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기생 앵무의 겨레 사랑을 기리는 뜻
이선민 기자 |
2017/01/17 03:04
구한(舊韓)말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대구 거상(巨商) 서상돈이 낸 성금과 같은 액수인 100원을 내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앵무라는 기생이 있었다. 앵무는 "국채보상은 국민 의무이거늘 여자로서 감히 남자보다 한 푼이라도 더 낼 수 없으니 누구든지 기천원을 출연하면 나도 그만큼 출연하겠다"며 기염을 토했다. 1907년 2월 6일 대한매일신보에 실린 이 기사는 한국 근대사에서 여성의 남성에 대한 최초의 공개 도전이면서 남성들의 통 큰 기부를 자극하고 국채보상운동에 여성의 참여, 특히 전국 기생들의 참여를 촉발한 역사 속의 천둥소리였다.
우리는 국채보상운동의 발상지인 대구에 국채보상기념관을 건립하면서 전시실에 특별히 '앵무 코너'를 설치해 앵무 모습의 젊은 여인이 한복 차림으로 서슬 푸르게 앉아 위에 인용한 말을 하는 당찬 모습의 좌상(坐像)을 연출해 놓았다. 그리고 수수께끼 같은 기생 앵무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신통한 소식은 없었다. 다만 대구의 유명한 올곧은 기생으로 한문·시·가무에 능했다는 것, 관기(官妓)였다가 달성 권번의 초대회장을 지냈다는 것, 성이 염씨로 염농산으로 불렸다는 것(농산이란 앵무새가 많이 사는 전설의 산을 일컫는다고 한다), 대구의 서화가 서병오, 달성공원과 함께 '대구 삼절'로 거명되기도 했다는 것 등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몇 년 뒤,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의 한 농민으로부터 "우리 집 옆에 앵무비(碑)가 있다"는 제보를 받았다. 한달음에 달려가 보니 비석은 시멘트 계단 위에 낮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비각 기둥의 주춧돌도 남아 있었다. 비석 앞면에는 '염농산제언공덕비'라 새겨져 있었고 양옆에는 한문으로 비문이 새겨져 있었다. 한쪽 구석에 제를 지낸 촛대와 향로가 있는 것을 보면 매년 제사를 지냈다는 이야기였다.
이 비각을 이곳 사람들은 '앵무빗집'이라 부른다. 비석 뒷면에 비석을 세운 때가 '기미 5월 5일'이라고 했으니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해다. 그 뒤 성주군지에서 '앵무의 출생은 1889년, 사망은 1946년'으로 확인했다. 국채보상운동 때 100원을 기부한 것은 18세 때의 일이었다.
성주군 용암면 들판은 해마다 홍수가 나면 큰물이 논밭을 휩쓸어가서 피해가 막대했다. 반대로 가뭄이 들면 온 들판이 타들어 갔다. 사정을 들은 앵무는 거액을 들여 제방을 쌓아 개울을 만들었다. 두리방천이다. 이 제방이 완성된 날 앵무는 직접 참석해 학춤을 추었다. 30세 때였다. 두리방천의 물은 농업용수가 되었다. 이렇게 생긴 들을 앵무들이라고 불렀다. 앵무들에서 농사짓고 사는 농민들이 뜻을 모아 앵무비를 세웠다는 것이다. 양반골 성주에서 고을 원님보다도 그녀를 칭송했다고 한다.
앵무는 판소리 보급에도 앞장서 대구가 경상도 판소리의 중심이 되었다. 명창 박녹주도 이 무렵 앵무에게 판소리를 사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평소 후배 기생들에게 "기생은 돈 많은 사람만 섬겨서는 안 된다. 만신창이가 된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친일파 관찰사인 박중양이 유서 깊은 대구읍성과 객사 태평관을 없애려 하자 이를 반대하는 농성운동도 벌였다. 독립 만세를 외쳤던 기생조합 사건의 배후로 앵무가 지목됐다고 한다. 상해 임정에 독립운동자금을 보내는 비밀창구 역할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앵무 기념행사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슬슬 나올 무렵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알려졌다. 1930년대 후반 대구의 유서 깊은 사학인 교남학교가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리자 지역사회에서 교남학교 살리기 운동이 벌어졌다. 이때 앵무는 전 재산의 절반인 2만원을 내어놓았다. 앵무를 비롯한 기부자들 덕에 교남학교는 위기를 극복하고 대구의 명문 대륜고등학교로 성장하게 됐다. 앵무는 그 후 아동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부금을 쾌척했다. 당시 신문은 '염농산 김울산 두 여사가 교육사업에 몸을 던져 만장부가 하지 못한 일을 능히 함으로써 수전노 제씨의 심장을 자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광복 이듬해였다. 앵무들 한 연못에 학 한 마리가 춤추듯 물속에 내렸다가 하늘 높이 올라가 사라졌다. 앵무가 제방을 중수하던 날 학춤을 추었던 곳에서 멀지 않은 연못이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겨 가보니 앵무가 흰옷을 입고 물에 빠져 있더라는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장사 지내고 인근 야산에 고이 묻어 주었다. 그녀 58세 때의 일이었다. 그 초라한 무덤을 그 지역의 나이 많은 분들은 희미하게 '앵무미(뫼)'로 기억하고 있다.
20세기 전반 역사의 암흑기를 때로는 논개 같고 때로는 만덕 같은 모습으로 살다 간 그녀로부터 영롱한 빛을 그렇게도 많이 받고도 우리 근현대사는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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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 [師事] - 스승으로 섬김. 또는 스승으로 섬겨 가르침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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