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네가 있어 내가 있다

도깨비-1 2014. 10. 29. 09:49

 ESSAY 이 카테고리의 다른 기사보기

 네가 있어 내가 있다

입력 : 2014.10.29 05:54 / 조선일보


惺全(성전)스님·남해 염불암 주지


 

모든 것이 關係로 맺어져 있는데 당연한 듯 세상 만물 허비하는 건
生命의 진리를 체득 못했기 때문… 소비 대신 保存이 절실한 이 시대
이기심 버리고 共感·利他 힘쓰면 온 생명과 평화롭게 共存할 텐데

 

강원도 평창에서 열린 2014년 생물다양성협약 당사국 총회를 즈음해서 마련된 '생물 다양성을 바라보는 불교의 생명 가치' 워크숍에 참석하느라 월정사에 갔다. 달빛이 환하게 내리고 싸한 대기가 강원도 산골임을 말해 주고 있었다. 참가자들은 '불교 생명 선언, 어떻게 할 것인가'를 주제로 분과 토론회를 하고 있었다. 종단과 사찰과 단체와 불자(佛子)는 불교 생명 선언을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가. 단위별로 많은 안이 나왔다. 생명 평화 교육을 통한 인식 전환, 친(親)환경 건축, 걷기 등 모두 공존(共存)을 위한 최소한의 것들이었다.

불교는 그 어떤 것도 독자적으로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이 관계성(關係性)의 산물이라고 정의한다. 지금 우리에게 생물 다양성이 문제되는 것은 생물의 다양성이 유지되지 않으면 온전히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물을 이용 가치가 아니라 생명의 가치로 보는 인식의 전환을 위하여 불교적 생명관과 생명 윤리가 절실한 것이다. "모든 생명은 우주적 존재입니다. 모든 생명은 평등한 존재입니다. 생명을 지키는 평화의 문화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인간은 모든 생명의 평화에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날 우리가 채택한 '생명 평화를 위한 평창 불교 선언' 내용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수없이 많은 것의 도움으로 가능하다. 티끌 같은 생명도 사실은 온 우주의 합작품이다. 물이 있어 살아가고, 공기가 있어 숨을 쉰다. 바로 보면 그 모든 것이 고마울 뿐이다. 나의 은사 스님은 다음과 같은 열반 게(偈)를 남기고 열반에 드셨다. "이 세상 저 세상을 오고 감을 상관치 않으나 다만 받은 은혜는 바다와 같은데 갚은 바는 시내와 같아 그것을 못내 아쉬워하노라."

한 생(生)을 청빈하게 살다 가신 은사 스님에게도 세상은 이렇게 고맙고도 미안한 곳이기만 했다. 그 게송을 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을 향해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고 있는지 묻게 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한 듯이 모든 것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자신을 성찰하게 된다. 마치 원래부터 내 것인 양 소비하는 내 삶의 자세에는 감사함이 없다. 그것은 생명의 진리를 온몸으로 체득하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도(道)란 어쩌면 생명의 상관성을 온몸으로 깨닫는 것이고, 어리석음이란 생명의 상관성에 무지한 것을 말하는 것인지 모른다. 대량 소비 시대를 사는 우리는 모두 도(道)와는 먼 삶을 산다고 말할 수도 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우리가 사는 사회는 앞으로 소비 사회에서 보존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구상 모든 자원은 한계가 있고 생물의 종(種) 역시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존에 온 힘을 기울이지 않으면 인간 삶의 토대가 무너질 수 있다는 심각한 경보가 지구 여러 곳에서 울리고 있다. 관계성의 철학이기도 한 불교가 주목받는 이유이다. 이제 세상은 이기심을 넘은 공감(共感)과 이타(利他)의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해졌다. 그것은 곧 생명의 가치에 눈뜨는 일이기도 하다.

얼마 전 우리 절 아래 바닷가 길을 따라 걸어오는데 어장(漁場) 주인이 소리쳐 물었다. "스님, 제가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고 있는데 다음에 좋은 세상에 태어날 수 있을까요?" 나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네, 그런 마음이라면 다음 생에 반드시 좋은 세상에 태어나게 될 겁니다." 그는 안심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머리 숙여 인사하며 고맙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행위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성찰하는 사람은 지나치게 행동하지 않는다. 욕심을 제어할 줄 알기 때문이다. 그는 고기를 잡아도 치어(稚魚)는 다시 바다에 놓아줄 줄 아는 사람일 것이다. 그 놓아줌 한 번이 생태계의 균형을 잡는 일이고 생물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알까. 성찰은 이렇게 아름다운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상관성을 말하고 생명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 막연한 이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날 참석한 불교 윤리학자도 나와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하지만 그날 사회를 보았던 스님의 한마디는 우리의 회의적 발언에 마침표를 찍었다. "물 한 방울로 사막 모두를 적실 수는 없지만 그 한 방울을 빼고는 사막을 다 적실 수 없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변화는 언제나 작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토론회를 마치고 도량에 나서자 보름달이 환했다. 월정사 주지 스님이 습도가 가장 낮은 지역의 습기에 젖지 않은 달빛에 관해 말했다. 달빛이 상큼했다. 자기 중심의 이기심은 습기(濕氣)와 같은 것이다, 이 습기와 같은 이기심을 버리면 우리는 모든 생명과 함께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다. 부처가 본 세상은 바로 생명 평화의 세상이 아니었던가. 부처가 본 "네가 있어 내가 존재한다"는 세상이 환한 달빛 아래서 내게도 보이는 것만 같았다.

惺全 | 스님·남해 염불암 주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