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현대문학' 해프닝이 남긴 것

도깨비-1 2013. 12. 25. 10:46

'현대문학' 해프닝이 남긴 것

입력 : 2013.12.24 05:49 | 수정 : 2013.12.24 06:47 / 조선일보

어수웅 문화부 차장

 

지면의 제약 때문에 신문에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지난주 화제가 됐던 김우창(77) 고려대 명예교수의 생애 첫 기자간담회 발언 중에 '택시운전사 여담'이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성스러운 사람을 택시운전사라 생각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게 골자(骨子)다. 예전에는 왜 '성인(聖人)'이라 생각했나. 다른 사람은 다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가고 싶은 대로 가는데, 택시는 다른 사람이 가고 싶은 대로 간다는 것. 그런데 요즘은 왜 생각이 바뀌었나. 운전사들하고 얘기해 보면, 전부 대통령감이라는 것. 나라가 이래야 하고, 새누리당이 어떻고 민주당이 어떻고….

김우창 교수의 여담을 듣고 돌아온 날, 월간 '현대문학'이 백기투항(白旗投降)에 가까운 사과문 보도자료를 보내왔다. 민주당 박지원 의원이 '유신 부활'이라고 흥분했던, 한국 최고(最古) 문예지의 소설 연재 거부 논란. 원로 작가 이제하씨 등은 작품에 썼던 유신(維新)이라는 단어가 문제가 됐을 거라 주장했고, 현대문학 측은 굳이 부인하지 않았다.

영광은커녕 상처로만 남은 이 사태가 부디 잘 아물기를 바라는 마음은 문학담당 기자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두 주체의 망상(妄想)은 함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은 현대문학의 망상. '유신'이나 '박정희'라는 고유명사가 한 번 언급됐다고 이 작품이 '정치 소설'이 되나. 게다가 2013년 이 시점에서 권력자가 소설 한 편을 두려워할 거라는 생각 자체가 코미디다.

또 하나는 민주당의 망상. '유신'이라는 단어와 함께 이 사안이 진보 진영 신문의 1면 톱기사로 이틀 연속 등장하자, 민주당은 김한길 대표까지 나서 '공포정치, 공안정치'라고 비난했다. 김영환 노영민 박홍근 도종환 유은혜 윤관석 신경민 김영근 의원 등은 기자회견·논평까지 냈다. 평소 문학에 대해서는 공개적 언급 한번 없던 인물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민주당의 관심은 대자보 '안녕들 하십니까'로 재빠르게 옮아갔다.

이번 사태는 기본적으로 현대문학이 반성해야 마땅하지만, 2013년의 우리 모두는 택시운전사의 오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이 지배하던 1970~1980년대, 권위주의와 독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정작 그 목소리를 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당시 문학이 지지와 존경을 얻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정권에 대한 비판이 희생이나 구속을 감수할 필요 없는 '액세서리'가 된 2013년, 그 수요는 줄었는데 공급은 오히려 넘쳐난다. 정권에 대한 비판의 소리가 이처럼 난무하던 시대가 또 있었을까.

문학평론가 김태환 서울대 교수는 "걸그룹의 복장 불량이, 시의 불온한 언어보다 더 불온한 것이 21세기의 상황"이라고 최근 한 문예지에 썼다. 바야흐로 선지자의 시대는 끝나고, 약장수의 시대라는 것. 김우창 교수는 "문학은 이념을 넘어 개인적 체험을 말하는 데서 시작해 공통의 가치를 재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김 교수의 충고대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이전에 다들 수신(修身)부터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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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문학 유신 언급 작품 연재 거부

제280회 이달의 기자상 취재보도2 / 경향신문 정원식 기자

경향신문 정원식 기자2014.01.22 13:28:58 / 출처 :  http://www.journalist.or.kr/news/article.html?no=32756

▲ 경향신문 정원식 기자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한국문학의 위상>(문학과지성사, 1977)에서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배고픈 거지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나 문학은 그 배고픈 거지가 있다는 것을 추문으로 만들고, 그래서 인간을 억누르는 억압의 정체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이 말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한 울림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학이 억압의 정체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판관이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억압의 주체가 돼버린 참담한 사건이 지난해에 벌어졌다.

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은 지난해 9월호에 현직 대통령의 수필을 찬양한 이태동 서강대 명예교수의 글을 실었다. ‘현대문학’은 박근혜 대통령이 1990년대에 쓴 수필 4편도 함께 수록했다. 최고 권력자 또는 그 측근들을 수신 대상으로 삼은 ‘박비어천가’임에 분명해 보였지만 확증이 없었다. ‘현대문학’으로서는 ‘원로 문학평론가가 보내온 글을 실었을 뿐’이라고 변명할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입맛이 씁쓸했지만, 이 사건은 우발적인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이것이 우발적인 해프닝이 아니라 ‘현대문학’ 측의 적극적 의지가 개입된 사건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몇 개월이 지난 지난해 12월이었다. 201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예심이 그 계기였다. 심사를 위해 모인 젊은 문인들은 그 즈음 그들 사이에 화제가 되고 있던 소설가 이제하씨의 페이스북 글에 대해 말했다. ‘유신’과 ‘87년 민주화항쟁’이라는 단 두 단어 때문에 ‘현대문학’ 측이 이씨의 소설 연재를 거부했다는 얘기였다. 그들은 또 ‘현대문학’ 9월호에 실린 이태동 교수의 글을 비판적으로 언급한 한 비평가의 글에 대해 ‘현대문학’이 수정 요구를 했다는 얘기도 했다.

보도의 규모를 이틀 연속 1면 기사로까지 키울 수 있었던 결정적인 단서는 한윤정 경향신문 문화부장이 확보하고 있던 소설가 정찬씨의 이메일이었다. 정씨도 정치적 언급을 이유로 연재를 거부당했다. 그의 제보를 통해 소설가 서정인씨도 같은 일을 겪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문제의 9월호 발간을 전후한 시점에 벌어졌다.

경향신문 보도 후 일어난 젊은 문인들의 ‘현대문학’ 거부 선언, ‘현대문학상’ 수상 문인들의 수상 거부, ‘현대문학’ 주간과 편집위원들의 전원 사퇴는 뒤늦긴 했지만 마땅하고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 보도는 시작부터 끝까지 한윤정 부장의 두뇌와 손끝에서 이뤄졌다. 바이라인을 단 기자가 한 일은 일부에 불과하다. 문화부 선배들은 어리숙한 후배 기자를 시종일관 격려하고 다독여주었다. 부장을 포함한 문화부 선배들에게 깊이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