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ESSAY] 반딧불이의 교만 - 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1. 26. 10:51


[ESSAY] 반딧불이의 교만

그나저나 이웃들에게 "교만하지맙시다" 하고
말을 꺼내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을 테니
이 일을 어찌할거나. 큰일이다.

 

     박명재/CHA의과대학 총장 . 前 행정자치부장관 - 조선일보 2009년 11월 24일
 

   이런 인도 속담이 있다. "해가 저물면 반딧불이는 '우리가 세상에 빛을 준다'고 생각한다." 반딧불이가 그런 생각을? 비슷한 마다가스카르 속담도 있다. "쇠뿔에 앉은 개미는 자기 때문에 쇠머리가 흔들린다고 생각한다." 설마 개미가? 비록 미물들이지만 교만한 우리 인간들에게 주는 참으로 긍정적인 교훈이고 표현이다.
   교만. 성서 말씀에 "남의 눈의 티끌을 지적하기는 쉬워도 제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들보에 교만만한 것이 어디 있으랴 싶다. 특정 직업군(職業群)을 예로 들어서 안됐지만, '교만한 교수' '교만한 군인' '교만한 배우' '교만한 상인' 등 아무리 열거해봐도 '교만한 공무원' '교만한 의사'만큼 꼴불견인 경우도 없는 것 같다. 내가 한때 몸담았던 곳이거나 지금 일하고 있는 곳과 관련 있어서인지 그런 말을 들을 땐 더 마음이 아프다.
   특히 의사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오진(誤診) 가능성 앞에, 신의 가호와 환자의 의지, 그리고 불치(不治)를 완치(完治)로 바꿔내는 섭리와 기적 앞에 한없이 겸손해도 부족하다. 반딧불이만한 명성과 지위 때문에 우쭐하고 교만해진 의사와 의학도가 우리 주위에 없다고 어찌 말할 것인가.
   논어에서는 군자가 갖춰야 할 덕성으로 5가지 미덕(美德)을 뜻하는 군자오미(君子五美)를 꼽았는데, 그 넷째가 태이불교(泰而不驕)다. 자유롭되 교만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위가 높고 많이 가진 사람이 될수록 경계하기 힘든 것이 교만이다.
   사람의 교만에 관한 이야기는 유독 프랑스 사람이 압권이다. 루이 14세는 "짐이 곧 국가다"라고 했고, 나폴레옹 1세는 "이 무릎은 신(神) 말고는 아무에게도 굽히지 않는다"고 했다. 아마 스스로를 태양에 견준 사람들이니 절대군주의 위세와 권세를 한껏 과시할 때 그 교만함이 하늘을 찔렀을 것 같다.
   20세기 프랑스 샤를 드골 전 대통령 역시 자기 과시와 자기 존재에 대한 교만의 정도가 앞의 전제 군주들 못지않았다. 재임시 드골은 낮잠을 자면서 사무실 문에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나를 깨우지 말라"는 경고문을 걸어 놓았다 한다. 적어도 인류의 안위와 종말에 관계되는 제3차 세계대전과 같은 세계적 문제 외에는 나의 낮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거드름'이다.
   또 1961년 알제리 문제에 대한 국민 투표에서 자신을 지지한 국민에게 감사할 필요가 있지 않겠느냐는 한 친구의 제안을 받고 드골은 "프랑스가 어떻게 프랑스한테 감사를 한단 말인가"라고 거절하였다. '짐이 곧 국가'라는 루이 14세를 흉내낸 것인가.
   그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드골은 곧잘 재임시를 회고하면서 "내가 곧 프랑스였던 시절" 운운하였다. 프랑스의 영토, 국민, 주권, 국체, 정체 모두가 바로 자신이었고 자신이 곧 프랑스와 대체될 수 있다는 교만이었다.
   그러나 드골의 이 극단적 교만에도 불구하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신뢰했다. 그의 교만은 자기 고집만을 위한 덜 여물고 순치되지 않은 저급한 교만이 아니라 국민에게 신뢰와 희망을 안겨주는 국민통합과 국가유지의 구심점 역할을 하는 확신과 자부심의 상징이었다.
   교만이란 바이러스는 전염력이 너무 강하다. 현재 우리 사회에 전개되고 있는 갖가지 얽히고설킨 정치적, 사회적 혼란과 갈등 뒤에도 설익고 정제되지 않은 교만이 도사리고 있다.
   행정복합도시 문제를 둘러싼 첨예한 대립, 4대강 보존·개발에 대한 여와 야, 환경단체 등의 끝없는 갈등, 미디어법 제정을 비롯한 각종 정책에 대한 여와 야의 지루하고 답답한 정쟁, 특히 남북문제에 대한 북한 김정일의 끝없는 오만과 독선 등을 지켜보면서 더욱 그러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이분법적 사고에서 대치적, 적대적 관점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자기 교만과 독선으로 문제를 재단하고 해석하려 한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의 갖가지 갈등과 논쟁, 간극의 근저에 분명 보이지 않는 자기 교만과 독선이 깊게 자리 잡고 있다.
   반딧불이가 세상을 비추는 빛인 양 생각하는 교만은 일종의 아름다운 착각일 수 있고, 드골 전 대통령의 교만은 프랑스 국민의 자존심이자 국가를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갖가지 갈등 당사자들의 독선과 교만은 '화려한 옷'까지 입고 있다. 때론 권위의 옷을, 때론 존엄의 옷을 입고 온갖 권세를 부린다. 이것이 문제해결을 더욱 어렵게 하고 있다.
   나 스스로에게도 질문을 던진다. 너는 교만과 독선으로부터 거리가 멀다고 장담하는가.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하고 힘까지 실음으로써 한껏 교만의 위세를 부리고 있지는 않은가. 문제 해결의 본질인, 상대에 대한 이해와 관용, 공존과 상생을 발로 차버린 일은 없는가. 스스로 하는 질문 앞에 한없는 자괴감이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우리 모두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괴테의 말처럼 교만한 가슴에는 어떠한 사랑도 싹트지 않고 교만과 사랑은 본시 한 지붕 밑에 동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교만을 내려놓았을 때 비로소 상대방이 보이고 문제의 본질이 파악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된다.
   그나저나 이웃들에게 "교만하지 맙시다" 하고 말을 꺼내는 것보다 더 큰 교만은 없을 테니 이 일을 어찌할거나. 큰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