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아버지의 자리
조선일보 2011. 05. 11.
어느 친구 이야기다. 그가 고등학교 다닐 때 무슨 상을 탔다. 그런 후 시골 사는 아버지가 서울에 있는 아들 다니는 학교에 찾아오셨다. 아들이 상 탄 게 너무 기뻤을 것이다. 선생님께 고맙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싶었을 수 있다. 하지만 아들은 초라한 차림의 아버지가 부끄러웠다. 친구는 아버지를 교실 밖에서 만나 돌아가시라고 했고, 아버지는 어깨가 처진 채 되돌아갔다. 친구는 "나이를 먹고서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됐다"고 했다.
▶시인 손택수는 어려서 목욕탕에 가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그의 아버지는 절대 목욕탕에 가질 않았다. 할 수 없이 여덟 살까지 어머니 따라 여탕에 가야 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해 적개심까지 품게 됐다. 시인은 커서 아버지가 쓰러져 누우신 뒤에 왜 목욕탕에 한사코 가시지 않았는지 알게 됐다. 등짝에 살이 시꺼멓게 죽은 자국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지게꾼을 오래 했다. 등짝의 지게 자국을 누구에게도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여성가족부가 조사해봤더니 어머니의 19%가 자녀들과 대화가 부족하다고 대답했다. 아버지들에선 그 비율이 34%로 뛰었다. 한국의 아버지는 대개 무뚝뚝하다. 어느 소설가는 "아버지와 평생 나눈 대화를 원고지에 적는다면 다섯 장 이상은 아닐 것"이라고 썼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한국 교포사회에서 '아버지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에 관한 특집기사를 실었다. 한국 아버지들은 자식들과의 교감에 너무 서투르다는 것이다.
▶어느 과학자가 122명을 상대로 실험을 했다. 피(被)실험자가 모르는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버지·어머니 사진을 흩트려 놓고 부모·자식 사이를 맞춰보도록 했다. 그랬더니 자식과 아버지의 짝을 제대로 맞춘 비율이 자식과 어머니 짝을 맞춘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자식의 얼굴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닮는다. 1995년 과학잡지 네이처에 실린 내용이다. 나이 들고 나서 면도하다가 아버지 얼굴을 발견하곤 깜짝 놀란다는 아들들이 많다.
▶그렇지만 자식들은 엄마가 더 편한 모양이다. 아내를 통해 듣는 얘기를 보면 아버지한테와는 영 다르게 자기 속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는다. 우리 아버지들이 감정 표현에 인색한 탓도 있을 것이다. 속으론 친구처럼 정답게 굴어주자고 마음을 먹어도 막상 자식 앞에선 속과 다른 말이 튀어나온다. 집안에서 자리가 더 좁아지지 않으려면 아버지 하는 법도 배워야 하는 세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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