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산악인

[스크랩] [초점] 왜 일본인 중에는 14좌 완등자가 없나?

도깨비-1 2016. 2. 15. 01:40

지난 4월 27일 오은선이 안나푸르나 등정, 세계 여성 최초 8,000m급 14개 거봉 완등에 성공해 한국 산악계를 기쁘게 했다. 14개 거봉 완등은 엄홍길(2000년 8번째), 박영석(2001년 9번째), 한왕용(2003년 11번째) 세 남자 산악인들이 이미 해낸 쾌거지만 ‘세계 여성 최초’라는 새로운 기록, 그것도 155cm 단신의 가녀린 40대 중반 여성의 등반은 TV를 본 모든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밖에 없었다.


14개 거봉 완등에 대한 일본의 반응 미지근


오은선의 등반은 ‘세계 여성 최초’ 타이틀을 놓고 각축전을 벌인 스페인의 에두르네 파사반이 오은선이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던 4월 17일 안나푸르나 등정에 성공하고 마지막 고봉인 시샤팡마(8,027m) 등반을 앞두고 있었기에 더욱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파사반은 5월 17일 현지시각 11시30분 시샤팡마를 등정했다). 


▲ 1921년 일본의 마키 유코가 초등한 아이거 북동릉인 미텔레기 능선 루트.

이렇듯 우리는 산악계뿐 아니라 일반인들까지도 8,000m 14개 거봉 완등에 뜨거운 관심을 보이는데 이웃 나라이자 히말라야 등반사가 우리에 비해 반세기 가까이 앞선 일본 산악계는 의아하게도 별다른 관심이 없는 분위기다.


일본의 히말라야 등반은 우리나라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시작됐다. 아시아에서 가장 빠른 시기에  근대 등반을 시작했고, 20세기 초에 등산에 스키를 접목했을 만큼 일본 산악계는 전문등반에 빨리 눈을 떴다. 또한 일본 산악인들은‘일본 등산의 아버지’로 불리는 영국성공회 목사 월터 웨스턴의 권유로 알프스에서 활동을 펼치며 1921년 스위스 가이드들과 함께 아이거 미텔레기 능선을 초등반했고, 수많은 만년설산을 등반한 마키 유코에 의해 20세기 초에 유럽 알프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를 바탕삼아 1925년 캐나다 로키산맥의 앨버타 초등으로 해외 원정에 포문을 연 일본은 1936년 히말라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단일 대학산악부인 닛쿄(立敎)대학 원정대는 인도 히말라야의 난다코트(6,867m)를 초등정하는 쾌거를 올렸고, 그 20년 후인 1956년 영국·독일·스위스·이탈리아 등 히말라야 등반을 이끌어온 서구 산악인들이나 가능하리라 믿었던 8,000m급 고봉 초등을 이끌어낸다. 유럽알프스의 여러 명봉을 오르며 만년설산 등반에 대한 경험을 쌓아온 마키 유코는 제3차 마나슬루 원정을 성공리에 이끌어 세계 제8위 고봉인 마나슬루(8,163m)에 도전, 세계 초등의 대업을 달성했다.


▲ 2007년 일본팀이 등반한 로체 남벽. 8,000m 고봉 거벽 중 가장 험난한 벽으로 꼽히는 등반 대상지다. 빨간 실선이 일본팀의 등반 루트다.

1958년 카라코룸 초고리사 북동봉(7,668m), 1960년 히말출리 동봉(7,893m), 힌두쿠시 제2의 고봉 노샥(7,490m), 1962년 카라코룸 살토로 캉리(7,742m), 1964년 8,000m 이하의 주봉 가운데 가장 높은 갸충캉(7,952m) 남벽, 1975년 다울라기리4봉(7,661m)  등 네팔 히말라야의 미등봉을 대상으로 초등을 기록해온 일본 산악인들은 네팔뿐 아니라 중국 티베트와 쓰촨성 일원의 고봉에까지 뻗어갔다. 1986년의 경우 12개 일본 팀이 그 해 개방한 중국의 고산에 도전해 쿨라캉리(7,554m)와 초아위(네팔명 파상라무출리·7,354m)를 포함해 6개의 처녀봉을 초등정했고 1988년에는 게녠(6,204m)과 촐라산(6,168m)을 초등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일본의 처녀봉 등정에 대한 열정은 파키스탄 히말라야와 티베트의 오지 곳곳에 뻗쳐 이들 지역 고봉의 초등 중 절반은 일본 산악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000m 고봉 거벽 등반에 대한 열의도 대단했다. 1995년 봄 한국 팀이 보닝턴 루트로 성공한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반의 경우 일본 산악인들이 1969년 가장 먼저 남서벽 정찰등반을 시도했을 뿐 아니라 1994년 말 등반에 성공한 일본 산악인들이 마지막 캠프에 남겨놓은 산소통과 이들이 알려준 정보가 한국 등반대 등정의 큰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2006년 한국팀이 로체 남벽 등반에서 8,200m 고소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앞서 두 차례의 등반을 통해 정확한 루트와 캠프지를 찾아낼 수 있는 오사무 다나베 원정대와 협공을 펼쳤기 때문이라는 게 당시 등반대원들의 말이다. 한국 등반대가 초등을 노렸던 에베레스트 동북릉도 1995년 겨울 일본 등반대에 의해 이루어졌다.


1996년 경기 침체 이후 젊은층의 8,000m 고봉 원정 위축


무산소·고난도 루트의 알파인 등반을 추구하며 14개 거봉 완등을 노리는 클라이머가 있었다. 1970년대 말부터 약 10년간 히말라야 등반을 왕성하게 해온 야마다 노보루(1950~1989년)는 일본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히말라야 고산 등반가였다.


그는 1978년 다울라기리(8,167m) 남동릉 신루트 초등정을 시작으로 1981년 칸첸중가(8,586m) 등정에 이어 랑탕리(7,205m)를 초등정하고 1982년 다울라기리 북서릉 신루트 초등정을 기록했다. 이어 1982년 동계 마나슬루 등정을 시도하고 이듬해 1983년 로체(8,516m)를 등정한 그는 같은 해 동계 에베레스트 등정, 1984년 인도의 맘모스통 캉리(7,516m) 초등정에 성공하고 1984~1985년 동계 안나푸르나 남벽 등반을 시도한 데 이어 1985년 K2 무산소 등정에 성공했다.


▲ 2005년 일본 등반대가 개척한 시블링 북벽 루트.

1985년 에베레스트를 무산소로 등정한 다음 그의 등반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다. 1985년 동계 마나슬루 알파인 스타일 등정에 이어 1986년 동계 마칼루 알파인 스타일 등정을 시도했고, 1987~1988년 동계 안나푸르나 남벽 초등정에 성공하는가 하면 1988년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북동릉·남동릉 횡단등반에 성공했다. 또한 같은 해에 매킨리·시샤팡마 등정에 이어 초오유 알파인 스타일 등정에도 성공한다.


히말라야에서 등반을 펼친 그 어느 등반가보다 등로주의를 추구해온 야마다 노보루는 1988년까지 동계 등정·무산소 등정·횡단등반 등 에베레스트에서만 3차례의 진기록을 내면서 9개 고봉에 올라 동양 최초의 14개 거봉 완등자가 되리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안타깝게도 1989년 매킨리에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일본은 히말라야 등반사에서 여성 산악인들의 활약도 눈부셨다. 1974년 마카세코 나오코가 마나슬루 정상에 올라 여성 최초의 8,000m 고봉 등정자가 됐고 그 다음해인 1975년에는 다베이 준코가 여성 세계 최초의 에베레스트 등정자로 등극한 데 이어 1981년 시샤팡마(8,027m)와 1996년 초오유(8,201m) 등정에 성공해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3개 고봉 등정자가 됐다.


에베레스트 여성 최고령 등정자도 일본인이 차지했다. 와타나베 다마에(72)는 2002년 당시 64세의 적잖은 나이에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섰다. 일본산악회 회원이자 50대 이후로서 히말라야 등반 경험자에게 자격이 주어지는 실버터틀(Silver Turtle) 회원인 와타나베 다마에는 마흔의 나이인 1977년 매킨리(6,194m)의 여러 루트 중 가장 어렵다는 아메리칸 다이렉트 루트로 북미 최고봉을 등정했고, 1991년부터 히말라야 고산등반에 나서 그 해 초오유(8,201m)를 시작으로 1994년 다울라기리(8,167m), 1998년 가셔브룸2봉(8,035m) 등을 등정했다.


▲ 2009년 황금피켈상을 수상한 일본팀의 카메트 남동벽 직등루트.

이렇게 노멀루트뿐 아니라 8,000m 신루트 등반에도 열중해온 일본 산악계는 1996년 잘못된 증세(增稅)정책으로 인해 경기침체가 오면서 거액이 필요한 8,000m급 원정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한국이 IMF 이후 생겨난 대량 퇴직자들 가운데 많은 경비가 드는 레포츠보다 저비용 스포츠인 등산을 즐기는 이들이 많아졌고, 또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아웃도어 생산판매업체가 활황을 맞아 모델 겸 자문역인 산악인의 해외 원정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것과는 정반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때문에 특히 경제력이 약하고 많은 원정경비를 마련하는 일이 쉽지 않은 젊은층의 8,000m급 고봉 원정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고봉 등반은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는 장·노년층의 몫이 되고 말았다. 특히 60대 이상의 실버층이 주축인 ‘실버터틀(Silver Turtle)’이 젊은 대학산악부원들과 함께 히말라야 고봉에 도전하는가 하면 일본 상업등반대의 일원으로서 고봉 등반에 나서기 시작했다. 노익장을 대표하는 산악인은 젊은 시절 모험가이자 프로 스키어로서 명성을 날렸던 미우라 유이치로(80). 그는 2000년 70세로 에베레스트를 처음 등정한 이후 2005년 75세 때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에 올랐고, 최고령(80세) 등정을 목표로 다시 한 번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그렇다고 일본 산악계에 히말라야 14개 거봉을 꿈꾸는 산악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일본 히말라야 고산 등반의 대부 격인 다모추 오니시(大西保·68)씨는 “다케우치 히로다카(竹內洋岳·36)가 유일하게 14개 거봉 등반을 목표로 삼고 있는 산악인으로 지난해까지 12개 고봉에 올랐다”며 “그는 에베레스트와 K2 외에는 모두 무산소나 바리에이션 루트로 정상에 올랐다”고 알려주었다. 오니시씨는 “다케우치 히로다카는 기업체의 후원 대신 지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적은 비용으로 등반을 펼치고 있는 거의 유일한 클라이머”라며 “특히 3, 4년 전부터 젊은이들은 8,000m급 고봉 등반을 거의 하지 않고 있다”고 일본 고산 등반계의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14개 완등보다는 극한의 알파인 등반에 관심 많아


이 밖에도 나주카 히데지가 2001년 다울라기리까지 9개 고봉을 등정했으나 이후 고산 등반을 하지 않고 있고, 로체 남벽 등반을 세 차례나 이끈 바 있는 오사무 다나베는 8개 고봉을 등정했으나 14개 거봉 완등에 관해서는 특별히 관심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사무 다나베는 지난해 10월 네팔 마나슬루 부근의 넴중(Nemjung·7,140m)에서 대원 3명과 함께 베이스캠프(약 6,000m)를 출발, 알파인 스타일로 2박3일 만에 서벽 등반을 성공리에 끝내기도 했다. 


다모추 오니시씨는 “1990년대 중반 경기 침체 이후 특히 젊은층의 고산 등반이 많이 줄어들고 있다”며 “약 3년 전부터 젊은 고산등반가들은 바리에이션 루트를 통한 고봉 등반이나 6,000~7,000m 중량급 고산에서의 고난도 거벽등반, 바리에이션 루트 등반에 몰입하고 있다”고 일본 고산등반계의 분위기를 전해주었다.


5월 중순 인수봉 가이드 등반을 위해 방한한 야스무라 준(安村淳·63)씨는 일본 산악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으로 고산거벽 알파인 단독등반가인 야마노이 야스시(山野井泰史)를 꼽았다.


고교 졸업 후 미국 요세미티국립공원에서 지내며 거벽등반에 몰입한 야마노이 야스시는 엘캐피탄 라킹피어를 단독 제3등하는 등 요세미티에서 거벽등반기술을 습득하고 유럽알프스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드루 서벽 프렌치 다이렉트 루트를 역시 단독으로 오른 뒤 마터호른 북벽을 등반하고 1988년에는 배핀섬의 표고차 1,400m 거벽 톨 서벽을 등반했다. 이후 히말라야로 진출한 야마노이 야스시는 1992년 아마다블람 서벽 동계시즌 단독초등에 성공한 뒤 1994년 초오유 남서벽를 신루트로 단독등정하고, 1998년 쿠슘캉구루 동벽을 21시간에 신루트 단독초등해냈다.


1993년 가셔브룸Ⅳ봉 동벽, 1996년 마칼루 서벽과 가우리상카 북벽 등 21세기 세계 산악계의 과제라 불리는 거벽들에 단독으로 도전해온 그는 2002년 삶의 동반자이자 산악 동료인 부인 다에코와 갸충캉(7,922m) 북벽을 등반하던 중 눈사태를 만나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잃기도 했다. 재활치료 후 여전히 그는 오지의 벽을 찾아 등반하고 있다.


▲ 오사무 다나베

다모츠 오니시씨와 마찬가지로 야스무라 준씨 역시 “일본에서는 히말라야 등반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다”고 전해주었다. 야스무라 준씨는 “우리나라의 일반인들은 모험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며 “때문에 다케우치 히로다카가 14개 거봉을 완등한다 하더라도 일부 전문산악인 외에는 반응이 별로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9년 일본의 2개 팀이 황금피켈상 수상


지난 2월 초 일본 나가노현 야치카다케 아이스 푸도에서 열린 극한고산등반을 추구하는 클라이머들의 모임인 윈터 클라이머스 미팅(Winter Climbers Meeting)에 참석한 바 있는 김형일(K2익스트림팀장)씨는 “‘위험한 녀석들’이란 의미의 ‘기리기리보이스’ 소속 회원들과 지난해 카메트 남동벽 등반으로 여성 최초의 황금피켈상 수상자가 된 케이 다니구치와 카란카 북벽 등반으로 황금피켈상을 받은 클라이머 등을 통해 일본 클라이머들의 고산거벽 등반 수준과 열정이 뜨겁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며 “그런 첨단 클라이머들 덕분에 초등과 바리에이션 루트를 통한 등반을 추구해온 일본의 고산 등반 정신이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고 말했다.


▲ 2009년 황금피켈 수상자들. 가운데 3명이 카메트 남동벽 및 카란카 북벽 등반으로 이 상을 받은 일본의 남녀 클라이머들이다.

가셔브룸5봉 북서벽 등반을 위해 6월 8일 출국한 김형일씨는 “일본의 첨단 등반가들은 장비점에 근무하면서 등반 시즌에는 휴직이나 휴가를 내고 알래스카나 히말라야 오지로 등반에 나선다”며 “지난해 인도히말라야의 카란카 등반으로 황금피켈상을 받은 세 클라이머 가운데 아마노 카주아키는 올해도 북미 알래스카의 4,000m대 고난도 혼합벽을 등반했고, 이치무라와 사토 유스케는 20회가 넘는 도전에도 아직까지 미등봉으로 남아 있는 라톡1봉(7,132m) 북벽을 등반하기 위해 6월 초 파키스탄 히말라야를 찾을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4월 29일 칸첸중가(8,586m) 등정에 성공, 8,000m급 11개 고봉 무산소 등정을 기록한 김창호(서울시립대 OB·몽벨 자문위원)씨는 “일본은 8,000m급 고봉 등반 열기가 식었다기보다 젊은층의 6,000~7,000m급 고난도 알파인 등반과 중장년이나 노년층의 8,000m급 등반으로 양분화된 상황”이라며 “어쨌든 일본의 젊은 클라이머들이 6,000m급 산에서 어떤 기록적인 등반을 해내더라도 야마다 노보루나 야마노이 야스시 같은 클라이머들이 해낸 8,000m 고봉 등반과는 비교도 될 수 없고, 일부 젊은층의 고난도 등반으로 인해 선배 산악인들의 등반이 폄하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 2007년 로체 남벽 등반을 마치고 방한, 인수봉 정상에 오른 오사무 다나베(왼쪽).

세계의 등반사나 다름없는 <알피니스트 도전의 역사>를 펴낸 바 있는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교장은 “일본은 패전의 아픔을 치유하고자 한국동란을 통해 얻어들인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마나슬루 초등을 위해 국가적인 지원을 했었으나 이제 일반인들의 등반에 대한 열기는 많이 식은 상태”라며 “그렇지만 소수이긴 해도 골수 클라이머들의 첨예한 등반은 세계적인 수준”이라고 알려주었다. 또 이용대 교장은 “우리도 소수의 클라이머들이 시도를 하고 있지만 일본의 전문산악인들처럼 8,000m 고봉도 노멀루트 등반에서 벗어나 알파인 스타일이나 거벽 등반 같은 현대 등반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글 한필석 부장 pshan@chosun.com


출처: http://san.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7/08/2010070801289.html

 

 

 

출처 : 스포츠일반 토론방
글쓴이 : 조디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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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악 칼럼 | 젊은 산악인들과의 대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 글·김영도 전 대한산악연맹 회장
고전을 통한 알피니즘을 추구하는 젊은 산악인들과의 만남

우리는 이따금 만난다. 그리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이야기가 언제나 새롭고 색다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라는 것은 대한산악연맹 실무자 중 한 사람인 여성 산악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한때 앞서가던 유명 산악회의 정예 멤버이다. 모두 현역 클라이머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굳이 그들의 이름은 밝히지 않겠다.


나는 그들을 좋아해서 자주 만나는데 그때마다 우리 이야기는 새롭고 신선하다. 좀체 듣기 어려운 화제가 나와 서로 즐거워한다.


그들은 멀리 원정을 다녀온 일이 없으나 지구상 고봉들을 잘 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으로 이름난 산악인들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이런 일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우리 이야기는 언제나 물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다.


여성 산악인은 근자에 더그 스코트가 에베레스트를 산악인의 산으로 다시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 4월, 에베레스트 아이스폴에서 루트 공작 중 셰르파 16명이 몰사한 사건과 관련해서 나온 이야기다. 그녀는 UAAA(아시아산악연맹)에서 모금해서 슬픔에 빠져 있는 셰르파 유족들을 돕기로 했다고도 했다.


다른 한 친구는 지난날, 직장에서 장기휴가를 얻어 유럽 알프스 샤모니를 중심으로 4,000m 고봉을 열 개나 오른 보기 드문 알짜 클라이머인데, 얼마 전 일본 NHK방송에서 산악인 마키 유코 이야기를 듣고, 그의 등반기를 읽고 싶다고 했다. 세상에 이런 클라이머가 있는가 싶었다.


마키 유코(有恒)는 1921년 알프스 3대 북벽의 하나인 아이거의 동산릉(東山稜·미텔레기릉)을 초등하고, 일본에서 모던 알피니즘 바람을 일으켰으며, 1956년 히말라야 자이언트의 하나인 마나슬루 초등을 해낸 원정대 대장이었다. 그의 등반기 〈산행(山行)〉은 일본 산서의 고전 중 하나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여성 산악인은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 인문학(人文學) 바람이 일고 있다고 색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디지털 사회, 과학 만능시대에 대학에서 순수 인문학과가 폐강되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무슨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런데 최근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뽑을 때 책을 많이 본 젊은이들을 우대한다며, 출판사가 이에 맞춰 값싸고 손싼 문고판 출간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들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화제가 더욱 새로운 방향으로 벌어져 마냥 즐거웠다. 그 옛날 한국산악회가 산악문고를 여러 권 냈던 적이 있는데, 이제 대한산악연맹에서는 지금의 여세를 몰아 유명 산악도서를 내는 새로운 활동을 벌여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독일산악연맹이 그런 사업을 한 지는 오래며, 나는 그들이 낸 책으로 가스통 레뷔파의 <별과 눈보라>, 앨버트 F. 머메리의 <알프스에서 카프카즈로> 등 여러 고전들을 가지고 있다.


일본산악회는 창립70주년 기념사업으로, 1975년 일본의 산악명저를 수십 권 복간(復刊) 아닌 복각(復刻)으로 호화 출판한 일이 있다. 우리나라 한국산악회가 머지 않아 창립70년을 맞는데, 나는 그것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신경이 쓰인다.


일본 방송을 듣고 그 속에 나오는 저명한 역사적 산악인이 그 옛날 아이거의 동산릉을 오른 이야기가 궁금하다는 그 클라이머는, 지난날 샤모니의 침봉 중 하나인 당 뒤 제앙을 오르며, 1880년 머메리가 시등하며 ‘By fair means’로는 절대 오를 수 없다고 한 그 일화를 생각했다. 그런 클라이머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는 아이거 동산릉 초등기가 다행히 내게 있어, 나는 바로 우리말로 옮겨 그에게 주고 싶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이상한 바람이 불고 있다. 등산복이 일반 캐주얼화되었는가 하면, 산에 가는 사람이 거리에 넘쳐흐른다. 차림들이 제법이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등산책은 고사하고 다달이 나오는 산악 잡지라도 제대로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난데없이 스콜을 맞는 듯해 기분이 상쾌하다


우리는 모이면 늘 산과 산악계 이야기를 한다. 히말라야 고봉을 누가 올랐는지도 중요하지만, 진짜 알피니스트는 어떤 사람인가 이야기하며, 또한 등산의 내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 때 으레 나오는 사람이 있다. 장년의 클라이머로서 아이거를 몇 차례나 간 이야기며, 평소 산 잡지 편집 일을 하는 사람이 그와 함께 아이거에 갔던 이야기다. 모두가 조용한 인생들인데 그들의 산행이 이처럼 예외적이니 그저 놀랄 따름이다. 나는 알피니스트의 원형을 보는 듯싶어 그들을 생각하면 언제나 기분이 좋다.


세상이 너무 발달해서 어느새 지구상에는 더 오를 곳이 없어진 지 오래다. 여기에 우리나라도 형편이 많이 나아졌다고 산악인들의 행동 범위가 날로 넓어지고 있다. 한때 환상적인 세계라던 남미 파타고니아나 알프스 돌로미테의 드라이 친넨까지도 클라이머들이 마음대로 오가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하던 이야기다.


그런데 언제나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 기우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이런 양적 발전에 비해 질적인 면은 어떤가 하는 것이다. 겉으로는 화려한데 속이 비어 있다면 그것은 문제다. 쉽게 말해서 산악인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등산세계를 얼마나 알고 있으며, 알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샤모니 침봉군을 오르며 그곳에 얽힌 유명한 고사(故事)를 머리에 떠올리고, 외국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된 유명 알피니스트에 대해 더욱 깊이 알고 싶다는 그 산악인이 너무나 돋보였다.


앞서 말한 여성 산악인은 알프스 화가로 유명한 이탈리아 지오반니 세간티니의 평전을 구하려고 스위스 산촌인 징크트 모리츠까지 두 번이나 찾아갔다. 거기 세간티니미술관이 있기 때문이다. 세간티니는 산악인은 아니었지만 알프스 화가로 독보적인 존재로, 그의 미술관 이야기는 거의 100년 전 일본 신문에 소개되기도 했다.


20세기 초엽의 아이거 동산릉 등반 이야기도 그렇다. 영국이 에베레스트 원정에 나서기도 전 이야기인데, 그 등반에 관심을 가지는 클라이머가 있으니 얼마나 멋진가. 새삼 등산이란 무엇이며, 우리는 왜 산에 오르는지 물을 것도 없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답은 언제나 유보되어 있고 미결로 남아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날벼락 같은 일로 엄청난 곤궁에 빠져 있다. 나라 전체가 격분하고 비통 속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런 끝이 보이지 않는 암담한 속에서 산친구들과 만나 새로운 화제로 순간이나마 숨통이 트이고 사는 보람을 느꼈다. 나 자신은 의·식·주의 이동이라는 등산 무대와 멀리 살고 있지만, 등산은 스포츠가 아니라 삶의 방법이라는 누구의 말을 새삼 생각하며, 등산가로서 노후의 생활이 결코 외롭지 않고 무기력하지 않으며, 여전히 내일이 있는 것을 느끼고 있다. 이것은 주변에 멋진 젊은 산악인들이 있어 나에게 한층 힘을 실어 주기 때문이다.


책이 안 팔려 출판계가 울상이라는데, 어느 산악인이 자기 책이 새로 나왔다며 보내 주는가 하면, 새로 산악도서 출판 일을 시작한 장년의 클라이머가, 내가 옮긴 라인홀트 메스너의 〈세로토레〉가 곧 나온다고 알려 왔다. 답답한 이 여름철 무더위 속에, 난데없이 스콜을 맞는 듯해 기분이 상쾌하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있지만, 사실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있다. 무슨 일이나 생각하기에 달려 있다는 것이 생활인으로서 나의 지론이고 신념인데, 그런 생활의 탄력을 나는 요새 만난 두 젊은이와의 대화에서 다시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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