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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에게] 한글은 영어 '발음기호' 아니다 - 조선일보

도깨비-1 2010. 2. 3. 12:02


[편집자에게] 한글은 영어 '발음기호' 아니다

외국어 표기 한글 새 문자 논쟁(반대)

 - 이덕환/서강대교수/조선일보 2010. 02. 03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나타낼 수 있도록 한글 새 문자를 더 만들자는 것은 물론 가능한 주장이다. 인간의 발성 특성을 충분히 고려한 진정한 표음(表音)문자인 우리 한글이 그만큼 유연하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한글 창제원리를 제대로 활용하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나타낼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에게 한글을 보급하게 된 것이 그 증거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한글로 다른 언어의 발음을 제대로 적을 수 있다고 해서 우리 국민이 모든 언어를 발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영어 발음을 정확하게 적기 위해 한글을 바꾸자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철학과 예술에서는 독일어와 프랑스어도 영어만큼 중요하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사람도 엄청나게 많다. 앞으로 중국어와 러시아어도 무시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말과 글의 진정한 발전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은 외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적으려는 노력이 아니라는 뜻이다.
   
   새 문자 도입해도
   모든 발음 표현 못해
   외래어는 우리말化된 것
   다른 나라도 원어 안따라가

  
   영어의 'file'과 'pile'을 똑같이 '파일'로 적어 구별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렇다면 눈(眼)과 눈(雪)이 구별되지 않고, 벌(蜂)과 벌(罰)이 구별되지 않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어야 한다. 같은 발음의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어떤 언어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다. 우리가 굳이 모든 영어 단어를 구별해서 적어야 할 필요는 없다. 더욱이 몇 개의 자음을 구분한다고 영어 발음이 정확하게 표현되는 것도 아니다. 영어의 악센트와 장단을 표기하는 방법도 함께 개발해야 한다. 물론 그런 일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한글이 영어의 '발음기호'가 될 이유가 없다. 혹시 영어를 사용하는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로마 알파벳을 포기하고 한글을 쓰도록 할 생각이라면 또 모르겠다.
   한글에 대한 이런 논란은 '외래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외래어는 다른 언어에서 유래되었지만 더 이상 외국어가 아닌 우리말이다. 그런 우리말을 원어와 똑같이 발음하고 적어야 한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우리가 발음하기 편하고, 우리말과 잘 어울리도록 만들면 되는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생각이 아니다.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 로마 알파벳을 공유하는 유럽의 다양한 언어에서는 똑같은 단어를 서로 다르게 발음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의 이름을 각자 언어의 입맛에 맞도록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한다. 원어 발음에 신경 쓰지 않는다. 굳이 원어의 발음과 의미를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으면 원어 표기를 그대로 쓰면 된다. 우리도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다.
   이번 논란은 맞춤법과 띄어쓰기조차 통일시키지 못하고, 외래어표기법을 두고 갈팡질팡해왔던 어문당국이 자초한 일이다. '어륀지' 소동에도 말 한마디 못하고 인터넷에 난무하는 황당한 신조어도 방치해왔던 어문당국이 먼저 반성해야 한다. 과거의 낡은 원칙에만 얽매여 있어서는 안 된다. 우리말 순화를 앞세워 된소리로 시작하는 외래어를 거부하는 원칙의 재검토도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