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슈

UR·문화개방… "망한다"외쳤지만, 오히려 한국産이 세계를 지배

도깨비-1 2011. 11. 25. 09:35


UR(우루과이라운드)·문화개방(美영화 직배·日문화 개방)… "망한다"외쳤지만, 오히려 한국産이 세계를 지배

 

[도시바 내쫓은 삼성·LG… 일본 밥솥 이긴 쿠쿠]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7월 우리 정부는 일본산 전자제품에 대한 시장개방을 단행했다. 시장 개방은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기 위한 조건이었다. 일각에서는 "품질 좋은 일본산 전자제품이 한국 시장을 장악할 것"이라며 개탄했다. 실제로 소니·도시바·파나소닉 등 쟁쟁한 일본 전자업체들은 한국에 매장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마케팅 공세를 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현실은 어떤가?
   시장조사기관 Gfk에 따르면 작년 말 현재 한국 TV 시장은 삼성전자·LG전자가 99% 장악하고 있다. 일본 TV는 소니만 겨우 제품을 낼 뿐 도시바·파나소닉 등 다른 업체들은 줄줄이 철수했다. 연간 130조원 규모의 세계 TV 시장에서도 삼성전자(점유율 22.6%)와 LG전자(점유율 13.6%)가 세계 1·2위를 달리고 있다.

"日 코끼리 밥솥으로
한국이 밥을 짓다니"
그땐 통탄했지만 …
이젠 日이 한국産 수입

   1999년 전기밥솥 시장이 개방될 때에도 일본의 '코끼리밥솥'이 한국 시장을 점령할 것이라고 했지만, 결과는 정반대다. 개방 당시 중소기업에 불과했던 쿠쿠홈시스는 독자기술로 개발한 압력밥솥과 철저한 애프터서비스로 국내 시장을 70%가량 장악한 것은 물론, 2002년부터는 거꾸로 일본에 역(逆)수출을 하고 있다. 1998년 300억원에 불과했던 매출은 올해 4000억원에 이를 전망이다.
   1996년 완전 개방한 유통시장에서도 이마트 등 한국 기업이 글로벌 대기업들을 쫓아냈다. 이마트 등 한국계 대형할인점은 외국계가 선보였던 창고형 매장을 한국인 취향에 맞춰 밝고 고급스럽게 꾸미고, 한국 소비자들이 좋아하는 제품을 전면에 배치하는 토종전략으로 외국계 할인점에 완승을 거뒀다. 이마트는 2006년 세계 최대의 기업인 미국 월마트로부터 한국 내 매장 16개를 8250억원에 인수했다.

조형래 기자/2011. 11. 24. 조선일보-

 


[마트도 음악도 과자도… 빗장 열었더니 한국산업 강해졌다]

  

 "일본의 문화 식민지가 될 것이다."
   1998년 10월. 당시 김대중 정부가 일본 문화를 단계적으로 개방하겠다고 발표하자, 일부 시민단체가 이렇게 반발했다. 당시 우리나라에선 음성적으로 X재팬 등 일본 그룹이 인기를 끌었고, 공중파 TV프로그램 중에는 일본 방송을 그대로 모방한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문화계는 저질 포르노가 대량 유통될 것이라며 '왜색(倭色)'을 경계했다.


日문화, 반발 속 개방했는데
소녀시대·카라, 日시장 잠식


한때 과자 수입 우려했지만
초코파이·홈런볼 수출 신화


이익 보는 쪽은 조용히 있고
소수의 반대 목소리만 과장

  

 그러나 대한민국은 무수한 반대에 움츠리는 대신 개방을 밀어붙이는 길을 택했다. 우여곡절 끝에 한국은 2004년 1월 영화·음반·게임시장을 모두 일본에 개방했다. 8년이 지난 지금 일본 콘서트 한 번에 수만명의 청중을 끌어모으는 소녀시대나 카라 같은 케이팝(K-POP) 그룹들을 보면 과거 "문화를 매개체로 일본의 침략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던 우려가 무색해진다.
   1970년대 말 이후 한국 경제사는 개방의 역사였다. 빗장을 열 때마다 "개방하면 죽는다"는 목소리가 드높았지만, 막상 빗장을 열어 외국과 경쟁이 시작되면 한편으로 배우면서 다른 한편으로 실력을 키워 싸워 이기는 한국인 특유의 투혼이 발휘됐고, 우려는 기우(杞憂)로 끝나곤 했다. 흔들리지 않고 용감하게 문호를 열어 국가와 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려 왔기에 한국이 세계 9위(무역규모 수준)의 무역대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괴담과 억측 넘어선 개방 성공史
   1970년대 말 정부는 과자 시장 개방을 추진하고 나섰다. 당시 수입 과자에는 40%가 넘는 관세가 붙었는데 이를 8%까지 단계적으로 내리겠다는 계획이었다. 과자업계에선 "국내 회사는 다 망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좋은 과자라면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미국·일본산 수입 과자를 떠올리던 시절 "국산 과자를 살리자"는 논리는 강력했다. 그러나 개방을 반대하는 논리는 역시 기우일 뿐이었다. 러시아·중국· 동남아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는 '초코파이'(1974년 출시), '홈런볼'(1982년)의 성공 신화는 오히려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980년 1500만달러에 불과하던 과자류 수출은 2009년 2억5000만달러로 늘었다.
   미국 영화 직접 배급(1987년), 우루과이 라운드 농산물협상(1995년) 당시에도 비슷한 괴담과 넘겨짚기식 반대 논리가 반복됐다. 미국 영화 상영에 반대해 극장에 뱀을 풀거나, 불을 지르는 일까지 있었다.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 당시에는 "농촌이 붕괴한다"며 수없이 많은 농민단체 대표가 삭발식을 거행했지만, 이후 우리 영화와 농업의 체질은 개선되는 쪽으로 움직였다(그래픽 참조).
   한국의 첫 자유무역협정(FTA)인 한·칠레 FTA 당시에는 "포도 농가가 모두 망할 것"이라는 괴담이 돌았다. 그러나 한·칠레 FTA 발효 이후 포도 값은 오히려 올랐고, 국내의 시설포도(비닐하우스 포도) 생산량은 오히려 늘었다.
   ◇1980년대 이후 개방 전략 지속
   개방은 자원 없는 한국이 선택했던 절박한 생존법이었다.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무역장벽을 허물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초다. 1978년만 해도 우리 경제의 수입자유화율(수입 물량 제한 없이 수입된 금액이 전체 수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4.9%에 머물렀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이 전략은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안으론 국내 내수 산업들이 독점에 안주하다 경쟁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밖으론 저유가·저금리·저환율의 3저(低) 현상에 기대 무역흑자를 챙기는 한국에 대해 미국 등 선진국의 개방 압력이 거세졌다.
   경제부처 장관을 지낸 한 전직 고위관료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심정으로 택한 개방 전략이 결국 1990~2000년대 우리 기업과 민간의 경쟁력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렸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교수는 "정부가 경제를 개방한다는 원칙을 꾸준히 지켜나감으로써 기업들에 '개방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메시지를 준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개방은 인기 없는 정책
   개방은 인기 없는 정책일 수밖에 없다. 이익을 보는 다수 집단은 침묵하고, 피해를 보는 소수 집단의 목소리만 드높기 때문이다. 소비자는 개방으로 값싼 수입 상품을 살 수 있어 이득을 보지만 그 이득이 크지 않기에 조용히 있고, 수출 기업은 이익을 본다고 떠들다가 역풍을 맞을까 침묵한다. 결국 조직화된 피해집단의 목소리가 과도하게 여론으로 포장되는 비대칭성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러나 그런 인기 없는 정책을 꾸준히 밀고 나갔기에 오늘의 한국이 있을 수 있었다는 지적이다. 정인교 인하대 교수는 "개방은 이미 한국 입장에서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이라며 "FTA를 제조업과 대기업 위주의 우리 산업구조를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

김태근 기자/ 2011. 11. 24.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