다』는 연락이 왔다. 沈相敦은 『우리 힘으로 일단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가겠다』고 연락한 뒤 철수 준비를 했다. 얼어서 양철처럼 뻣뻣해진 텐트 등속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매트리스와 비닐을 이용, 썰매를 만들어 그 위에 김광 대원을 앉히고 앞에서 끌었다. 제3캠프 아래쪽은 완경사의 설원지대, 열흘 전 등반 때는 서너 시간 만에 지났던 그 설원을 그는 부상자 썰매를 끌면서 꼬박 이틀간 걸어야 했다.

 

      널찍하게 벌어진 크레바스

 

약 2km의 설원을 지나자 최난관지대인 빙탑과 크레바스가 널린 아이스폴 지대가 나타났다.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전에는 그냥 건너뛰었던 크레바스의 틈이 몬순으로 날씨가 푹해지며 한결 크게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부상자 썰매는 고사하고 그 혼자 넘기도 어려웠다. 먼저 내려간 사람들에게 모두 내려 보내서, 로프도 없었고 장비라고는 피켈 한 자루뿐이었다.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 沈相敦은 혼자 셰르파들이 되돌아섰다는 그 크레바스까지 내려가보기로 했다. 만약 구조대를 못 만나면 다시 돌아올 각오로 침낭 등속을 모두 텐트에 남겨두었다.

군용침낭의 커버를 찢어낸 것을 로프대신으로 삼아, 첫 크레바스를 무사히 건넜다. 또 널찍하게 벌어진 크레바스가 나타났다. 피켈과 남은 등산용 납작끈을 이용해 건넜다. 이제 또하나 뜻하지 않은 크레바스가 나타나면 앞으로 나가지도 되돌아 텐트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된다. 그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세 명의 셰르파였다.

크레바스는 층이 져 있었다. 물론 셰르파들이 있는 곳이 더 낮았다. 아래쪽의 셰르파들은 沈相敦에게 로프 한쪽 끝을 던졌다. 그는 로프를 잡아 얼음기둥에 묶었다. 그러나 그는 내려가지 않았다.

하늘이 다시 흐려오고 있었다. 그가 내려가면 셰르파들이 부상당한 동료 김광을 그냥 둔 채 내려가자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셰르파들은 올라올 생각은 않고 그에게 내려오라고 외치기만 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로프를 잡고 버티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한 명이 움직였다. 20대 초반의 요리사 학파 체링이었다. 沈相敦은 선발대원으로 뽑혀 다른 대원보다 몇 달 앞서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었다. 그때 沈相敦은 학파 체링과 친해졌었다. 학파 체링은 그를 「형님」으로 부르면서 따랐다. 학파 체링은 고소등반 경험이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고소에 올라온 것이었다. 학파 체링이 올라오자 나머지 두 명도 뒤따라 올라왔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그들이 올라오자 힘이 났다. 沈相敦은 그들과 함께 다시 김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날 저녁 천신만고 끝에 베이스캠프로 내려 온뒤 며칠간, 작은 풀꽃 하나만 보아도 눈물이 퍽 쏟아졌다. 沈相敦은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이 다 흘러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沈相敦씨의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장기간의 고지대 조난기이자 자기희생기이다. 열하루가 아니라 며칠이라도 고소에 그렇게 함께 남아 있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헬기가 왔다간 뒷면 누구든 혼자 살아 내려가려 했을 것이라고 히말라야 등반 경험자들은 얘기한다.

고소 등반에서 「비정했던」 예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것이 「비정한 것」만은 아니다. 둘 모두 죽느냐, 두 명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혼자 내려왔다고 해도 조금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히말라야 고봉 경험자들은 「고소(高所)의 상식」을 전한다.

 

      네팔 와서 사귄 사이

 

沈相敦씨와 김광씨가 그렇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산악회 소속으로서 네팔에 와서야 서로 알게 되었다. 두 산악회가 합동으로 닐기리 중앙봉 등반을 하기로 한 뒤 비슷한 연배로서 서로 말을 터놓고 지내게 된 정도의 사이였다.

두 달간 등반을 같이 하며 우정을 맺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끈끈한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심상돈씨는 『우정이 얼마나 깊으냐보다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텐트와 침낭이 있고, 또 뒤져보니 며칠분이나마 식량이 있었습니다. 베이스캠프 와는 무전 교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니 뭐, 죽기야 하겠나 싶었지요, 나중에 헬기가 그냥 돌아간 뒤에는 좀 긴장했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이 조난당했을 때인 5월 초순은, 고산지대에서는 폭설을 의미하는 몬순(雨期)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연일 폭설이 내려 퇴로가 완전 차단되거나, 혹은 날씨가 풀려 크레바스의 틈이 더 크게 벌어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그들이 머물던 제3캠프 뒤에는 절벽이 곧추 서 있어 수시로 분설이 쏟아졌다. 沈相敦은 이따금씩 쏟아져 내린 눈을 쳐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텐트가 무덤처럼 납작하게 짜부러졌다고 했다. 대낮의 햇살로 텐트 안이 더워지면 바닥의 눈이 녹아 매트리스와 침낭을 적셨다가 밤에는 꽁꽁 얼어붙었다. 동료들과 무전교신은 되었지만 「직접 나서서 구조할 만큼 체력을 회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무전교신은 암시하고 있었다. 그의 낙관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沈相敦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망적인 상황이었더라도 그는 혼자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沈相敦씨와 해외 원정이나 탐험 등을 여러 번 해보아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친구인 尹明哲(39·성균관대 사학과 강사)·전석훈(39·여행업)·정광식씨(38·다우교역대표)등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상돈이 그 친구가 그 큰 덩치로 옆에 있으면 항상 믿음직하죠. 원정대에 그 친구가 함께 있으면 팀 분위기가 항상 좋습니다.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양보를 잘 합니다. 그건 타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워낙 그의 집안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누구든 그 친구를 직접 만나보면 타고났다는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수영 못 하면서 현해탄 건너

 

尹明哲씨는 83년 여름, 해모수호라 이름한 뗏목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가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를 실증해 보이려고 했었다. 심상돈씨는 그 일행 중 한 명이었다. 당시 尹明哲씨는 沈相敦씨와는 동국대 동굴탐험부 동료 사이였다. 尹明哲씨는 힘좋고 심덕 좋은 그를 자신이 기획한 탐험에 끌어들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沈相敦씨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沈은 친구의 뜻을 따라준 것이었다. 닐기리 중앙봉 등반 1년 뒤의 일이다.

『구명조끼도 있었고, 넓은 바다에서는 수영할 줄 알고 모르고가 생사를 좌우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냥...』

沈相敦씨의 대답이었다. 워낙이 그는 친구를 좋아하고 낙천적인 것 같다. 유달리 듬직하고 선한 인상은 선천적이기도 하다.

沈相敦씨는 대학 졸업 직후인 81년부터 꼬박 10년간 조부로부터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지었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서울의 양정중·고교를 다니면서도 틈날 때마다 조부모가 계시는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농촌의 모든 것이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좋았다고 沈相敦씨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장차 농사꾼이 될 생각을 했고, 대학도 동국대 농학과로 진학한 것이었다. 땅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살았던 10년은 결국 적자로 끝났지만 땅은 항상 솔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고 沈相敦씨는 돌이킨다.

닐기리 중앙봉 등정 이후인 84년 말 그는 한 번 더 히말라야 원정을 다녀왔다. 그가 얘기를 꺼내어 추진한 양정산악회의 84~85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이었다. 그러나 날씨 탓으로 제3캠프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원정을 다녀온 뒤 그는 강미향씨와 중매 결혼했다. 그 뒤로는 욕심만 있지, 실제 원정은 한 번도 못 나갔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게 아니라 저 세상행이 될지도 모를 길을 주저 없이 나서곤했던 그는 『단독 등반은 전혀 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동료들과 부대끼며 추진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현재 그가 차린 혜초여행사의 직원 여섯 명 모두 산(山) 후배들이다. 유명 여성 산악인인 남난희씨도 포함돼 있다. 아프리카 트럭 여행 등 오지여행을 주상품으로 하는데 아직은 미안할 정도로 직원들 봉급이 적다고 한다.

실명제 때문에 뜻밖의 특수(特需)가 일어 요즈음 동남아, 하와이 등 해외 유명관광지 여행상품은 없어서 못 팔정도라는데, 그의 사무실은 안 되다 만큼 조용하다. 하지만 낙천적인 그는 한 마디 잊지 않았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닐기리 중앙봉 때든 해모수호 때든 모두 마찬가지지요, 저는 된다고 생각하고 해서 모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도 물론 그렇게 살 겁니다』

 

 * 이 글은 [월간조선 1994년1월호 별책부록]“세계적 韓國人-頂上에 선 야성과 오기의 한국인 73명의 인간 탐험”에 실린 글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