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大中 칼럼] 法大 유감
깊은 세상 경험과 넓은 상식 외면하고
출세로 매진한 법대생을 경계했던 교수님
지금 튀는 판결의 주인공들 바로 그 '법대생' 아닌가
- 김대중 고문/ 2010년 1월 24일/ 조선일보
대학 초년생 시절, 민법(民法)을 가르쳤던 김증한(金曾漢) 교수가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법과(法科)대학이란 똑똑한 아이들 데려다가 바보 만들어 내보내는 곳"이라고. 그때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성적 좋은 학생들 뽑아다가 판·검사 만드는 학교라서 그렇게 입학경쟁이 치열한데 그것을 '바보 만드는 곳'이라니, 교수의 말장난이 너무 심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교수가 왜 그런 표현을 썼는지 어렴풋이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김 교수는 대학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고시공부에 돌입하면서 학교수업은 뒷전이고 절(寺)이나 고향집(당시는 고시촌이 없었다)에 처박혀 육법전서(六法全書)와 씨름하는 학생들이 인문(人文)교육과 세상 물정에 소홀한 것을 지적한 것이다. 세상의 이치와 삶의 가치, 교양과 상식. 이런 것들을 외면하고 오로지 출세를 향해 매진하는 젊은이, 고등고시를 인생의 유일한 지름길로 여기는 학생들이 결국 인간적으로 불완전한, 공부만 잘하면 만사가 형통이라는 오류에 빠진 외골수 인간으로 자라는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물론 김 교수의 생각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니었다. 나라의 발전에 기여한 많은 인재(人材)가 법률 공부를 통해서 나왔고 그것이 나라의 법치주의를 확립하는 데 큰 틀을 제공했던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개발의 논리가 득세하고 권력이 거기에 앞장섰던 시절, 법을 수행하는 많은 법조인들이 뒤틀리는 세상을 법으로 지켜 싱그러운 바람을 불어주곤 했었다.
그러면서도 김 교수의 지적은 여전히 옳은 측면이 있다. 인신(人身)을 규제하고 재화(財貨)를 다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동시에 인간이 인간사에 개입하고 인간을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다. 어찌 보면 그것은 절대선(絶對善)의 영역이다. 그래도 세상을 아노미 상태로 둘 수 없기에 인간이 인간을 심판할 때 쓰도록 '법'이라는 잣대와 '양심'이라는 보조기구를 두었다(헌법 103조). 법을 제대로 해석하고 양심을 제대로 발동하기 위해 법을 다루는 사람은 보다 많은 지식과 깊은 경험과 넓은 상식을 지녀야 하는데 법대생들은 오로지 사전적(辭典的) 지식에 매달리는 사태를 김 교수는 걱정한 것이다. 그가 말한 '바보'는 법을 다룰 자격이 없는 인간적 장애를 의미한 것이었다.
교수는 이런 의미의 말도 했었다. "가족 중에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은 교통사고 재판을 하면 안 된다. 가족 중에 의료사고를 당한 사람은 의료사고나 분쟁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 성(性)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이 말의 깊은 뜻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어떤 편견이나 선입감도 인간을 재단하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사회의 공분을 사는 판결은 대체로 자신의 잣대가 지선(至善)인 양 여기는 아집과 세상에 대한 저항감을 진보적이라고 여기는 착각에서 나왔다.
원로 법조인들은 최근 강기갑 무죄, PD수첩 무죄 등 일련의 '편향적 판결'을 두고 헌법이 명시한 재판관의 '양심'이란 판사 개인의 양심이 아니라 사회에서 보편타당하게 받아들이는 가치나 이념을 말한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양심은 신념과 다르다. 법은 건전한 상식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일반사회인들의 법 감정과 맞아야 한다. 과거 사법이 권력에 저항했을 때 박수받은 것은 그것이 일반사회인의 법 감정, 정치감각, 사회적 형평 감각과 맞았기 때문이다. 단순히 용기가 있어 박수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강기갑 의원의 '공중부양'사건이 군부독재 시절 민주탄압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법원이 그에게 무죄 판결을 했다면 온 사회의 박수를 받았을 것이다.
일반사회의 법 감정은 만고불변이 아니다.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따라서 재판도 시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간통죄, 사형제도, 동성결혼 등에 대한 상식과 법 감정은 변하고 있고 따라서 판결도 달라지고 있다. 이번 '튀는 판결'들이 사회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은 법해석이나 '양심'의 문제라기보다 그 판결이 사회적 보편성, 시대적 법 감정 등과 너무나 동떨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우리 사회는 이제 국회의 무기력과 폭력에 분노하고 언론의 왜곡보도를 용납하지 않는 시대로 가고 있다. 그것을 몰랐거나 무식해서 용감했다면 이들은 김 교수가 지적한 '법대생'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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