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자료

[스크랩] 정명론(正名論)의 명실(名實)관계에 대한 고찰 ?

도깨비-1 2014. 7. 29. 17:04

.

 

 

새한철학회 논문집

철학논총 제32집 2003․제2권

 

 

 

정명론(正名論)의 명실(名實)관계에 대한 고찰

 

이 장 희

 

 

[한글 요약]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은 그 규범적, 수행적 성격으로 말미암아 종종 명(名) 개념의 주관성이 강조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순자의 정명론도 “약정속성(約定俗成)”이란 명제에 기반한 ‘관습주의적’ 성향성으로 말미암아 이름 제정의 근거는 자의적 해석에 따른 ‘전통주의’ 이상의 합리적 근거가 없는 것처럼 지적되었다. 이 논문은 이상과 같은 해석의 바탕이 된 원문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공자와 순자의 정명론에 함축된 명실론적(名實論的) 측면을 재검토하였다.

 

공자와 순자의 정명론에 내재한 명실론적 측면에 대한 재분석은 우리로 하여금 공자 정명론이 지니는 규범적 성격이 실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자의 실(實)에 대한 인식의 바탕 위에 서 있음을 보게 하였다. 순자의 ‘약정속성’의 명제는 한편으로 순자의 명 개념이 일정한 관습주의적 성향을 보여 주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 그의 ‘좋은 이름(善名)’에 대한 주장은 ‘제명(制名)’의 논리가 자의적 ‘전통주의’로 흐르지 않고 실에 바탕한 객관적 합리성에 기반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주제분야 : 선진철학, 명학(名學), 유가철학

주 제 어 : 정명(正名), 명실(名實), 관습주의, 유명론, 예(禮)

 

 

1. 들어가는 말

 

서양철학사에서 언어가 지닌 ‘비언어적(illocutionary)’ 또는 ‘수행적(perfor- mative)’ 측면은 20세기 중반에 J. L. Austin에 의해서 부각된 후1]에야 비로소 활발한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비해 중국철학사에서는 최초의 철학자라 할 수 있는 공자에서부터 이미 언어의 수행적 측면은 언어의 기능 중 가장 중요한 요소로 인식되었다.2] 언어에는 단순히 객관 대상을 지시하는 기능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지시 대상으로 하여금 그 이름에 걸 맞는 실질을 갖추도록 요구하는 수행적 성격이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이론이 공자의 ‘정명론(正名論)’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의 정명론은 공자 이후의 선진철학사에서 언어의 성격과 한계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 논의의 기점적 역할을 하였다. 노자의 유명한 “도가도, 비상도(道可道非常道). 명가명, 비상명(名可名非常名)”은 도(道)가 정명론적 논의의 틀을 통해서는 파악될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천명함으로써 도가의 철학적 입장을 유가와 대비시킨 대표적 구절로 이해할 수 있다. 논변학파등을 통해 전개된 ‘명실론(名實論)’은 정명론에 함축된 언어와 지시 대상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여러 각도에서 발전시킴으로써 선진 제가의 철학적 입장의 차이를 보다 깊이 있는 인식론적 형이상학적 지반 위에 올려 놓았다.

 

이 논문에서 중점적으로 다룰 순자의 ’정명론‘은 공자 이후의 이처럼 다기한 정명론의 전개과정을 나름대로 종합한 이론이다. 순자의 정명론에서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간주되는 “약정속성(約定俗成)”이란 명제는 이러한 선진철학사의 흐름에서 언어와 세계의 관계에 대해 ‘유명론적(nominalist)’ 또는 ‘관습주의적(conventionalist)’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흔히 이해된다.

“약정속성”이 언어는 인간들의 약속에 따라 관습적으로 정해지는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해될 때, 이는 언어와 지시 대상과의 관계 사이에 그 어떤 필연성도 상정하지 않는 관습주의적 입장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러나 순자의 언어관이 어떤 종류의 관습주의를 내포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보다 세심한 논의를 필요로 한다.

 

이미 지적한 대로 공자의 정명론은 이름의 담지자로 하여금 일정한 규범적 성격을 가지도록 요구하는 수행적 성격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순자의 정명론을 관습주의적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공자의 충실한 계승자로 자처하는 순자가 언어에 대한 관습주의적 입장이 언어의 수행적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줄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이 된다. 선진시대의 명(名)에 대한 인식이 예(禮)와 밀접한 연관성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러한 해석에 대한 정밀한 검토는 한층 더 긴요하게 여겨진다. 3]

관습주의적이란 말의 의미를 언어가 단순히 인간의 관습적 자의성의 테두리 안에서 결정된다는 말로 이해한다면 이는 곧 예도 인간의 관습적 자의성의 테두리 안에 머무는 것으로 이해할 있기 때문이다.

순자와 같이 예를 유가 윤리의 중심적 개념으로 강조했던 철학자가 언어의 성격에 대해 단지 관습주의적 관점을 주장하는데 만족하였다고 간주하는 것은 그 속성상 명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예도 임의적인 관습적 규범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질 위험을 순자가 감수했다는 말이 된다.

본 논문은 순자 정명론이 언어에 대해서 관습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면 그 관습주의적이라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제한적으로 이해할 때 순자의 입장을 보다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이러한 논의의 출발점으로서 공자의 정명론이 명과 실(實)에 대하여 어떠한 관계를 함축적으로 암시하는 지를 다루는 것은 순자의 정명론이 공자의 입장을 어떤식으로 계승하고자 하였는지를 살펴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1]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2] 공자의 예(禮)적 언어가 지닌 수행적 성격을 ‘수행적 언술(performative utterance)'이란 Austin의 개념을 빌려와 최초로 분석한 이는 Herbert Fingarette이다. Herbert Fingarette, Confucius - The Secular as Sacred (New York: Harper Torchbooks, 1972).

3]윤무학은 공자의 정명론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명(名)과 위(位)와 예(禮)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예와 명.위가 상합하는 것이 정치상의 질서이며 그렇지 않으면 곧 그 질서가 존중되지 않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윤무학, 『中國哲學 方法論』(한울아카데미 1999), 15쪽.

 

 

2. 공자의 정명론

 

공자의 정명론은 기본적으로 정치철학적 색채가 짙은 논의이다. 제나라 경공이 정치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는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4] 라고 답한다. 일반적으로 이 구절은 공자의 정명이 의미하는 바를 가장 잘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 군과 신, 부와 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 이름의 담지자들이 행위하고 덕을 갖출려고 노력한다면 정치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정명(正名)’은 이름(名)을 바르게(正) 하는 행위로서 사회적 신분과 가족 구성원 상의 역할의 강조를 통해 정치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공자의 정치이론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정명이론은 또한 명분론(名分論)으로 해석되는데, 여기서 명분이란 명이 지시하는 사회적 신분과 역할에 규범적 성격을 부여하여 이름이 단순히 사회적 실체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지시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위와 역할에 수반되는 도덕적 책임과 인격까지 내포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이에 따라 이름은 실제하는 객관 대상을 지칭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는 여기서 ‘객관 대상을 지칭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수행적(performative)’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객관 사태를 일정한 규범적 방향성에 따라 움직이도록 추동하는 역할을 언어가 수행함을 의미한다. David Hall과 Roger Ames는 공자의 정명 개념을 분석하면서 그 ‘수행적인’ 측면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4] 『論語』, 「顔淵」, 11장.

 

 

"초월적 창조주를 전제하지 않는 내재적 세계관에선 관념과 행동, 이성과 경험, 이론과 실천이 상호유기적인 관계성을 획득한다. 더 나아가 공자 철학은 개인, 사회, 국가가 상호소통을 통해 유기적으로 통합되는 비환원적이고 인간 상호간의 관계성을 바탕으로 한 인간에 대한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공자에게 이름짓기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실재에 거기에 대응하는 레벨을 적절히 붙이는 과정에 불과할 수 없다. 언어의 ‘수행적(performative)’ 힘은 세계를 언어로 해석함이 세계를 어느 특정한 방식으로 실현되고 알려지게끔 추동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세계에 얼마만큼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정도는 그 의미와 가치 그리고 목적을 상세히 드러냄으로써 타인으로부터 감화적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방식이 작용하는 정도이다. " 5]

 

이처럼 수행적 성격이 강조되는 공자의 정명론을 John Makeham은 “유명론적 규정주의(nominal prescriptivism)" 6] 라고 이름하였다. 이는 다시 말해 이름이 지니는 수행적 성격이 이름의 대상을 압도함을 의미한다. 즉 명이 실(實)에 우선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자의 정명론은 이름짓는 주체의 주관적 규범의식에 따라 그 이름의 대상인 실이 완전히 종속됨을 의미하는가?

공자 정명론의 가장 핵심적인 다음의 구절을 살펴보자.

 

5]David Hall and Roger T. Ames, Thinking Through Confuciu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272-273.

6] John Makeham, Name and Actuality in Early Chinese Though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46-49.

 

 

"자로가 말했다. “위(衛)나라의 임금이 선생님을 기다려서 함께 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선생님께서는 장차 무엇을 먼저 하시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반드시 정명(正名)을 먼저 하겠다.”

자로가 말했다. “아니 이럴 수가! 선생님의 우원함이여. 어찌 이름을 바로잡겠다는 말씀인가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칠도다 자로여. 군자는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에 관해서는 판단을 유보하는 법이다. 이름(名)이 바르지 않으면 말(言)에 순서가 없게 되고, 말에 순서가 없어지면 일(事)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악(禮樂)이 일어나지 못하며, 예악이 실행되지 못하면 형벌(刑罰)이 적절하게 시행되지 않는다. 형벌이 적절하게 시행되지 않으면, 백성들은 손과 발을 둘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이름을 바로 하면 말을 순서 있게 할 수 있고, 말을 순서 있게 하면 반드시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군자는 그 말에 구차한 바가 없을 뿐이다. " 7]

 

윗 구절에서 특기할 바는 이름(名)이 바르지 않아 말이 순조롭지 않을 뿐 아니라 일도 제대로 이루어지지도 않는 상황이란 단순히 명의 지시 대상이 사회적 신분과 역할에 한정되지 않음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명이 지시하는 바가 사회적 역할과 신분에만 한정된다면, 말의 순서와 일의 성사 나아가 예악의 흥기와 형벌의 시행에 까지 그 모두를 정명과 연관시켜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마(馬)을 마라 하고 금수(禽獸)를 금수라 하는 것과 같이 규범적 성격을 띄기 어려운 대상 모두를 포괄하여 지시하는 언어의 기능이 제대로 갖춰질 때 한해서만, 말의 순서가 바로 잡혀 손쉬운 의사소통이 이루어지고 사회의 규범적 질서가 바로 잡힐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윗 구절에 대한 보다 온당한 해석일 것이다.8]

이러한 해석을 뒷 받침하는 구절로 “고불고(觚不觚)”를 들어 보자. 9]

이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고라는 술잔을 사용하는 예법이 더 이상 지켜지지 않음을 공자가 한탄하였다는 것이고 10] 또 다른 하나는 고라는 술잔의 모양 자체가 변하며 더 이상 고라고 이름할 수 없게되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다. 11]

이 두 해석에 공통되는 것은 고라는 명칭이 지시하는 대상이 고라는 술잔 자체이던 고라는 술잔을 쓰는 예법이든간에 명칭의 함의에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자의 발언은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고불고”는 1) 이름이 지시했던 실질 또는 대상이 존재했으나, 2)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름만 남고 원래의 그 이름이 지칭하던 대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3) 그 이름이 애초에 지시했던 대상의 복원이 소망됨을 암시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공자의 정명의 바탕에는 공자에게는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객관적 실체 즉 고라는 술잔의 존재 또는 고라는 술잔의 따른 예법의 존재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자 정명론의 바탕에는 실(實)은 명이 성립하는데 필수적인 전제조건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7]『논어』, 「子路」 3장. 번역은 동양고전연구회의 『논어』(지식산업사 2002)를 참조하였다.

8]전통적으로 이 구절은 위나라의 왕인 괴첩이 그의 아버지 괴외와 권력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을 빗대어 “아버지가 아버지 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정명의 원칙으로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해결하겠다는 공자의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하지만 이미 지적한 바 대로 여기서 정명이 함축한 바를 단순히 “아버지가 아버지답고, 아들이 아들다운” 것에만 한정시키기에는 나머지 문장의 의미가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정명의 시작이 “군군신신부부자자”에서 비롯되었음은 당연한 일이겠으나, 이로부터 이름의 포괄적인 쓰임새의 정립이라는 차원으로 확대시켰다고 보는 것이 윗 구절을 비약없이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독해일 것이다.

9]『논어』, 「雍也」, 24장.

10]『論語集解義疏』, 欽定四庫全書本, 195-395에서 황간(皇侃)의 소를 보라.

11]『論語集註』 에서의 주희(朱熹)의 해석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우리는 공자의 정명론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공자의 정명론은 우선적으로 그 규범적 수행적 성격이 강조된다. 어떤 이가 아버지라 불릴 때, 아버지라고 불리는 대상은 아버지로서의 역할에 따르는 도덕적 책임감과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름의 대상이 그 이름에 따른 규범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때 인간 사회는 강압적인 제재와 형벌의 사용 없이도 평화롭게 다스려질 수 있다. 12] 이처럼 이름의 규범적 성격 또는 수행적 성격의 강조는 공자 정명론을 명실관계의 측면에서 보면 명우선적 논의로 받아들이게 한다. 하지만 명에 대한 규범적 성격의 강조가 단순히 명에 자의적이고 주관주의적 가치를 부여하여 실에 우선한다는 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명이 지칭하는 범위가 규범적 가치를 부여하기 힘든 대상도 포괄할 수 있다는 사실과 공자에게서 명의 규범적 성격은 명의 성격이 충실히 반영된 실의 존재로부터 유추되는 사실을 감안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공자의 정명론에 대한 논의에서 그것의 규범적 성격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명분론적 성격만 부각되거나, 정명론에 함축된 명실론적 측면을 논의하더라도 명 개념의 주관성이 실을 압도한다는 식으로 이해되는 경향성을 13] 경계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공자 정명론의 규범적 성격과 명 우선적 성격은 그것이 실에 대한 충분한 고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을 전제로 이해하여야 한다. 따라서 공자의 명 개념은 단순히 임의적 주관성에 기댄 것이 아니라 공자 나름의 역사와 실재 세계에 대한 인식에 바탕한 것으로 이해함이 온당할 것이다. 14]

 

12] 맹자는 이름에 따른 규범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이는 그 이름의 담지자로서의 자격이 상실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공자의 정명론을 명이 지닌 규범적 성격을 한층 더 강조하여 계승한 인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孟子』 「梁惠王下」 8장에서 걸주(桀紂)를 왕이 아니라 도적이라 부르는데서 맹자의 명 개념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다.

13] “정명의 이론 근거로 볼 때 공자의 名 개념은 결코 객관적 실재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었다.” 윤무학, 『중국철학 방법론』, 27쪽.

14]물론 공자의 명과 실에 대한 인식이 기본적으로 『주례(周禮)』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들어 공자 명실 개념이 지닌 주관성을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주례』적 규범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 춘추말기의 상황을 공자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 가치를 명에 투사하고 이에 상응하는 실을 요구했다고 공자의 정명론을 비판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점은 명에서 군(君)의 군다운 도덕성은 인(仁)과 의(義)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구현하는데 있고 이에 상응하는 실을 공자가 역사적으로 실존했다고 믿는 성왕(聖王)에서 찾는 것은 공자의 명실 개념을 단순히 임의적 주관주의적 개념으로 처리할 수 없게 만든다. 다시 말해 공자 명 개념에 내재한 규범성은 단순히 『주례』적 규범의 복고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외연이 아니며, 그 명에 상응하는 실도 최소한 공자에게는 관념적 이상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실현된 객관 실재에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공자의 명 개념과 이에 상응하는 실 개념을 단순한 시대착오적 주관주의의 산물로 보는 것은 공자의 정명론을 공자의 입장에서 충분히 고려한 평가로 보기 힘들다.

 

 

3. 순자의 정명론

 

공자 정명론은 선진 시대 제 학파에 의해 언어의 역할과 한계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촉발한 계기를 마련해 주었으며, 순자의 정명론은 이러한 다양한 논의를 유가적 입장에서 종합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순자의 정명론에서 “약정속성”의 명제는 명 또는 언어에 대한 관습주의적 입장으로, 명분론적 입장에서는 보수주의적 사회 인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되곤 한다.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공자의 정명론에 함축된 명실관계가 임의적이고 주관적인 명 개념에 실이 완전히 종속된 일방적인 명 우선적 관계가 아님을 살펴 보았다. 이러한 공자 정명론의 명실관계에 대한 함의를 염두에 두면서 순자의 정명론이 취하는 관습주의적 입장이 어떠한 명실론적 함의를 지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순자 정명론의 성격을 탐색하고자 한다. 15]

 

15]본고의 주 목적은 순자 정명론이 지니는 관습주의적 입장의 성격을 명실관계의 측면에서 다루는 것이므로 순자 정명론이 제기하는 다양한 철학적 문제들을 모두 포괄하지 않을 것이다.

 

 

1) 약정속성(約定俗成)

 

순자는 그의 “正名”편을 다음과 같이 여러 종류의 전문용어와 명칭들의 기원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한다.

 

 

"후세의 왕(後王)들이 명칭(名)을 완성시켰다. 형벌에 관한 명칭은 商나라를 따랐고, 작위에 관한 명칭은 주(周)나라를 따랐고, 문식에 관한 명칭은『周禮』를 따랐고, 만물에 붙여진 여러 가지 명칭(散名)은 중원 여러 나라의 일반적 습속을 따라 멀리 떨어진 풍속이 다른 고장에서도 통하도록 하였다. " 16]

16]『荀子』, 「正名」, “後王之成名, 刑名從商, 爵名從周, 文名從≪禮≫. 散名之加於萬物者, 則從諸夏之成俗曲期, 遠方異俗之鄕, 則因之而爲通.”

 

 

먼저 쉽게 눈에 띄는 것은 순자가 각종 이름 또는 명칭의 제정과 표준화를 후세의 왕의 업적으로 돌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先王의 업적이라 하지 않았을까?

순자가 정명론의 목적을 퇴행적 복고주의에 두었거나 기존의 정치적 사회적 질서를 합리화하고 공고히 하고자 한 데에 두었다면, 기원을 저 아득한 선왕에 두는 것이 보다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순자가 굳이 선왕을 제쳐두고 후왕의 언어 용례를 표준으로 삼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대답은 이미 위의 인용문에서부터 주어졌는지 모른다. 순자는 후왕의 ‘制名’의 기원에 대해 매우 자세히 밝히고 있다. 형법의 용어는 상대로부터, 직위작명은 주대로부터, 제반문화에 관한 용어는『周禮』로부터, 그 외의 잡다한 이름들 즉 산명(散名)은 중원의 여러 나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이는 전문용어들과 일반명사들이 역사적으로 고증하기 힘든 시대의 전설적인 성왕에 의해 제정된 것으로 상정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John Knoblock은 이러한 순자의 ‘후왕제명(後王制名)’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순자는 요순(堯舜)의 도(道)를 포기했는데 이는 아득한 옛 시대의 선왕들의 통치법은 그 자세한 바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순자가 보기에 이러한 선왕의 법과 달리 주대의 통치행태는 우리가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이었다.” 17]

순자는 주대의 관습과 규범들이 요순시대의 그것과 똑 같았다는 억지주장을 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그의 당대 군주들이 현실적으로 쉽게 차용하고 실행할 수 있는 주대의 규범과 제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음의 구절에서 순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작금의 혼란한 정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진정한 왕은 새로운 이름(新名)을 작명할 것이라 말한다.

 

“이제 성왕(聖王)들은 돌아가시어 이름(名)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고 기이한 말들이 생겨나 명칭(名)과 실물(實)이 혼란스러우며 옳고 그른 형상이 분명치 않으니, 비록 법을 지키는 관리나 올바른 가르침을 암송하는 유가라 하더라도 역시 모든 혼란스러워 한다. 만약 진정한 왕이 출현한다면 반드시 한편으로 옛 명칭을 따르고 또 다른 한편 새로운 명칭(新名)을 만들 것이다.” 18]

 

17] John Knoblock, Xunzi: A Translation and Study of the Complete Works Vol II Books 7-16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pp. 28-29.

18]『순자』 「정명」, “今聖王沒, 名守慢, 奇辭起, 名實亂, 是非之形不明, 則雖守法之吏, 誦數之儒, 亦皆亂也. 若有王者起, 必將有循於舊名, 有作於新名.”

 

 

이상의 논의와 이름(名)에는 어떤 내재적인 본질적 속성도 없다는 주장 사이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다.

 

"이름들은 마땅히 그러해야할 바가 없다. 약속에 의해 명명된 것이다.

약속에 의해 정해지고 관행이 되면(約定俗成) 그것을 일러 합당한(宜) 것이라 말한다. 약속한 것과 다르면 그것을 일러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 한다.

이름에는 고정된 실재의 대상이란 없다. 약속에 의해 그 대상에 이름을 부치게 된다. 약속에 의해 정해지면 그것이 습속을 이루어 그것을 그 이름의 실상이라 한다.

이름에는 본디 좋은 것들이 있는데, 간단하고 알기 쉬우며 사물과 어긋나지 않으면 좋은 이름이라 말한다. " 19]

19]『순자』 「정명」,

 “名無固宜, 約之以命,

約定俗成謂之宜, 異於約則謂之不宜.

名無固實, 約之以命實, 約定俗成謂之實名.

名有固善, 徑易而不拂, 謂之善名.”

 

 

위의 구절에서 두 가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이름들은 사람들에 의해 약정된 관습에 불과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좋은 이름들은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선 이름의 관습적 측면을 검토해보자. Chad Hansen은 정명이론은 그것이 공맹순(孔孟荀) 누구의 것이든 모두 ‘관습주의(conventionalism)’의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20]

그 중에서도 특히 순자의 정명론을 Hansen은 “성인이 사람들이 가치평가적 구분을 하고 자세를 가다듬고 선택하며 행위하는 방식을 조화시키고 조절하는데 하나의 모델을 제공했음”을 주장하는 ‘관습주의’로 보았다. 순자의 정명론이 관습주의인 이유는 “암묵적으로 그 논변이 보편적으로 승인된(그리고 생존과 효율성의 기준을 충족시키는) 이름들을 정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방식이든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허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21] 때문이다.

 

이와 같은 ‘관습주의’적 성격과 더불어 공자 정명론의 성격 중 특징적인 것으로 거론되었던 ‘수행적인(performative)’ 성격이 순자 정명론에서도 중요한 요소임은 당연한 일이다. 수행론적 측면은 정명론이 관습주의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름짓기가 단순히 이름과 그 이름의 대상 사이의 대응적 관계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름을 짓는 이의 의도를 세계에 부과하여 ‘세계가 일정한 방향으로 실현되도록 추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핸센은 순자의 정명론을 관습주의라는 측면에서 더 나아가, “무정부적 혼란을 방지한다는” 정당화에 의거한 “전통주의(traditionalism)”로 귀착되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핸센에 따르면 순자는 “전통적 가치는 합리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 가치를 함부로 다룰 때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라는 주장” 22] 만 했다는 것이다. 과연 순자의 정명론이 지니는 ‘수행적 관습주의’의 성격이 사회 질서 유지라는 것 이상의 어떤 합리적 근거도 없다고 해야할까?

 

20]“정명론은 실제 이름의 경계가 그것들의 실제적 쓰임에 의해 결정됨을 함축한다. 정명론이 지닌 성인으로 되돌아가기란 측면이 의미하는 바는 이름들이 그 쓰임의 역사적 패턴과 새로운 구분들의 점차적인 도입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변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성인이 세운 이름의 경계를 군주가 정치적인 방편으로 다시 새울 수 있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는 이름 사용의 실제적 기준들이 사회적으로 변화 가능한 관행이라는 것이다.” Chad Hansen, Language and Logic in Ancient China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3), pp. 79-80.

21]앞의 책 같은 쪽.

22]앞의 책, 80쪽.

 

 

2) 관습적이지만 비자의적인 이름(名)

 

“훌륭한 이름이 있다”는 순자의 언급에 주목하여 순자 정명론의 성격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자. 순자는 직절(徑)하고, 쉬우며(易), 사물과 어긋나지 않는(不拂) 이름들을 훌륭한 이름이라고 했다.

보수적인 전통주의자가 왜 사물과 어긋나지 않음이라는 사물과 이름과의 관계를 훌륭한 이름의 기준의 하나로 설정했을까? 23]

만일 순자의 정명론의 정당화의 논리가 단순히 정치 사회적 기존 질서를 보존하는 것에 초점 맞춰져 있는 것이라면, 순자는 굳이 사물과 이름의 관계 따위를 훌륭한 이름의 기준으로 선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기득권적 정치질서의 보존은 새로운 정치 사회적 환경의 출현을 극력 부정하는 지점에 서 있을 것임을 감안하면, 정명론의 보수적 정치적 함의는 새로운 사태와 환경의 출현 자체를 인정치 않은채 전통주의적 정의에 의해 규정된 명 개념에 실이 부합하여야 한다는 유명론적적 관습주의적 틀을 고수할 때 훨씬 더 잘 지켜질 것이기 때문이다.

 

23]“不拂”은 통상 違拂 또는 違背로 해석된다. 여기서 위배를 이해하는 방식은 두 갈래로 나뉘는데 王先謙이나 李滌生등은 앞의 간결하고 평이하다는 의미에 종속시켜 별 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반면, Burton Watson이나 John Knoblock은 徑과 易와는 독립된 의미로 이름과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과의 관계에서의 어긋남으로 해석하고 있다.

필자가 후자의 견해를 따르는 이유는 “善名” 구절 바로 다음에 나오는 순자의 논의에 기초한다. 순자는 여기서 ‘物’의 다양한 양태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물의 실상을 자세히 살피고 그 [사물의 양태에 따른 종류의] 수를 결정하는 것은 이름 제정의 주요한 원칙(此事之所以稽實定數也. 此制名之樞要也)”임을 주장하고 있다. 이에 비추어 보면 순자가 ‘制名’에 있어서 단순히 約定性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이름의 物과의 관계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고 있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不拂”을 “善名”의 조건의 하나로 독립적으로 보아 이름과 이름이 지칭하는 사물과 서로 어긋나지 않음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여겨진다.

王先謙, 『荀子集解 下』(中華書局 1996), 420쪽, 李滌生, 『荀子集釋』(學生書局 1979), 518쪽,

Burton Watson, Hsun Tzu: Basic Writings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p. 144,

John Knoblock, Xunzi Vol. 3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4), p. 131.

 

 

순자의 의도를 더욱 자세히 알아보는데 다음의 구절이 시사적이다. 순자는 “이름의 바른 사용을 혼란시키는 무리들은 도형량을 어긴 이들을 처벌할 때와 같이 엄한 형벌로 다스려야 한다" 24]고 주장한다.

이름 사용과 도량형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도량형은 세계를 계측할 인간의 필요 때문에 발명된 것이다. 발명된 것이라 해서 도량형이 세계와 완전히 무관한 것이란 의미는 아니다. 만일 도량형이 단순히 인간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고 객관 세계를 전혀 반영하지 않는 것이라면, 우리는 교량과 집등을 만들 수 없을 것이며 도량형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 될 것이다. 즉, 도량형은 인간이 고안한 일종의 약속의 체계이지만, 그렇다고해서 “세계와 어긋나도” 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도량형의 비유를 좀 더 발전시켜 보자. 우리는 객관 세계를 계측할 수 있는 도량형의 시스템이 미터 시스템, 인치 시스템등과 같이 다양하게 존재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만일 두종류의 도량형의 시스템 중에 어느 것을 표준으로 삼을 것인가를 정해야한다면, 우리는 일단 어느 시스템이 쓰기에 더 편하고 쉬울지를(易) 알아볼 것이다. 그 중에 한 시스템이 만일 객관 세계와 어긋난다면(不拂) 결정은 금방 내려질 것이다.

일단 우리가 “훌륭한” 도량형의 표준을 정하면, 이 도량형을 함부로 어기는 사람들은 마땅히 엄한 중벌에 처해져야 한다. 도량형 사용의 혼란은 부실 교량과 건물의 붕괴와 같은 사회적 재앙을 가져올 뿐 아니라 한 사회 구성원 사이에서의 의사소통과 신뢰를 근본적으로 좀먹을 것이기 때문이다.

 

24]『순자』 「정명」, “以亂正名, 使民疑惑. 人多辨訟, 則謂之大姦. 其罪猶爲符節度量之罪也.”

 

 

도량형과 마찬가지로 이름들도 비록 인간의 약속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관습이라 할지라도 객관 실재와 어떤 상관도 없는 아무렇게나 자의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좋은 이름은 있는 것이며, 그것은 “직절하고, 쉬우며, 사물과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 순자는 이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자(知者)는 사물들을 분별하고 이름을 제정하여 사물을 지시하여, 위로는 귀천을 밝히고 아래로 같고 다른 것(同異)을 분명히 하니, 비로소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더 이상 설명하는데 어려움으로 좌절하는 법이 없고, 하는 일은 곤경에 빠져 실패하는 어려움이 없게 된다. 이것이 이름이 있게 된 까닭이다. "25]

25]『순자』 「정명」 , “故知者爲之分別, 制名以指實, 上以明貴賤, 下以辨同異. 貴賤明, 同異別, 如是, 則志無不喩之患, 事無困廢之禍, 此所爲有名也.”

 

 

순자에게 의(義)는 무엇이 합당한지를 아는 능력이다. 무엇이 합당한지는 곧 사회의 위계적 구조이다. 따라서 귀천의 구분은 사물의 같고 다름의 구분처럼 ‘자연’스런 것이다. 다시 말해, 이름들은 인간 사회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도 있는 것이다. 정명론의 ‘수행적’ 측면을 고려해서 말하면, 이름이란 실재 세계의 바탕에서 마땅히 되어져야할 세계로 이행시키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구절로부터 우리는 순자가 이름을 ‘비자의적’인 것으로 여긴 이유가 무엇인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같은 것과 다른 것을 분별하는가? 그것은 타고난 감각 기관에 의해서이다.

모든 종류도 같고 실상도 같은 물건들에 대해서는 감각 기관이 그 물건들을 의식하는 것 또한 같다.

그러므로 물건들을 견주어 보아 서로 비슷하고 통하는 것이라면, 바로 그것들을 요약하는 명칭을 함께 갖도록 하여 서로 통용케 하였던 것이다. " 26]

26]『순자』 「정명」, “然則何緣而以同異? 曰, 緣天官.

凡同類同情者, 其天官之意物也同,

故比方之疑似而通, 是所以共其約名以相期也.”

 

 

위의 구절은 한편으론 순자의 인식론 즉 지식이 어떻게 가능한가에 대한 순자의 견해가 드러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순자가 정명론을 세계를 지각하는 인식론적 구조와 밀접히 연관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은 주관적이고 작위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사물들이 속해있는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범주인 “유(類)”와 그 사물들에 내재한 성질인 “정(情)”에 따르는 것처럼, 비록 이름들은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 창조된 관습적이고 인위적인 것이지만 실재세계를 적절히 반영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순자 정명론의 양면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름의 제정을 후왕의 기준에 따라 하거나 이름의 관습주의적 성격을 강조할 때, 순자는 시대적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유연한 실용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하지만 표준화된 이름 사용의 엄중성과 이를 어긴 이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을 주장할 때, 순자는 경직된 보수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순자의 이러한 양면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름과 사물이 그 어떤 ‘본질적(essential)’ 관계도 부정한다는 면에서 순자는 ‘관습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이름 창제가 실재 세계에 대한 적용가능성을 전혀 고려치 않고 작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순자가 주장한 것은 아니다. 순자는 언어가 ‘수행적’ 기능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해서라도 언어는 우선 있는 그대로의 실재 세계를 충분히 존중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치 않은 경우, 언어는 우주적 질서의 한 부분을 이루는 인간의 사회정치적 질서에 어떤 영향력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심각한 재난을 가져 올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또 한편, 이름은 그것들 자체로 그 어떤 내재적 적합성을 주장할 근거가 없으므로 만일 선왕에 의해 창제된 이름들이 잊혀진 상태에서 ‘좋은’ 이름의 기준에 합당한 적절한 이름을 창안할 수 있다면 그 또한 적극적으로 추구되어져도 좋은 것이다. 결국 순자에게 있어서 언어란 “우리의 뜻(志)을 전달하고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게끔 하는데” 필요한 ‘실용주의적(pragmatic) 도구’인 것이다.

 

 

4. 맺는 말

 

이 글에서 우리는 공자와 순자의 정명론에 함축된 명실의 관계, 즉 이름과 이름이 가리키는 실재 대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공자 정명론의 가장 큰 특징인 수행적이고 규법적 성격은 공자 정명론이 함축한 명실관계에 대한 입장을 주관적 명 개념이 실을 압도하는 것으로 이해하게끔 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해 비록 공자의 정명론에서 명은 단순히 객관 실재를 지칭하는 것 이상의 규범적 성격을 띄고 있지만 그것이 명 개념 성립에서 실이 완전히 무시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다는 것을 밝혔다. 따라서 공자의 명 개념을 단순히 주관적이고 평가할 수 없음도 자연히 드러났다. 순자의 경우도 그의 정명론에서의 대표적인 명제인 “약정속성”은 명에 대한 관습주의적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더 나아가서 이름 성립의 근거는 단순히 “전통주의적” 논거 이상을 가지지 못하는 임의적이고 주관적 성격을 띄는 것으로 해석되는 실례를 Chad Hansen의 경우를 들어 살펴 보았다.27]

하지만 명의 성립을 사람들 사이의 협약에 의한 것이라는 보는 것이 명 자체를 실과 완전히 독립적인 주관적 개념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순자에게서 이름은 어떻게 만들어져도 상관 없는 것이 아니라 “직절하고 쉬위며 사물과 어긋나지 않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는 이름이 실재 사물를 적절히 반영해야 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도량형의 예를 들어 비록 도량형은 인간의 편리를 위해 만들어진 약속의 산물이지만 그것의 쓰임이 실재와 어긋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순자가 보기에는 이름의 사용도 도량형의 사용과 마찬가지로 실재와의 정합성을 결여할 때 큰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순자의 정명론도 “약정속성”으로 만들어진 이름의 성격을 나름의 객관적 근거에 기대어 정립하고자 했음을 볼 수 있다.

“귀하고 천함을 밝히고(明貴賤), (사물의) 같고 다름을 분별하는(辨同異)” 것을 가치와 사실의 문제로 분리하여 인식하지 않았던 순자가 공자와 마찬가지로 명분적 이름의 근거를 실재에서 찾고 있음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다시 말해 서구에서도 근대 이후 특히 데이비드 흄의 논의를 거쳐 첨예하게 인식된 사실과 가치의 분리라는 문제를 공자와 순자에게 적용하여 그들의 논의를 주관주의적인 것으로 몰고 가는 우를 범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규범적이고 수행적 성격을 띈 명이 단순히 인간의 자의적 산물로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은 선진 유가에서의 예 개념 특히 순자의 예 개념이 비록 성인이 창제한 문화적 산물이지만 자연 또는 실재와의 연관성을 통해 나름의 객관성을 정초할 수 있는 토대가 어디에서 왔을지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시 말해 정명론의 명실관계적 측면에 대한 탐구는 선진 예학의 문제를 다루는데서도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27]윤무학의 경우, 순자는 명보다는 실 자체를 일차적으로 보는 반면 공자는 그 반대라 하여 순자와 공자의 명실관계에 대한 이해가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윤무학, ?중국철학 방법론?, 160쪽. 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순자의 실 우선적 입장은 ‘약정속성’의 대전제와의 관계에서 볼 때 보다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공자의 명 우선적 입장도 명 성립에서의 실의 역할을 감안할 때 제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공자와 순자의 정명론은 명실론적 관계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그다지 멀지 않는 지점에 서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欽定四庫全書本 『論語集解義疏』.

王先謙 『荀子集解』 上, 下 (中華書局 1996).

李滌生 『荀子集釋』 (學生書局 1979).

동양고전연구회 『논어』 (지식산업사 2002).

윤무학 『中國哲學 方法論 -古代哲學의 名實論的 照明-』 (한울아카데미 1999).

 

J. L. Austin, How to Do Things with Words (Cambridge: Harvard University Press, 1975).

Herbert Fingarette, Confucisu - The Secular as Sacred (New York: Harper Torch- books, 1972).

David Hall and Roger T. Ames, Thingking Through Confucius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87).

Chad Hansen, Language and Logic in Ancient China (Ann Arbor: The University of Michigan Press, 1983).

John Makeham, Name and Actuality in Early Chinese Thought (Albany: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1994).

John Knoblock, Xunzi: A Translation and Study of the Complete Works Vol II and III (Stanford: Stanford University Press, 1990, 1994).

Burton Watson, Hsün Tzu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63).

 

 

[Abstract]

 

A Study on the Relationship between “Name and Acutality(名實)” in the “Theory of Proper Use of Names (正名論)”

 

Lee, Jang-Hee (Yonsei Univ.)

 

The ‘normative,’ and ‘performative’ features in Confucius' theory of proper use of names (名) often render the concept of name to be interpreted as being “subjective.” Likewise, to institute names in Xunzi's theory of proper use of names is seen to have no rational grounds other than the “traditionalism.” This paper aims to reexamine the relationship between name and actuality in the theory of proper use of names through a careful analysis of the texts.

 

This reexamination leads us to see that Confucius's concept of name does not ignore actuality (實), rather is based on Confucius's understanding of actuality. Although Xunzi's assertion that “[names are being made by] the agreement being fixed, and the custom being established” indicates his “conventionalist” position regarding language, his criteria to discern “good” names shows that the rationale for "instituting names" lies in appealing not to the arbitrary “traditionalism” but to objective rationality supported by actual reality.

 

Key Words : rectifying names, name and actuality, conventionalism, nominalism, ritual

 

 

 

 

 

 

출처 : 마음의 정원
글쓴이 : 마음의 정원 원글보기
메모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