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이슈

[아침논단] 미래 희망으로 남겨둬야 할 '보편적 복지'

도깨비-1 2012. 1. 28. 15:10


[아침논단] 미래 희망으로 남겨둬야 할 '보편적 복지'

 

여·야 함께 복지 확대 주장은
세계 정치 初有의 일
권리·의무 균형 잡혀야 지속가능
현금복지보다 서비스복지 늘리고
복지 우선대상 정하는
정치 리더십 발휘해야


  안상훈 서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조선일보 2012.01. 28. 


 

   복지국가 이슈가 정치판을 뒤흔들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치 못했던 일이다. 이렇게 여·야가 입을 모아 복지 확대를 주장하는 것은 세계정치 초유(初有)의 일인데, 이는 양극화를 오래도록 방치한 결과이고 민생고가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가 세계를 제패해도 하도급기업들의 시름은 늘어가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평민과 천민으로 나뉘어 버린다. 장년층은 팔 집이라도 있지만, 내 집 마련은 고사하고 취직조차 힘든 것이 청년들의 현실이다. 아들 딸 구별 없이 똑같이 가르쳐도, 여자는 출산이 곧 퇴직이라 애 낳기도 쉽지 않다. 성장만능주의의 환각에 빠졌던 우리 모두의 불찰이며, 복지 관련 모든 지표에서 OECD의 꼴찌를 못 면하는 한국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복지국가가 시대정신인 지금, 바뀐 세상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 미래는 없다. 갈 길이 바쁘긴 하지만, 급할수록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한다. 자본주의 수정전략으로서 복지국가를 어떻게 설계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興亡)이 갈린다는 역사의 증언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이다. 앞서간 나라들의 성공과 실패를 살피고, 선진국 개혁의 방향성을 가늠하면 한국형 복지전략을 위한 원칙 몇 가지는 쉽게 드러난다.
   가장 중요한 교훈은 공짜복지란 없으며 복지 포퓰리즘의 결말은 참담하다는 사실이다. 오래도록 지속 가능할 '좋은 복지'는 권리와 의무가 균형 잡힌 공정성의 반석 위에 세워져야 한다. 복지 권리만 외치는 것은 국민을 무책임의 질곡으로 오도하는 정치적 꼼수에 불과하다. '큰 복지'를 원한다면 조세부담이라는 의무도 다하겠다는 국민적 각성이 요구된다. 국민이 부담은 거부하면서 권리만 요구할 경우에 표를 먹고 사는 정치인이 택할 것은 무상복지에의 허황된 약속이나 부유세로의 편 가르기밖에 없다.
   공짜의 이름으로 속삭여지는 '저(低)부담, 고(高)복지'가 달콤하기는 하지만, 그 끝자락에 세대 간 불공정이라는 파국적 무책임이 자리함은 남유럽 국가들의 재정파탄이 명백하게 보여준다. 국민 부담 없이 가능한 복지는 나랏빚을 내는 것뿐인데, 무분별한 국채 발행은 대대손손(代代孫孫) 빚잔치를 물려주는 파렴치에 다름없다. 국민통합을 위해 복지를 하자면서 계층을 둘로 나누고 표 계산만 하는 것은 분열주의에 불과하다. 부자들이 부담을 더 져야겠지만 모두가 함께 낼 때만이 권리로서의 복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직은 성장에 매진해야 하고 분배는 나중이라는 주장도 계속되고 있지만 복지정치의 물꼬가 터진 지금, 그런 주장은 넋두리요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하다. 복지병(病)을 걱정하는 이들을 위한 위안은 모든 복지가 정부 실패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복지 때문에 근로동기가 희석되고 경제에 빨간불이 켜진 나라들은 현금복지에 지나치게 경도된 나라들이다. 탈(脫)산업화시대 지식경제의 뒤안길에서 발생하는 일자리 없는 성장과 노동시장 양극화를 풀어주려면 서비스복지를 늘려야 한다. 아동·장애인·노인에 대한 돌봄을 사회서비스로 제공하면 복지가 증진될 뿐 아니라 일자리가 늘어나는 효과도 거두게 된다. 서비스복지를 통해 가족 돌봄의 의무에서 여성이 자유로워지면 교육받은 여성 인력의 사회 진출이 쉬워진다. 아직도 50%에 머물고 있는 한국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이 늘어나게 되면 그만큼의 생산성이 성장으로 순환할 것이다.
   복지에 쓸 수 있는 예산이 한정된 상태에서 무차별적 보편복지는 현실성이 떨어진다. 북유럽 모형의 성공에 기대어 보편복지 찬가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복지국가를 만들어가는 우리의 상황은 그와 너무 다르다. 보편복지를 하려면 통일비용의 대부분을 복지에 써야 하고, 남한에서 복지를 늘리는 만큼 통일한국의 복지비용도 늘게 된다.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북한을 보면 통일 후 단기적인 복지비용의 폭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북유럽에 비해 5배 이상 빠른 고령화 속도도 문제다. 같은 복지 수준이라면 고령화가 진전되는 만큼의 곱하기 지출효과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보편복지가 자본주의 황금기를 통해 만들어진 데 비해, 경제위기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한국 상황은 복지에 불리하다.
   생애주기적인 필요에 따라 여러 가지 사회서비스를 국민에게 주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공하겠다는 약속은 무책임하다. 확실한 증세(增稅)를 통해 재정적 여력을 단기간에 높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면, 제한된 예산으로 누구의 복지부터 챙겨야 할지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에 정치적 리더십이 발휘돼야 한다. 그래서 꼭 필요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의 사회서비스 구조개혁이 중요하며, '공정한 보편복지'의 완결판은 사회적 부담 여력이 증가할 미래의 희망으로 남겨두면 된다. 복지자본주의로의 창(窓)이 열린 지금,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