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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기의 태평로] '친절한 교과서'가 모르는 불친절한 현실

도깨비-1 2013. 5. 14. 12:07


[김형기의 태평로] '친절한 교과서'가 모르는 불친절한 현실

'선행 학습 금지' 공약
학생 공부 막는 발상
私교육 없애려면
사회 구조 바뀌어야
'교과서 안에서만 출제'
대통령 말 따르다가
교과서만 달달 외운
저학력 세대 나올라


 김형기 논설위원/2013. 05. 13. 조선일보

 

   박근혜 대통령이 작년 대선에서 '선행 학습 금지' 공약을 처음 꺼냈을 때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 선행 학습은 학생이 학교 진도보다 앞선 내용을 미리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선행 학습이 학원들의 주요 돈벌이 수단인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학생이 공부하는 걸 국가가 막겠다는 게 상식적인 발상은 아니다. 세계에 그런 나라는 없다. 그런데 그 비상식이 현실화돼 가고 있다. 보름 전 여당 국회의원들이 이 공약 실천을 위한 법안을 발의했고, 교육부 장관은 법이 통과되면 이를 뒷받침하는 시행령을 만들어 학교 수업과 대학 입시에 반영하겠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한발 더 나가 "교과서 밖에서 절대로 시험문제를 내지 말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면서 '친절한 교과서' 개발을 주문했다. "교과서가 너무 간단해 참고서를 보지 않으면 알아듣기 어려우니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충실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통령은 학교 시험과 대학 입시에서 교과서 내 출제 원칙만 지키면 사교육 문제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국가가 초·중·고 12년 동안 학생들이 배워야 할 내용과 성취 기준을 학년별, 과목별로 정해놓은 것을 '교육과정(敎育課程)'이라고 한다. 교과서는 교육과정에서 요구하는 필수 개념과 그 개념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설명을 담은 책이다. 학생들이 지식을 늘리고 이해의 폭을 넓히려면 제한된 교과서에 담을 수 없는 풍부한 고전과 교양서들을 접할 수 있어야 한다. 미적분 같은 어려운 수학 개념을 제대로 익히려면 많은 응용문제를 풀어보면서 문제 해결력을 키워야 한다. 교과서 외에 좋은 참고서와 문제집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런 교양서와 참고서 역할까지 충실히 해줄 '친절한 교과서'를 만들자면 책을 엄청나게 두껍게 하거나 가짓수를 크게 늘려야 할 것이다. 학생 공부 부담이 그대로라면 교과서를 새로 만드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국의 사교육 문제가 시험을 쉽게 내서 해결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오늘 이 지경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우리 학생들이 학원에 몰려가는 것은 미진한 학교 수업을 보충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시험문제가 쉽건 어렵건 옆 아이보다 1점이라도 더 받기 위해 가는 것이다. 이유는 자명하다. 그래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고 그래야 남보다 나은 직장, 나은 직업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 사회가 직업에 귀천(貴賤)이 있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작은 중소기업에 들어가도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고 블루칼라 직업으로도 얼마든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라면 굳이 일류대학 들어가려 목을 맬 까닭이 없다. 그런 사회라면 학교 성적 1, 2점 차이에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고 사교육에 시간·돈을 낭비할 이유도 없다. 독일이나 북유럽이 그런 나라이다. 사교육은 우리 사회의 근본 구조를 바꿔야 비로소 풀리는 문제이지 그것만 따로 존재하는 별개 현상이 아니다.
   39년 전 박정희 대통령은 고교 경쟁 입시를 추첨제로 바꾸는 혁명적 수단까지 동원했지만 과외병을 잡는 데 실패했다. 이후 역대 어느 정권도 사교육과 싸워 이긴 적이 없다. 이 정부의 선행 학습 금지나 '친절한 교과서' 전술도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부가 교과서 안에서만 시험문제를 내게 해서 사교육을 고사(枯死)시키려 들면 학원들은 실수를 피하는 기술, 비틀기·함정 문제를 가려내는 비법(秘法) 따위를 개발해 살아남을 것이다. 잘못하면 사교육은 잡지 못하고 교과서만 달달 외우는 경쟁력 없는 아이들만 생산해낼 위험이 있다. 그렇게 되면 '단군 이래 최저 학력' 조롱을 받는 '이해찬 세대'처럼 나중에 '친절 교과서 세대'라는 말이 나오게 될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