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움직이는 베이스캠프」의 사나이 의리

도깨비-1 2016. 1. 28. 13:18

 

이 글은

[월간조선 1994년1월호 별책부록]

“세계적 韓國人-頂上에 선 야성과 오기의 한국인 73명의 인간 탐험”에 실린 글 중 하나이다.

 

 

⊙「움직이는 베이스캠프」의 사나이 의리

 

   沈 相 敦(심상돈)

 

다친 동료와 함께 8일간 버틴 닐기리 중앙봉 조난의 드라마

 

82년 닐기리 중앙봉 등정후 下山때 부상당한 동료 대원 곁에서 11일을 보낸 의리의 사나이, 부상당한 동료와 함께 살아 돌아온 그는 『죽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남았다』고 무심히 한 마디 던졌을 뿐이다. 그의 뚝심과 의리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安重局 조선일보 월간산부 기자

 

故高相敦(고상돈)이라면 몰라도, 沈相敦(39)이란 이름은 산악인이 아니면 아마 잘 모르리라. 그러나 산악인들 사이에선 77년 한국인 최초로 세계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른 高相敦에 못지않게 경외감으로 떠올려지는 이름이다.

그의 이름 앞에는 항상 「움직이는 베이스캠프」란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베이스캠프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등반시 최상의 안전지대이자 안락한 휴식처가 베이스캠프다. 옆에 있으면, 바로 그런 베이스캠프에 있는 것처럼 마음 든든한 동료... 그것은 산악인으로선 어쩌면 최고로 영예로운 말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산악인들 사이에선 에베레스트 등정을 비롯한 그 어떤 등정도 「움직이는 베이스캠프」 沈相敦의 닐기리 중앙봉 등반보다 더 진한 감동으로 되새겨지는 것이 없다.

닐기리 중앙봉은 워낙 높은 봉이 많은 네팔 히말라야에선 그저 훈련 삼아 오를뿐인 6천m급의, 상대적으로 낮은 봉우리이다. 그러나 6천m가 넘으니 만년설, 크레바스(빙하의 만년빙이 흐르며 가로로 길게 벌어져 생기는 깊은 틈) 등, 고봉이 갖출 악조건은 모두 갖추고 있다. 沈相敦은 그런 닐기리 중앙봉을 등정한 뒤 하산 하다가 부상당한 동료와 무려 열하루를 버티었고, 결국 함께 회생(回生)했다. 혼자 내려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부상당한 동료를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82년 봄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다. 다섯 명의 대원과 두 명의 셰르파(高所의 짐꾼 등)는 이듬해의 8천m 고봉 원정을 대비한 훈련으로 닐기리 중앙봉 등반에 나서서 4월25일 오후 3시께 등정에 성공했다. 그러나 등정 때 장비를 모두 소비해버리는 바람에 40m 로프 한 동과 아이스하켄(氷壁 등반시 지점확보를 위해 박아두는 기구) 몇 개 등 소량의 장비밖에 남지 않았다.

 

8일간의 고립, 환청과 환각의 연속

이것만으로 하산하다 보니 제 3캠프에 이르기 전에 어둠이 닥쳤고 사고가 났다. 랜턴도 불이 제대로 들어오는 것은 한 개 뿐이었다. 서로 소리쳐 알려주며 하산하던 중 김광 대원(당시 26세)이 가파른 절벽을 로프 하강하다가 실족, 발목 부상을 입은 것이다.

일곱 명의 일행은 김광 대원을 부축해 이튿날인 4월26일 새벽 3시께 6천1백50m지점의 제3캠프에 도착, 하루 종일 쉬었다. 그 다음날인 27일 제3캠프를 철수할 때 이들은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 산더미만한 배낭을 진 데다 환자 썰매마저 끌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인지, 이들은 고통을 덜기 위해 진통제를 다량 복용하여 혼미한 상태인 김광 대원을 그 다음날 다시 올라와서 하산시키기로 한 것이었다. 자연 누가 김광 대원과 함께 남아 있을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다. 맨 마지막으로 장비를 추스르고 있던 沈相敦 대원이 자연스레 환자와 남게 되었다.

김광과 沈相敦을 제외한 일행은 제2캠프로 내려가 모두 고소증으로 지쳐 떨어져 움직이질 못한다는 무전연락을 쳤다. 그러면서 안창렬 대장은 헬기를 부르겠다고 했다.

헬기를 수배해 띄우기까지는 적어도 이틀은 걸릴 것 같아 沈相敦은 텐트 바깥의 쓰레기 더미를 뒤져 연료용 가스 한통, 고소용 쌀인 알파미를 비롯한 라면 과자 등 식량 조금을 찾아내 확보해두었다. 베이스캠프에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조하러 갈 테니 움직이지 말라는 교신이 왔다.

체력을 아끼기 위해 두 사람은 먹을 때 와 용변 볼 때, 텐트에 쌓이는 눈을 치울 때 이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밤의 혹독한 추위와 한낮의 한증막 같은 텐트 안의 열기, 그리고 지속되는 긴장 때문에 두 사람은 급속히 탈진해 갔다. 식욕이 떨어져 두 사람이 끓인 라면 한 개를 다 먹지 못할 정도가 되었고 그나마 나중에는 먹을 것도 떨어졌다. 사람들 여러 명이 텐트 밖에서 웅성거리는 것 같은 환청 등이 연속되었고, 두 사람이 함께 꿈속에서 흰 옷 입은 산신령을 보기도 했다.

고립 엿새째인 5월3일, 비로소 헬기가 간다는 교신이 왔다. 沈相敦은 부상자에게 안전벨트를 채우는 등, 준비를 갖추어 두었다. 그러나 헬기는 위에서 한 바퀴 맴돌기만 하고는 사라져버렸다. 잠시 후 『고소(高所)지역이라 공기가 희박해 착륙도, 공중에서의 로프 구조도 불가능하다 』는 회신이 왔다. 그러면서『셰르파들의 급료를 두 배로 주면서 설득해 올려 보냈으니 기다리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 뒤인 5월5일 고립 8일째, 『그 셰르파들이 크레바스에 막혀 제2캠프로 일단 철수했다』는 연락이 왔다. 沈相敦은 『우리 힘으로 일단 내려갈 수 있는 데까지 내려가겠다』고 연락한 뒤 철수 준비를 했다. 얼어서 양철처럼 뻣뻣해진 텐트 등속을 챙겨 배낭을 꾸리고, 매트리스와 비닐을 이용, 썰매를 만들어 그 위에 김광 대원을 앉히고 앞에서 끌었다. 제3캠프 아래쪽은 완경사의 설원지대, 열흘 전 등반 때는 서너 시간 만에 지났던 그 설원을 그는 부상자 썰매를 끌면서 꼬박 이틀간 걸어야 했다.

 

널찍하게 벌어진 크레바스

약 2km의 설원을 지나자 최난관지대인 빙탑과 크레바스가 널린 아이스폴 지대가 나타났다. 절망적인 풍경이었다. 전에는 그냥 건너뛰었던 크레바스의 틈이 몬순으로 날씨가 푹해지며 한결 크게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부상자 썰매는 고사하고 그 혼자 넘기도 어려웠다. 먼저 내려간 사람들에게 모두 내려 보내서, 로프도 없었고 장비라고는 피켈 한 자루뿐이었다.

텐트를 치고 하룻밤을 보낸 沈相敦은 혼자 셰르파들이 되돌아섰다는 그 크레바스까지 내려가보기로 했다. 만약 구조대를 못 만나면 다시 돌아올 각오로 침낭 등속을 모두 텐트에 남겨두었다.

군용침낭의 커버를 찢어낸 것을 로프대신으로 삼아, 첫 크레바스를 무사히 건넜다. 또 널찍하게 벌어진 크레바스가 나타났다. 피켈과 남은 등산용 납작끈을 이용해 건넜다. 이제 또하나 뜻하지 않은 크레바스가 나타나면 앞으로 나가지도 되돌아 텐트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된다. 그때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세 명의 셰르파였다.

크레바스는 층이 져 있었다. 물론 셰르파들이 있는 곳이 더 낮았다. 아래쪽의 셰르파들은 沈相敦에게 로프 한쪽 끝을 던졌다. 그는 로프를 잡아 얼음기둥에 묶었다. 그러나 그는 내려가지 않았다.

하늘이 다시 흐려오고 있었다. 그가 내려가면 셰르파들이 부상당한 동료 김광을 그냥 둔 채 내려가자고 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셰르파들은 올라올 생각은 않고 그에게 내려오라고 외치기만 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로프를 잡고 버티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결국 한 명이 움직였다. 20대 초반의 요리사 학파 체링이었다. 沈相敦은 선발대원으로 뽑혀 다른 대원보다 몇 달 앞서 네팔 카트만두에 도착했었다. 그때 沈相敦은 학파 체링과 친해졌었다. 학파 체링은 그를 「형님」으로 부르면서 따랐다. 학파 체링은 고소등반 경험이 없었다. 이때 처음으로 고소에 올라온 것이었다. 학파 체링이 올라오자 나머지 두 명도 뒤따라 올라왔다. 극도로 지친 상태였지만 그들이 올라오자 힘이 났다. 沈相敦은 그들과 함께 다시 김광이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날 저녁 천신만고 끝에 베이스캠프로 내려 온뒤 며칠간, 작은 풀꽃 하나만 보아도 눈물이 퍽 쏟아졌다. 沈相敦은 『그때 평생 흘릴 눈물이 다 흘러버리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고 했다.

沈相敦씨의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찾기 어려운 장기간의 고지대 조난기이자 자기희생기이다. 열하루가 아니라 며칠이라도 고소에 그렇게 함께 남아 있어 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헬기가 왔다간 뒷면 누구든 혼자 살아 내려가려 했을 것이라고 히말라야 등반 경험자들은 얘기한다.

고소 등반에서 「비정했던」 예는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그것이 「비정한 것」만은 아니다. 둘 모두 죽느냐, 두 명 중 한 명이라도 살아남느냐의 문제이다. 따라서 혼자 내려왔다고 해도 조금도 비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히말라야 고봉 경험자들은 「고소(高所)의 상식」을 전한다.

 

네팔 와서 사귄 사이

沈相敦씨와 김광씨가 그렇게 친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다른 산악회 소속으로서 네팔에 와서야 서로 알게 되었다. 두 산악회가 합동으로 닐기리 중앙봉 등반을 하기로 한 뒤 비슷한 연배로서 서로 말을 터놓고 지내게 된 정도의 사이였다.

두 달간 등반을 같이 하며 우정을 맺기는 했지만 목숨을 걸 정도로 끈끈한 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에 대해 심상돈씨는 『우정이 얼마나 깊으냐보다는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더 근본적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텐트와 침낭이 있고, 또 뒤져보니 며칠분이나마 식량이 있었습니다. 베이스캠프 와는 무전 교신이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니 뭐, 죽기야 하겠나 싶었지요, 나중에 헬기가 그냥 돌아간 뒤에는 좀 긴장했지만, 그래도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모든 것이 절망적인 상황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이 조난당했을 때인 5월 초순은, 고산지대에서는 폭설을 의미하는 몬순(雨期)이 시작되는 시점이다. 연일 폭설이 내려 퇴로가 완전 차단되거나, 혹은 날씨가 풀려 크레바스의 틈이 더 크게 벌어지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또한 당시 그들이 머물던 제3캠프 뒤에는 절벽이 곧추 서 있어 수시로 분설이 쏟아졌다. 沈相敦은 이따금씩 쏟아져 내린 눈을 쳐내기는 했지만 나중에는 텐트가 무덤처럼 납작하게 짜부러졌다고 했다. 대낮의 햇살로 텐트 안이 더워지면 바닥의 눈이 녹아 매트리스와 침낭을 적셨다가 밤에는 꽁꽁 얼어붙었다. 동료들과 무전교신은 되었지만 「직접 나서서 구조할 만큼 체력을 회복한 사람은 아무도 없음」을 무전교신은 암시하고 있었다. 그의 낙관과는 정반대로 모든 것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沈相敦을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절망적인 상황이었더라도 그는 혼자 내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沈相敦씨와 해외 원정이나 탐험 등을 여러 번 해보아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친구인 尹明哲(39·성균관대 사학과 강사)·전석훈(39·여행업)·정광식씨(38·다우교역대표)등은 이렇게 입을 모은다.

『상돈이 그 친구가 그 큰 덩치로 옆에 있으면 항상 믿음직하죠. 원정대에 그 친구가 함께 있으면 팀 분위기가 항상 좋습니다. 그는 바보스러울 정도로 양보를 잘 합니다. 그건 타고났다고 말할 수밖에 없어요. 워낙 그의 집안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누구든 그 친구를 직접 만나보면 타고났다는 말이 딱 맞다는 생각이 들 겁니다.』

 

수영 못 하면서 현해탄 건너

尹明哲씨는 83년 여름, 해모수호라 이름한 뗏목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가 한국문화의 일본 전파를 실증해 보이려고 했었다. 심상돈씨는 그 일행 중 한 명이었다. 당시 尹明哲씨는 沈相敦씨와는 동국대 동굴탐험부 동료 사이였다. 尹明哲씨는 힘좋고 심덕 좋은 그를 자신이 기획한 탐험에 끌어들였으나 어처구니없게도 沈相敦씨는 수영을 할 줄 몰랐다. 그러면서도 沈은 친구의 뜻을 따라준 것이었다. 닐기리 중앙봉 등반 1년 뒤의 일이다.

『구명조끼도 있었고, 넓은 바다에서는 수영할 줄 알고 모르고가 생사를 좌우하는 것 같지도 않고 해서 그냥...』

沈相敦씨의 대답이었다. 워낙이 그는 친구를 좋아하고 낙천적인 것 같다. 유달리 듬직하고 선한 인상은 선천적이기도 하다.

沈相敦씨는 대학 졸업 직후인 81년부터 꼬박 10년간 조부로부터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지었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공무원인 부친을 따라 서울의 양정중·고교를 다니면서도 틈날 때마다 조부모가 계시는 시골집으로 내려왔다. 농촌의 모든 것이 중학교 때부터 그렇게 좋았다고 沈相敦씨는 말한다.

그래서 그는 중학교 때부터 장차 농사꾼이 될 생각을 했고, 대학도 동국대 농학과로 진학한 것이었다. 땅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살았던 10년은 결국 적자로 끝났지만 땅은 항상 솔직하고 믿음직스러웠다고 沈相敦씨는 돌이킨다.

닐기리 중앙봉 등정 이후인 84년 말 그는 한 번 더 히말라야 원정을 다녀왔다. 그가 얘기를 꺼내어 추진한 양정산악회의 84~85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이었다. 그러나 날씨 탓으로 제3캠프까지 진출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원정을 다녀온 뒤 그는 강미향씨와 중매 결혼했다. 그 뒤로는 욕심만 있지, 실제 원정은 한 번도 못 나갔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게 아니라 저 세상행이 될지도 모를 길을 주저 없이 나서곤했던 그는 『단독 등반은 전혀 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동료들과 부대끼며 추진하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현재 그가 차린 혜초여행사의 직원 여섯 명 모두 산(山) 후배들이다. 유명 여성 산악인인 남난희씨도 포함돼 있다. 아프리카 트럭 여행 등 오지여행을 주상품으로 하는데 아직은 미안할 정도로 직원들 봉급이 적다고 한다.

실명제 때문에 뜻밖의 특수(特需)가 일어 요즈음 동남아, 하와이 등 해외 유명관광지 여행상품은 없어서 못 팔정도라는데, 그의 사무실은 안 되다 만큼 조용하다. 하지만 낙천적인 그는 한 마디 잊지 않았다.

『안된다고 생각하면 세상에 되는 일이 어디 있습니까? 닐기리 중앙봉 때든 해모수호 때든 모두 마찬가지지요, 저는 된다고 생각하고 해서 모두 성공했습니다. 앞으로도 물론 그렇게 살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