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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門에서 광화문을 본다

도깨비-1 2014. 12. 30.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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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門에서 광화문을 본다

 

親서방 안보와 자본주의로 공산黨 위헌 해산 주도하며 라인 강 기적 만든 아데나워…

특별稅로 통일 밑천도 쌓아
새해로 남북 분단 70년 맞는 우리 통일 준비는 어떠한가

 

입력 : 2014.12.30 03:04 / 조선일보

문갑식 선임기자
독일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문(門)은 원래 왕궁의 출입구였다. 용도나 영욕(榮辱)의 역사가 우리나라 광화문과 비슷하다. 17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당대 최고의 건축가인 카를 고트하르트 랑간스에게 개축(改築)을 지시한 이유가 있었다.

1757년 프러시아는 석 달 사이 프랑스·오스트리아·러시아와 연달아 싸웠다. 예상을 깨고 프러시아가 버텼다. 감격한 빌헬름 2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대제(大帝)는 "이것은 브란덴부르크 가문(家門)의 기적"이라고 외쳤다.

독일 역사를 보는 키워드는 '반목'과 '분열'이다. 캐나다 사학자 마틴 키친에 따르면 1789년 독일에는 1789개의 '나라'가 있었다. 주민이 몇 명 안 되는 마을 촌장(村長)까지 별의별 벼슬을 자처했을 만큼 엉망이었다. 변방(邊方) 프러시아가 이런 아수라장에서 2대(代) 만에 우뚝 섰으니 빌헬름 2세는 2년 전 죽은 아버지를 추모할 겸 자기 업적도 과시할 상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문은 1791년 완공 후 황제의 염원을 벗어났다. 1806년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문 위에 놓인 승리의 여신 마차상(像)을 프랑스로 떼갔다. 8년 만에 겨우 되찾아왔더니 1919년에는 에베르트 대통령이 1차 세계대전에 져서 풀이 죽은 제국군(軍)을 그 문에서 맞았다. 1933년 나치당원이 행진하던 문은 1945년 연합군의 군홧발에 만신창이가 됐다. 브란덴부르크문의 팔자(八字)는 곧 독일의 현실이었다. 2차 세계대전 뒤 독일도, 수도 베를린도 미·영·불·러시아에 사분(四分)됐다.

전전(戰前) 쾰른시장으로 있다가 히틀러에게 쫓겨난 콘라트 아데나워(1876~1967)가 1949년 이 한심한 나라의 총리가 됐다. 36년 만에 일본에서 나라를 되찾은 대한민국의 건국 대통령 이승만과 그의 심경은 비슷했을 것이다. 아데나워가 정권을 잡았을 때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이렇게 비아냥댔다. "독일인은 남을 제압하려거나 아니면 군말 없이 복종하지요." 우리라면 부득부득 이를 갈며 욕하다가 금세 잊었겠지만 아데나워는 교훈을 얻었다. 힘없는 패전국이 사는 길은 주위에서 인정받아 동등한 대접을 받는 것, 그게 아데나워의 신념이었다.

1949년 연합국이 독일 최대의 탄광인 루르를 탐내자 아데나워는 공동관할을 약속하는 페테르부르크 협약에 조인했다. 독일 사민당은 "아데나워는 연합국 총리"라고 비판했다. 1950년 아데나워는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의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제안도 수용했다. 우리라면 아데나워를 나라를 판 매국노로 매장했을 것이다.

재무장(再武裝)을 놓고도 아데나워는 독일 사민당·공산당과 충돌했다. 야당은 "군대는 필요 없으며 청년들이 입대할 이유도 없다"고 했다. 열광한 학생들을 품에 안은 야당은 한술 더 떠서 "중립국이 되자"고 주장했다. 소련의 스탈린까지 "그 방식이 통일하는 지름길"이라며 유혹해왔다. 하지만 노(老)총리의 생각은 달랐다. "안보를 남에게 맡길 수는 없다. 다만 아직도 독일을 두려워하는 주변국들을 배려해 친(親)서방 진영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

[문갑식의 세상읽기] 브란덴부르크門에서 광화문을 본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아데나워는 연방헌법재판소에 재무장 반대를 고집한 공산당에 대한 위헌심판을 청구했다. 독일 헌재는 1956년 공산당 해산 결정을 내렸다. 1952년 나치즘을 잇겠다는 사회주의제국당에 이어 두 번째 정당 해산이었다.

역사가들은 그때 아데나워가 야당에 굴복했거나 독버섯을 놔뒀다면 독일이 공산주의에 물들고 주변국에 외면당했을 것으로 본다. 여기서 우리는 순진한 구호가 난무했던 광복 직후와 요즘 한국의 혼란상을 떠올려야 한다.

아데나워는 경제정책에서도 철저한 자본주의 논리를 지켰다. 야당은 분배를 주장했지만 결국 선두군(群)의 성장이 모두의 부(富)를 늘렸다. 우리가 쉽게 말하는 '라인강의 기적'엔 이런 투쟁의 이면이 있었던 것이다. 아데나워가 1953년 전쟁 배상금을 갚고 독일을 유럽 최대의 경제국으로 만들고 나서야 독일 사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포기했다.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 채택이 그것이다.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데 10년이 걸린 것이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무너져 브란덴부르크문이 동독(東獨) 주민에게 열렸을 때 독일은 통일 준비가 허술했다는 게 정설이다. 그런 독일이 기회를 잡은 건 훈련이 잘된 복서가 본능적으로 카운터펀치를 뻗는 것과 같다. 독일은 통일 전 100억달러의 기금이 금고 속에 있었다. 그 기원은 아데나워가 유대인 등 전쟁 피해 보상자를 위해 만든 특별세였다. 이런 선례가 있었기에 독일 정부와 국민은 통일 후 즉각 재원 수단을 가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새해를 맞으며 70년 전 남북 분단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독일처럼 한·미·일 동맹을 강화하고 중국·러시아를 설득할 능력을 갖췄는지, 아니면 "왜 반대하느냐"고 감정적인 '강짜'나 부리다가 끝날지 궁금하다. 우리 집권당과 야당과 국민의 통일 준비는 돼 있는 걸까? 여전히 북한을 동경하는 정신 못 차린 집단과 주책없이 돌출하는 자칭 '통일전사(戰士)'들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광화문의 현실을 보노라면 희망보다 절망이 앞선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