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이슈

[양상훈 칼럼] 미군 주둔이 낳은 病

도깨비-1 2010. 6. 30. 10:40

[양상훈 칼럼] 미군 주둔이 낳은 病

          제 자식이 죽었어도 천안함 괴담 휩쓸릴까
          우리에게 나라 지키기는 내 일 아닌 남의 일
          미군 방패막이 뒤에서 비겁함·무책임 자란다

 

  -양상훈 편집부국장/2010년 6월 30일 조선일보

 

   천안함 사건으로 제일 먼저 대북 규탄 결의안을 낸 것은 미국 의회였고, 그 다음이 유럽의회였다. 한국 국회는 제 나라 군인 46명이 죽었는데 외국보다 늦게 결의안을 채택했다. 한국에선 이 기막힌 일도 별일이 아니다.
   야당은 대북 규탄 결의안에 반대했다. 북한 소행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야당의 누구는 "(국제합동조사단 발표는) 소설"이라더니 나중엔 "북한이 그런 나라인 줄 몰랐냐"고 했다. 또 누구는 "우리는 북한 소행이 아니라고 한 적이 없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정부가 북한이 했다니까 북한이 했다고 치자"고 한다. 46명 주검 앞에서의 말장난이다.
   야당도 뻔히 범인을 알 것이다. 지목하기 싫을 뿐이다. 북한이 좋아서라기보다는 이명박 정권이 싫어서다. 같은 국민 46명이 떼죽음을 당한 사태 앞에서도 우리끼리 싸우느라고 범인을 제쳐놓는다. 이러는 우리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천안함 국제합동조사단의 조사 결과에 정말 문제가 있다면 중국과 러시아가 벌써 들고 나왔을 것이다. 그들이 한 달이 지나도록 끙끙대고만 있는 것은 사실 자체는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에선 여론조사 결과 21%의 국민이 천안함 사태가 북한 소행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20대(代)는 믿는 사람 42%, 안 믿는 사람 47%다. 학력이 높을수록 안 믿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 한 대학 교수는 "내 주변엔 90%가 안 믿는 것 같다"고 했다. "안 믿는다"고 해야 뭔가 아는 것처럼 보이는 풍조까지 있다. 안 믿는 이유를 들어보면 전부 본질과 상관없는 지엽말단이거나, 인터넷의 황당무계한 음모론이다. 배웠다는 사람들이 지금도 '자작극'이라거나 '미국 핵잠수함이 천안함과 충돌해 백령도 앞바다에 빠져 있다'는 얘기를 한다. 우리는 정말 어떤 사람들이길래 이러는가.
   제 자식, 제 형제가 죽었으면 절대 이러지 못할 것이다. 남의 일이기 때문에 무책임한 것이고, 남의 일이기 때문에 장난처럼 함부로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는 '나라를 지키는 일'이 우리 일이 아니라 남의 일이다.
   우리 외에 우리를 지켜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면 누구든 절박해진다.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천안함이 침몰했을 때 청와대가 '북한은 아닌 것 같다'는 무책임한 말부터 내뱉은 것이다. 절박하지 않기 때문에 군 미필 대통령이 이렇게 많이 선출되는 것이다. 안보 절박감이 없기 때문에 대통령이 군 미필자들을 장관에 이렇게 많이, 심지어 안보 책임자로까지 임명하는 것이다. 절박하지 않으니 합참의장이 군함 침몰을 49분 만에 보고받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우리끼리 뭘 해도 누군가 지켜줄 것으로 믿기 때문에 여(與)든 야(野)든 안보를 놓고 북풍, 역북풍 장난을 하는 것이다.
   자기밖에 자기 자리를 지킬 사람이 없다는 절박한 의무감이 있다면 전쟁 날까 무서워서 엄마한테 전화 건 병사들은 없었을 것이다. 그 병사들은 '병역필'도장을 받으려고 입대했는데, 나라 지킬 일이 생기니 당황한 것이다. 일부는 주가 떨어질까봐 북한에 책임 묻는 것을 반대한다고 한다. 제 돈 지키는 것은 자기 일이지만, 나라 지키는 일은 남의 일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끼리 무슨 일을 벌여도 뒤에는 미군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 의존증은 이제 한국인의 무의식 속에 뿌리를 내린 것 같다. 국방연구원 여론조사에 따르면 '자유민주 체제를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할 수 있다'는 질문에 38%가 '그럴 생각 없다'고 답했다. 전쟁이 나면 군인으로 싸워야 할 20대 중 '싸우겠다'고 답한 사람은 27%에 불과했다. 국민의 61%는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이 매우 혹은 대체로 낮다"고 인정했다. 다른 조사에서 국민 3명 중 1명 정도는 북한 핵이 우리 아닌 다른 나라에 위협이거나 아무에게도 위협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6·25 책임이 김일성이 아니라 남·북에 다 있다거나, 한·미에 있다는 사람이 4명 중 1명이다. 김정일 군대를 지척에 두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나라를 지키는 일이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남 얘기 하듯 하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나라를 지켜 본 지 최소 수백년이 지났다. 집안의 가장(家長)이 제 집을 제 힘으로 지키지 못하고 남에게 안전을 의탁하면 그 가족은 병들 수밖에 없다. 정신이 썩는 병이다. 천안함 괴담은 우리 사회가 얼마나 병들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주한미군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우리가 미군의 덕을 본 만큼, 우리 사회의 병도 깊어졌다. 전쟁을 막으려면 미군이 있어야 하지만, 이 방패막이 뒤에서 우리의 비겁함과 무책임은 도를 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