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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균 칼럼] 30년 만에 다시 듣는 "미국 식민지 된다"

도깨비-1 2011. 11. 17. 17:07


[김창균 칼럼] 30년 만에 다시 듣는 "미국 식민지 된다"

 

'한국 경제는 미국에 종속'
주장하던 80년대 운동권,
한·미 FTA 반대도 앞장서
나라가 새길 열 때마다
'재앙 온다' 겁주는 그들,
進步라 불러도 될 것인지

 

  - 김창균 논설위원 / 조선일보 2011. 11. 16
 

   '서울의 봄'을 맞은 대학가에 첫발을 디딘 80학번들은 집단적인 의식화 세례를 받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까맣게 몰랐던 '진실'들이 속성으로 신입생 머릿속에 주입됐다. 그 중 하나가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에 사실상 종속된 식민체제'라는 거였다. 박정희 정권이 대외의존형 경제체제를 선택하는 바람에 한국 경제는 미국 경제라는 중심부에 종속된 주변부가 됐으며, 그런 구조로 인해 한국이 잘 살아 보려고 발버둥칠수록 미국만 살찌우게 된다는 논리였다.
   1980년 643억달러였던 우리 국내총생산(GDP)은 2010년 1조143억달러로 16배 증가했다. 같은 기간 미국 GDP는 2조7881억달러에서 14조6604억달러로 5배 늘었다. 한국 사람들이 30년 동안 잘 살아보려고 발버둥친 결과 한국은 미국보다 3배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렸다. 30년 전 후배들에게 한국 경제가 미국 경제에 종속돼 있다고 가르쳤던 운동권 학생들이 자라나 지금 한·미 FTA 반대 지휘부를 형성하고 있다. 그들은 전체 국민을 상대로 "한·미 FTA가 되면 한국은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의식화 수업을 진행 중이다.
   한·미 FTA 반대 이유는 수백 가지도 넘지만 핵심은 한마디로 간추려진다. "미국과 한국의 실력 차가 너무 커서 두 나라 사이의 담벼락을 낮추면 미국이 한국을 일방적으로 침략한다"는 것이다. 한·미 FTA의 투자자·국가 소송제도(ISD)를 독소조항으로 꼽는 것도 법률 소송의 노하우 면에서 한국은 미국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피해의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평균성적 70점인 학생이 90점 학생들과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것은 현명한 선택일까. 자기보다 우수한 학생들과 경쟁하면 실력을 빨리 향상시킬 수 있다는 찬성도 있을 수 있고, 수준이 너무 높은 학생들을 좇아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반대도 나올 수 있다. 어느 쪽이 맞다고 못 박을 수는 없다. 70점짜리 학생의 잠재력과 진취성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수많은 민족이 이민 가서 살고 있다. 미국의 경제체제가 90점짜리라면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의 출신국가는 70점이나 그 이하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출신국가가 미국과 FTA를 맺기 전에 개인 차원의 FTA 실험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미국이라는 앞선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고 밑바닥 인생이 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민 초기의 고된 생활을 이겨내고 중·상류층에 진입한다. 미국에 이민 간 한국인들은 다른 민족에 비해 부지런하고 능력도 뛰어나서 미국 사회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미 FTA로 두 나라 사이의 경제 국경선을 허물었을 때 그 결과가 반드시 성공적일 것이라고 장담할 근거는 없다. 모든 기회에는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다. 100% 성공이 보장돼 있다면 오래전에 FTA가 성사됐을 것이다. 한국과 미국 사이엔 분명 실력 차가 있다. 그럼에도 FTA를 '하자는 사람'이 '말자는 사람'보다 두배 가량 많은 것은 우리 국민은 다소 버거운 경쟁을 견뎌내며 더 빨리 도약할 수 있을 만큼 똑똑하고 억척스럽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는 얘기다.
   한·미 FTA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른바 '진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사전에서 '진보(進步)'의 뜻을 찾아보면 '사회의 변화나 발전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라고 돼 있다. 변화와 발전을 위해선 안 가 본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런데 진보세력은 그때마다 "그 길로 가면 재앙이 온다"고 아우성치며 길을 가로막았다. 고속도로도, 올림픽도, 신공항도, 4대강도 모두 그런 반대를 뚫고 진행됐다. 재앙이 올 것이라는 진보의 예언은 맞은 적이 없다.
   지난 세월 분야별로 개방정책이 나올 때마다 걱정하는 소리가 높았지만 우리 국민은 그것이 늘 기우(杞憂)였음을 증명해 보였다. 1998년 일본 문화 개방이 시작될 때 한국 TV엔 일류(日流)가 넘칠 것이라는 우려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빗장이 열리자 물결은 반대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우리보다 앞선 일본도 미국과의 FTA에 신중하지 않으냐고 겁을 준다. 한국인과 일본인은 확실히 기질 차이가 있다. "일본인은 매사에 조심스럽고 신중해서 준비가 완벽하지 않으면 일을 시작하지 않지만, 한국인은 약간의 위험을 감수하고라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한국은 도전 정신과 모험심으로 무장했기 때문에 새로운 기회가 닥쳤을 때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보세력이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떠받드는 안철수 교수의 저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에 나오는 구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