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새 문명 창조와 자멸의 기로에 선 대한민국
김진현/ 세계평화포럼 이사장/ 조선일보 2011. 12. 15.
세계사적 관점에서 대한민국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그 전개의 대극성(對極性)이다. 전통적 대륙국가에서 1945년 이후 일거에 해양국가로 바뀌었다. 개화에 완강히 저항했던 '최후의 은둔국'은 아시아에서 국제회의를 가장 많이 하고 무역 의존도가 80%를 넘고 증권시장의 외국인 주식비율이 40%나 되는 '열린 사회'가 되었다. 1894년 이후 다섯 번의 '국제전쟁'을 겪고 북한 3대 세습왕조의 핵(核)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도 '휴전'이라는 60년 임시 평화에 도취하여 전쟁과 안보 위험을 잊은 나라가 되었다.
대한민국은 1945년 이후 독립한 140개 가까운 비(非)서양 국가 중 민주정치, 시민권리, 언론 자유와 1인당 소득 2만달러를 성취한 유일한 나라이다. 교육, 과학기술의 선진화, 정보화, 문화와 사회 가치 다원성 등 일부 지표는 서양 선진국을 능가한다. 나는 이를 '대한민국 근대화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단순히 압축 성장의 성공이란 표현으로는 부족한 이런 경이와 기적 뒤에는 자칫 자멸과 해체를 가져올 수 있는 대극성을 극복해야 하는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비정부기구(NGO) '활동', 언론 '자유'는 선진국보다 훨씬 역동적인데도 투표율은 40%에 그치고 국회와 정당문화는 조폭이나 말썽 많은 업자(業者)단체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교육열과 교육비 지출은 세계 최고이고 K-pop이 지구를 휩쓸고 있지만 안으로는 사회 해체현상이 극단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세계 최고의 이혼율·낙태율·자살률, 다른 나라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높은 사기죄와 위증죄 비율이 증명하듯 반(反)인륜, 신(新)야만 사회가 되었다. 이제 더 이상 발전과 역(逆)발전, 개방과 사회 해체, 자유와 탐욕, 성장과 반(反)문명의 대극적 팽창은 지속될 수 없다. 이제 대극적 변화의 주동력이었던 경제 제일주의나 민주화 만능주의의 효용은 끝났다.
지금 우리 앞에는 대한민국 근대화혁명을 기반으로 극단의 대극성을 극복·승화하여 인류의 지속 가능한 새 문명 대안 만들기에 앞장서느냐 아니면 대극성의 내부 충돌로 그간의 성취를 침식시켜 자멸로 가느냐의 두 갈래 길이 놓여 있다. 우리는 흔히 한국이 세계적으로 웅비(雄飛)하는 길을 세계적 인물과 세계적 기업의 성공에서 찾고 있다. 그런 유능한 그릇들이 필수조건에는 틀림없지만 유능한 그릇이 많다는 것이 한 나라나 사회 공동체를 자동적으로 힘 있고 존경받는 선진국, 선진(善進) 모범국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이탈리아·스페인은 세계적 예술인, 노벨상 수상자, 기업인들이 많은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의 국력이나 국격(國格)은 오늘의 허약한 모습 그대로일 뿐이다. 사회 공동선과 미덕의 리더십이 없는 모범국은 없다.
우리는 스스로 대극성을 극복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첫째는 '한강의 기적' 신화 속에 박힌 부패, 공권력 의존, 경제 제일주의와 '민주화' 신화 속에 가린 운동권적 독선·선동·폭력을 버리는 것이다. 그것은 성공자들과 성공 세력들의 성실한 성찰과 체계적 참회에서 시작된다. 둘째는 대한민국 근대화혁명 속에서 21세기 지구촌 사회의 요구와 일치하는 것을 찾아내 더욱 보편화하는 것이다. 정의채 몬시뇰과 김지하 시인의 생명사상, 이태석 신부의 아프리카 헌신, 박노해 시인의 이슬람 중에서도 쿠르드·아체 등 소수민족 나눔운동, 조동일 교수의 동양문명론 그리고 말로만이 아닌 '녹색성장' 전략이 그런 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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