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내 이념의 정체는 '저질'
하수도에 머물지 않고
하수도가 넘쳐
상수도와 섞이고
상수도 행세를 하며
그 구정물을 대중들이
멋처럼 유행처럼 들이켜니
최보식 선임기자/ 2012. 02. 10. 조선일보
당연히 정봉주씨가 싱글이나 이혼남일 것으로 생각했다. 여성들이 '터지든' '쪼그라들든' 가슴 들이대는 사진을 쉽게 공개할 리 없고, "성욕감퇴제 복용하고 있다" "코피를 조심하라"며 장단을 맞추고 있었으니 말이다. 알고 보니 부인과 장성한 1남1녀가 있었다. 자신의 남편, 아버지를 향한 '가슴과 코피' 대접에 기분이 어떨까.
이것 말고는, '비키니 인증샷' 사건에서 갑자기 난리난 것처럼 떠들 이유가 없다. 현직 대통령을 겨냥해 "눈 찢어진 아이(불륜 사생아)를 조만간 공개한다"고 날릴 때도 내부에서 잠잠했지 않은가. 막말과 야유, 꼼수, 안하무인은 이런 부류들의 일상이었지 않은가.
같은 물에서 놀던 작가 공지영씨가 "매우 불쾌하며 사과하라"고 정색한 것이 더 낯설어 보인다. "여성을 봉사의 대상으로 보는 마초이즘"이라며 다투어 꾸짖고 가르치듯 하는 것도 가관이다. 혹시 "생물학적 완성도(가슴 크기)에 감탄한다"는 답변보다 더 품위있는 코멘트를 기대했다면, 서로 어울려 놀아온 세월을 깜박한 것이다.
아침에 눈 떠서 모두가 '도덕주의자'로 행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에는 구정물이 흐르는 하수도가 있어야 한다. 하수도 환경이 좋아졌다. 젊은 친구들이 힘들게 읽고 깊이 생각하는 걸 포기하면서, 그런 물이 놀 자리가 늘어났다. 못 배운 졸부(猝富)들조차 교양 흉내를 내기 위해 응접실에 세계사상전집을 진열하던 시절은 갔다. 이제는 허접함을 과시하고 팔아먹는 세상이다. 고귀한 가치나 사상(思想)은 '닥치고', 머리가 비어도 '쫄지마'로 응수한다. '나꼼수' 부류들은 그런 존재 의미가 있다.
한판 웃고 노는 것으로 끝났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야당 정치인과 좌파 지식인들은 '저질(低質)'의 정치 위력을 알아챘다. 저질과 합작해 우파정권을 무너뜨릴 것이다. '나꼼수'류를 당(黨) 전당대회장까지 끌어왔다. 허접스러운 말들이 '교리(敎理)'요, 음모론이 '진실의 증거'로 바뀌었다. 서로 패권을 쥐기 위해 누구 입이 더 비속한지 '너절리즘'을 놓고 맞붙기도 했다. 그런 세계에서 한낱 비키니 인증샷만으로 분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제 하수도가 하수도에 머물지 않고, 하수도가 넘쳐 상수도와 섞이고, 하수도가 상수도 행세를 하며, 하수도의 구정물을 대중이 멋처럼 유행처럼 들이켜고 있다. 현직 판사도 여기서 힘을 얻어 '가카새끼' '빅엿'을 날릴 수 있었다. '양심' 곽노현씨도 서울시교육감으로 복귀하자마자 "여러분들의 믿음과 응원에 힘입어 절대 쫄지 않고 반드시 이기겠다"고 헌사했다.
머리가 제대로 박힌 정치인과 지식인이라면 어느날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볼 때가 있을 것이다. 내 이념의 정체는 '저질'이었을까. 나꼼수 같은 사회를 만드는 게 내가 꿈꿔왔던 세상일까. 정파적 입장에 함몰해 나도 썩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의문을 품는 순간 이 세계에서는 변절자, 왕따가 될 소지가 높다.
광우병 사태 때 선동에 앞장섰던 문화평론가 진중권씨가 그걸 보여준다. "음모보다 사실 확인이 우선이다. 가장 황당한 것은 상식이 몰상식 취급받는 것이다. 우리 편이든 저편이든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이다. 내가 이쪽 비판하다 저쪽 비판하면 '이 자식은 누구 편이냐'고 한다." 이런 상식적인 말을 시작한 뒤로, 한때 그쪽 세계에서 영웅 대접을 받던 그가 이제 '왕따'가 되는 것 같다.
좌파 진영에서 집단 왕따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기반을 잃는다는 뜻이다. 아무도 그를 상대해주지 않는다. 무시와 냉담의 대상일 뿐이다. 이 때문에 뻔히 잘못됐다는 걸 알면서도 침묵하고, 그쪽 흐름에 거슬리는 말은 입 밖에 꺼내지 못한다.
'비키니 인증샷'에 불쾌해할 줄 아는 여성작가라면 복귀한 좌파 교육감의 '파렴치'를 모를 리 없다. 하지만 교육감을 대신해 변명할 말부터 찾아낼 것이다. 나라의 장래를 고민해본 좌파라면 FTA가 좋아서 하는 게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선택인 줄 알지만, 보란듯이 반미(反美)시위에 나선다. 이 중에는 제 자식은 미국에 유학보낸 이도 많을 것이다. 늘 인권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북한주민의 인권에 대해 말하는 좌파는 없다. 어디서 '지령'을 받고 담합하는 것일까. 언제까지 그럴 것인지 나는 지켜보고 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정권교체에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나꼼수'류가 권력의 비호를 받고, 저질과 선동의 날개를 활짝 펴고 설쳐댈 장면을 떠올리면, 그 지지나 심정적 동조에서 멈칫할 수밖에 없다. 우파가 우파세력에게 더 예리한 칼을 들이대듯이, 좌파는 좌파세력의 내부를 향해 날선 도끼를 쳐들어야 한다. '비키니 인증샷' 사건은 좌파가 결별해야 할 '저질 리스트'의 한 항목에 불과할 것이다. ▣
'사회이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서기호 판사 ‘국민법복’ 선물받고 눈물 주르륵 (0) | 2012.02.17 |
---|---|
[아침논단] 대기업·공기업만 가려고 하는 젊은 세대 (0) | 2012.02.13 |
[특파원 칼럼] 한국이 부러운 일본 (0) | 2012.02.05 |
[한삼희의 환경칼럼] '고층아파트 슬럼 시대' 온다 (0) | 2012.02.05 |
남정욱 교수의 명랑笑說<1981~1985>] 청춘들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0) | 2012.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