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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은 '쿠데타'… 하지만 대한민국의 오늘 만들었다

도깨비-1 2013. 4. 26. 14:12


5·16은 '쿠데타'… 하지만 대한민국의 오늘 만들었다

[문재인 대선 캠프 출신 안경환 교수, 5·16 共謀(공모)한 황용주 傳記 펴내]


- 황용주 전기 쓴 이유
평생 '조국 근대화' 고뇌했지만
빈곤 속에서 살다간 지식인
묘비명이라도 써주고 싶었다
- 5·16 완전히 동의하진 않지만…
대한민국 일으킨 것 또한 사실
산업화·민주화 위해 힘썼던
그 시대 분들께 경의를 표한다
- 現세대의 무지·오만에 절망
이승만 過만 다룬 '백년전쟁'
지식을 선택적으로 골라 써
그건 지식인의 태도가 아니다


 김 기철 기자/ 조선일보 2013. 04. 26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가 고뇌하고, 만들어가면서 분노하고 좌절했던 고인(故人)의 세대, 그 세대 지식인들이 입었던 상처에 따뜻한 위로와 깊은 경의를 표한다. 누가 뭐래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다. 그 성공의 역사에 이분들의 열정과 좌절, 환희와 분노가 밑거름이 되었다. 

 -안경환 교수의 '황용주 傳記' 머리말
   지난 대선 때 문재인 민주당 후보 캠프의 새정치위원장을 맡았던 안경환(65) 서울법대 교수가 박정희 대통령 측근으로 5·16을 함께 '모의'한 황용주(1918~2001) 전 문화방송 사장 전기를 썼다. '황용주: 그와 박정희의 시대'(까치)다. 황용주는 부산일보 주필로 있던 1960년,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에 부임한 박정희에게 군사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을 뒤엎고 새로운 근대국가를 만들자고 '공모'한 인물이다.
   박 대통령과 대구사범학교 4기 동기생인 황용주는 5·16 이후 부산일보 사장, 문화방송 사장으로 승승장구하다 1964년 11월 월간 '세대'지 필화사건으로 구속(반공법 위반)되면서 사실상 공직에서 은퇴했다. 안 교수는 황용주가 '군사 쿠데타로 집권→강력한 공업화, 산업화로 물질적 토대 구축→통일을 위한 남북한 불가침조약 체결, UN 동시 가입, 남북한 격차 해소, 통일'이라는 로드맵을 가지고 있었다고 썼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이자 노무현 정부 때 국가인권위원장을 지낸 진보 성향의 안경환 교수가 5·16을 공모하고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박정희를 추모했던 황용주 전기를 쓴 이유는 뭘까. 안 교수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은 채, 말년엔 가난에 시달리다 무덤조차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뜬 한 지식인을 위해 묘비명(墓碑銘)을 써주고 싶었다"고 했다.
   ―이런 전기를 쓴 데 대해, 주변에선 불편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있겠다.
   "황용주나 박정희는 5·16을 국가 비상상황에서 부득이한 수단으로 생각했다. 권력 찬탈이 목적이 아니라 권력을 장악한 후에 산업화로 근대국가를 만든다는 구상이 있었다. 그래서 '민족주의 혁명'이라 주장한 것이다.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공감이 가는 대목이 있다. 당시 언론이나 지식인 사회에서도 '군사혁명'을 환영하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5·16을 공모한 황용주 입장에서 책을 썼다. 5·16을 어떻게 보나.
   "헌법학자로서는 5·16을 헌정 질서를 파괴한 쿠데타로 본다. 하지만 그 사건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계기가 됐다는 사실 또한 받아들인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성공한 역사'라 했는데, 박정희 시대도 그렇게 본다는 말인가.
   "우리만큼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성취한 나라가 있는가. 어떤 분들은 선(先)민주주의―후(後)산업화를 얘기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산업화를 이룬 나라는 없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위해 땀흘린 모든 분께 경의를 표한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은 이승만을 친일파, 하와이 갱스터, 박정희를 '스네이크 박'이라며 인신공격에 가까운 비난하고 있다.
   "공(功)은 보지 않고 일부 과(過)만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균형감각을 잃은 것이다. 캄보디아의 시아누크 국왕 같은 동남아 건국 1세대들을 여러 차례 만났는데, 이들은 이승만 대통령의 기여를 입을 모아 얘기했다. 자기들은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얻었는데, 이 대통령은 외교활동으로 독립을 얻었다는 것이다. 세계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독립 후 반공국가를 세워 대한민국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전시 중립을 다룬 이승만의 프린스턴대 박사 학위논문을 두고 "지금 미국 유학 가서 학위 공부해도 쉽지 않을 만큼 수준 높은 글"이라고 했다.
   ―'글을 쓰면서 우리 세대의 무지와 후속 세대의 경박한 오만에 절망하곤 했다'고 서문에 썼다.
   "4·19 세대의 영향이 너무 컸다고 할까. 우리에겐 이전 세대에 대한 존경이 없다. 자신이 선(善)이란 생각만 앞세운다. 정보가 부족한 것은 아닐 텐데, 지식을 선택적으로 골라 쓴다. 인터넷을 앞세운 젊은 세대일수록 더 그렇다. 그건 운동가의 태도이지, 지식인의 태도는 아니다."
   황용주는 부산일보 사주였던 김지태씨가 장학회를 국가에 헌납케 하고, 5·16 장학회(현 정수장학회)를 만드는 데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 교수는 "황용주는 개인 재산을 빼앗아 5·16 장학회 설립을 주도할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김지태씨를 잘 아니까 다리를 놓은 정도지, 이득을 노렸다고 보기엔…"이라고 했다.
   안 교수는 "좌파 서적을 탐독하던 학창 시절이나 해방 직후 김원봉 비서로 일하던 때, 그리고 부산일보 주필 시절, 5·16 이후 박정희를 도와 '민족적 민주주의'를 내놓을 때까지 황용주는 평생 우리나라를 근대국가로 만들려고 애쓴 민족주의자였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