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과 내일/박성원]대한민국과 마루 이등병
동아일보/2009-12-28 20:00 2009-12-29 00:40
1951년 9월 12일 강원 화천군 적근산 전방 5km 지점. 동료 소대원들과 함께 고지(602m)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레마 마루 이등병은 밀려드는 중공군에 맞서 기관총을 부여잡았다. 에티오피아 동료 부대원들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정상에서 홀로 적과 맞선 마루 이등병은 이날 교전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에티오피아군은 6·25전쟁 당시 6037명이 참전해 121명이 전사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당시 국왕은 자신의 근위대 ‘칵뉴(Kagnew)’ 부대를 보내면서 “침략군을 격파하고 한반도에 평화와 질서를 확립하고 돌아오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그리스의 종군기자가 에티오피아 참전용사들의 참전기를 다룬 책 ‘칵뉴’는 내년 초 한글로 번역돼 국내에도 소개될 예정이다.
한 선배 언론인은 얼마 전 터키를 방문했을 때 한국전 참전용사들의 기념탑을 발견하고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60여 년 전 대한민국은 과연 터키 청년들에게 무엇이었을까. 영국 BBC방송 기자 출신인 앤드루 망고는 ‘오늘의 터키’라는 책에서 터키의 한국전 참전과 유럽지역 집단안보기구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가입이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고 썼다. 터키인들이 한국전에 참가해 용감하게 싸우고 유엔에 기여함으로써 터키의 나토 가입에 부정적이던 미국과 서구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이다.
나토는 내년 상반기에 열리는 아프가니스탄 파병국 회의에 한국군 대표를 보내달라는 공식 초청장을 최근 우리 정부에 전달했다. 파병국 회의라니! 정작 국회에선 야당의 반대로 지방재건팀(PRT)의 보호병력 파견을 위한 파병동의안조차 처리하지 못하고 내년 2월로 미룬 상황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의 1인당 평균소득을 밑돌던 나라에서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14위로 성장한 우리가 국제무대에서 범세계적 안보현안을 함께 논의할 기회를 스스로 막고 있는 셈이다.
야당과 좌파 단체들은 아프간 파병이 한국인들을 탈레반의 표적으로 만들 위험성이 있다거나 심지어 명분 없는 미국의 용병으로 내모는 것이라고 목청을 높인다. 이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설립된 국제안보지원군(ISAF)에 참여하고 있는 42개 아프간 파병국에 대한 모독이다. 또한 2007년 바그람 기지 앞에서 임무수행 중 산화한 다산부대 소속 윤장호 하사에 대한 결례(缺禮)다. 윤 하사의 부친 윤희철 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가슴은 아프지만 자원해서 국가와 세계평화를 위해 봉사하다가 희생된 아들이 여전히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패망 위기와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내년도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개최국까지 된 나라가 전투도 아닌 재건 임무에 320명의 보호병력조차 보내지 못한다면 국제사회가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인가. 아랍에미리트(UAE)에서 400억 달러(약 47조 원) 규모의 원전수출 계약을 따내면서 국제사회의 궂은일엔 손을 내젓는다면 글로벌화된 세계의 주요 국가를 자임할 수 없다.
정부는 내년에 해외파병 상설부대를 창설할 계획이다. 예산전쟁에 빠져 있는 정치권이 군사외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한국군의 국제적 위상을 높여 나가는 일에 힘을 보태기는커녕 발목이나 잡는다면 이보다 더 큰 자해(自害)행위가 또 있을까. 미국 워싱턴의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공원 외벽에는 이런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다. ‘자유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박성원 논설위원 sw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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