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생각하며

잘못된 선택에 흘러간 내 청춘… 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0. 29. 20:04

도자기 빚는 前 북한 공작원 '드라마 같은 인생'

 

   조상권(趙相權·73·사진) 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장은 1959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자유와 낭만의 나라인 그곳에서 그는 승승장구했다. 최고 명문 건축학교인 보자르에 입학해 1등을 차지했다.
   그는 파리에서 좌익들과 어울렸다. 그들의 권유로 북한 대사관을 찾기도 했다. 삶이 그때부터 뒤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그는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1963년 조씨는 평양에 발을 디뎠다.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이 터지자 북으로 도피했고 1969년부터 공작원이 됐다. 그는 비밀리에 다른 공작원들의 국적 세탁을 해주는 활동을 했다.
   1997년 한국으로 온 그는 아직도 술기운으로 잠자리에 든다. 여전히 씻을 수 없는 한(恨)을 담아 도자기를 빚는다. 영화보다도 더 극적인 그의 인생 이야기가 처음으로 공개된다. 

 


잘못된 선택에 흘러간 내 청춘…
처자식도 고생… 그 恨을 도자기에

 

[문갑식의 하드보일드]

조상권 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장의 고백 "나는 북한 공작원이었다"
"당시 中情 내부에 간첩 있어… 北 대사관서 피하라 연락 와"


                           문갑식 기획취재부장/ 조선일보 2009년 10월 24일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앞에서 독일 유학생 출신 30대 박사(博士)가 입을 열었다. 훗날 세계적인 헤겔 철학자가 된 젊은이는 임석진(林錫珍·명지대 명예교수)이었다. 1967년 5월 17일 오후 3시 청와대 1층 서재의 광경이다.
   충격적인 고백이 권부(權府)의 심장부를 울렸다. "유학생 시절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교포와 유학생 20여명을 동백림(東伯林·동베를린) 북한대사관에 연결시켜…." 유럽동포에 대한 북한의 공작 실태가 폭로되는 순간이었다.
   대통령의 명(命)을 받은 중앙정보부가 나섰다. 그 해 7월 8일 중정(中情)은 대규모 간첩단사건을 수사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동백림 사건'의 시작이었다. 관련자가 315명이나 됐다. 그 가운데 65명이 기소됐다.
   동백림 사건으로 유럽 한인사회는 격랑(激浪) 속에 빠져들었다. 학계·문화계·언론계 인사들이 줄줄이 연루됐다. 혐의자 중 작곡가 윤이상(尹伊桑)·재불(在佛) 화가 이응로(李應魯)는 A급 혐의자로 분류됐다.
   조상권(趙相權·73)은 당시 프랑스 국립 보자르 건축학교 학생이었다. 그 역시 동백림 북한대사관과 평양에 다녀왔다. 삶의 기로에서 그는 도피를 택했다. 동백림 북한대사관을 거쳐 평양으로 들어가 버린 것이다.
   경기도 이천시 모가면에 그가 이사장인 광주요(廣州窯) 도자문화연구소가 있다. 한복판에는 광호요(廣湖窯)라는 간판이 걸린 가마가 있다. 가마 주변에는 10년을 써도 너끈하다는 소나무 장작더미가 쌓여 있다.
   '광호'는 아버지 조소수(趙小洙)의 호다. 부친은 1963년 광주요를 세웠다. 광주요를 최고 브랜드로 키운 조태권(趙泰權)은 조상권의 열두 살 아래 동생이다. 그곳에서 조상권이 흘러간 42년을 이야기했다.
  
   佛 유학시절 평양 첫 방문
   호화 기차 타고 금강산 구경
   동백림사건 때 北으로 도피
   
■한국, 일본 그리고 프랑스
   고향은 경남 남해지만 그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6남매의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기 드문 대(大)사업가였다. 1945년 광복을 맞아 현해탄을 건널 때 그의 가족이 첫 번째 귀국선을 탈 정도였다.
   아버지는 한국에서 침몰한 배를 건져내는 사업을 했다. 일본에도 회사가 여럿 있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李秉喆), 동아제약 창업주 강중희 같은 기업인과 허정(許政·과도정부 수반) 등 정치인들과 친했다.
   조상권의 외가도 명문이었다. 외조부 윤기열은 구한말 포병사령관을 지낸 독립투사였다. 1917년 일본 헌병대와 싸우다 온몸에 8발의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노태우(盧泰愚)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조상권은 삼천포와 부산에서 잠시 살았다. 부산 토성국민학교 3학년 때 전학 와 경남중 2학년까지 다니다 다시 일본 도쿄 가이조(海城)고로 갔다. 6·25가 터지자 아버지가 서둘러 장남을 안전한 곳으로 보낸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는 부친과 마찰이 잦았다. 어린 아들은 전국을 방랑했다. 12살 때 충남 부여 정림사지 5층 석탑을 홀로 돌아보기도 했다. 변호사가 되겠다던 처음 꿈이 스님으로, 다시 미술학도로 변해갔다.
   아버지는 아들을 '괴짜'라고만 생각했다. 본심(本音·일본어로 혼네)과 겉 모습(建前·다테마에)이 다른 일본인들에게 염증을 느껴 고민하고 있을 때도 아버지는 그걸 이해하지 못했다.
   아들은 자유로운 파리를 동경했다. 그런 그에게 아버지는 "미국이라면 얼마든지 보내주겠다"고 응수했다. 풀지 못한 젊음의 열정을 그는 문학에 쏟았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문학을 그는 제일 좋아했다.
   1959년 한일회담 대표로 친구 허정과 장경근이 일본에 왔다. 조소수는 일행을 하코네(箱根)온천으로 모셨다. 허정과 시무룩한 상권의 대화다. "무슨 일 있니?" "파리에 가는 게 꿈인데 아버님이 허락을 안 하십니다."
   조소수는 당시 파리를 윤락(淪落)의 메카로 생각했다고 한다. 독립운동을 할 때 시베리아를 거쳐 파리까지 가본 허정이 친구의 무지(無知)를 일깨웠다. 그 일이 없었다면 조상권은 프랑스 땅을 밟지 못했을 것이다.
   파리가 정치·문화·예술·교육의 중심지라는 허정의 말에 아버지는 결단을 내렸다. 다음날 곧바로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일본 미술대학생 조상권은 명문 사립건축학교 에콜 아르데큐르 학생으로 바뀌었다.
   첫 6개월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20점 만점인 미술, 건축, 조각에서 3점, 0점, 1점을 맞았다. 아버지 사업이 부진해지자 장남이 정신을 차렸다. 유명 건축가의 자제를 위해 설립한 학교의 우등생이 됐다.
   한창 공부에 재미 붙일 때였다. 프랑스에 갓 유학 온 한국 학생이 염장을 질렀다. 최고 명문 보자르 건축학교에 입학하겠다고 설친 것이다. 주위에서 조상권의 호승심(好勝心)에 불을 질렀다. "자넨 자존심도 없나?"
   조상권은 4년 과정 중에 2년 동안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보자르에 입학했다. 주머니 속 송곳은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법이다. 보자르 건축학교에서 제일 깐깐하기로 소문난 비비안 교수의 눈에 띈 것이다.
   본과(本科) 진학시험에서 그는 1200명 중 1등을 했다. 그때부터 기이한 일들이 벌어졌다. 프랑스 정부는 장학금을 줬다. 한국정부는 조니워커 위스키 2병을 선물로 보내왔다. 동백림 북한대사관은 축전(祝電)을 보냈다.
   조상권은 1961년 한 살 많은 상현숙(尙賢淑·2005년 사망)과 결혼했다. 연상녀(年上女)와의 혼인을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이었다. 양가 모두 반대했지만 두 사람은 굽히지 않았다. 처가에서 최후의 전보가 왔다.
   "허신(許身)이냐?(이미 몸을 주었느냐)" 커플은 결연히 답했다. "Impossible(이제 와 헤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양쪽 집안이 뜻을 굽혔다. 조상권은 2년 뒤 아들, 다시 3년 뒤 딸을 낳았다.
   파리에서 친하게 지내던 이 중에 천재 수학자가 있었다. 인천고, 서울대를 나온 이 좌익이 순진한 건축학도 조상권에게 "동백림 북한대사관에 다녀오라"고 권했다. 몇번을 뿌리쳤지만 끈덕진 유혹에 호기심이 일었다.
   조상권은 파리~독일 프랑크푸르트를 비행기로 날아간 뒤 동백림에 도착했다. 북한대사관 직원이 영접 나와 있었다. 그들은 산해진미(山海珍味)에 지극정성으로 그를 대접했다.
   조상권은 말했다. "그때 보자르 건축학교로 옮기지 않았던들, 1등만 하지 않았던들 운명이 이리되진 않았을 겁니다…. 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 제 역량을 발휘했을 겁니다. 후회해도 이젠 소용없겠지만."
■철없는 선택
   한번 넘어본 벽(壁)을 자꾸 넘는 게 인간이다. 불장난을 말릴수록 더 집착하는 게 사람이다. 장남으로서의 분방(奔放)에, 프랑스의 낭만과 자유로 몸을 푹 적신 조상권이 딱 그 모양이었다.
   아내는 울며 말렸다. 어린 남편은 유교적 가부장(家父長)의 권위로 아내를 눌렀다. 세월이 흘러 조상권은 그 일을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다. 아내까지 떠난 지금 이 70대는 통음(痛飮)으로 밤을 지새운다.
   ―북한을 북괴(北傀)라 부르던 시절이었습니다. 왜 갔습니까.
   "그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런 의식이 강했습니다. 남쪽도 조국, 북쪽도 조국이라는. 한번 구경해보자는 순진한 심리였지요."
   ―북한대사관에서 왜 그리 극진하게 대접했을까요.
   "당시 북한 국력이 남한보다 강했습니다. 온갖 환대(歡待)에 포츠담 구경까지 했어요. 여비도 받았습니다. 대다수 가난한 유학생들에겐 큰 유혹이 됐을 겁니다. 유럽은 아르바이트도 힘들거든요."
   ―북한대사관을 몇번이나 간 뒤 평양에 갔나요.
   "서너 차례 다녀오니 1963년 '평양에 오라'는 제의가 오더군요. 금강산, 백두산 구경이란 말에 솔깃했어요. 러시아문학을 좋아했는데 러시아를 통과해 간다는 말도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때도 아내는 만류했어요. 제가 바보지요."
   ―어느 코스로 평양에 들어갔습니까.
   "동백림까진 다녀봤던 곳이고. 모스크바~옴스크~이르쿠츠크~평양코스였어요. 대남(對南)공작부(副)부장이 영접 나왔습니다. 차관급이었습니다. 금강산에 갈 때 우리 부부용으로 기차 한 량(輛)이 배정됐어요. 침실, 식당에 목욕탕까지 갖춘 초호화판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있었어요."
   ―뭡니까, 그게.
   "일반객차를 타면 북한주민들의 처참한 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우리와 주민을 차단하려는 조치지요. 저는 이산가족상봉이 다 거짓이라고 믿습니다. 북한 쪽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는 직함은 말짱 거짓말일 겁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에 입당했지요?
   "1964년 두 번째 방북했을 땝니다. 안 쓰려 했는데 '형식적인 것이니 그냥 서명하라'고 해서. 갈 때마다 좋은 대접을 받았어요. 신상옥·최은희 부부가 묵은 초대소는 B급입니다. 저희는 특A급에 있었어요. 김일성(金日成)도 만났어요. 신의주 방직공장 완공식 때였습니다."
   ―평양 방문에 노동당 입당까지…. 순진하다는 말로 설명이 될까요.
   "당시 남한의 정경(情景)은 '비참' 그 자체였습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가겠지만."
   ―첫 지령(指令)이 뭐였습니까.
   "1964년 동경올림픽 전에 '서울에 다녀오라'는 지령이 왔습니다. 북한 담당자는 '사람 좀 포섭해오라'고 했지만 대남공작부장 류장식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장기적 목적으로 절 쓰겠다는 거지요. 류장식은 7·4남북공동성명 때 서울에도 왔습니다. 얼씨구나 하고 3개월간 전국의 사찰을 둘러봤지요."
   ―그런데도 당시 중정은 조 선생의 정체를 몰랐습니까.
   "당시 주불 대사관의 중정요원이 고압적이었어요. 하루는 우리 집에 놀러 왔는데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으니 '며칠 후 서울에 간다는데 내가 모함하면 좋을 것이 없잖소'라며 협박하더군요. 실제로 모함했어요. 출국하는 날 김포공항에서 중정에 끌려갔거든요."
  
   "잘못 왔다" 첫날 아내와 통곡
   
   ―간첩인 게 탄로 났나요?
   "민족일보 사건의 조용수씨가 먼 친척입니다. 그걸 들먹이며 '파리 집에 인공기(人共旗)가 걸려 있다면서?' '부친이 사상이 불온한 자들에게 장학금을 준다며?' '당신 북한 노래를 부른다며?' 뭐 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해프닝은 1주일 만에 끝났습니다. 중정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선생은 공산주의잡니까.
   "그때도 아니었고 지금도 아닙니다."
   ―간첩은 맞죠.
   "맞습니다. 공작원을 했으니까요. 지금은 아니지만."
■동토(凍土)의 땅으로
   1967년 동백림 사건이 터졌다. 중정에서는 비밀리에 혐의자들을 강제 연행했다. 조상권은 미리 몸을 피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동백림 사건 수사 때 벌어진 납치, 강제연행, 고문은 나중에 조작 의혹을 낳는다. 조상권은 "중정 내부에 북한 간첩이 있었다"고 했다. "동백림 북한대사관에서 중정의 작전을 알 리 없잖아요. 저에게 피하라는 연락을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동백림 북한대사관이었습니다."
   ―왜 도피를 북한으로 했습니까. 잘못될 것이란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처음에는 기숙사에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기숙사는 프랑스 경찰도 출입하지 못하는 곳이었어요. 그런데 계속 '1주일만 쉬었다 오라'기에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내는 그때도 반대했어요. '당신 다시는 한국에 못 들어간다'고도 했어요."
   ―동백림 사건 연행자 구출 운동도 했지요.
   "동백림 북한대사관에서 낸 성명서에 제 이름을 썼습니다. 당시 성명서에 넣을 번듯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 저밖에 없었습니다."
   ―북한에 살러 가니 무슨 일이 벌어지던가요.
   "6개월간 세뇌교육을 받았습니다. 황장엽(黃長燁) 수준의 유명 학자들을 불러 종일 강의를 들었습니다. 파리에서 다섯 가족, 독일에서 온 1명이 있었지요."
   ―북한은 왜 유럽 유학생들에게 호감을 보인 겁니까.
   "우리에게 장·차관(長次官) 대접하라는 건 김일성의 지시 때문입니다. 중국 공산당 유소기·주은래·주덕이 다 프랑스 유학을 했잖아요. 김일성은 프랑스 유학생에게 좋은 인상을 가졌답니다."
  
   김일성, 佛 유학생에 호감
   
   ―간첩교육도 받았겠지요. 혹시 살인교육은?
   "간첩교육은 받았지만 살인교육은 안 받았습니다. 저 같은 사람에게 살인교육 시켜봤자 제대로 하겠어요?"
   ―세뇌교육 뒤에는.
   "초대소에서 일반 아파트로 나갔지요. 보통보다 좋은 시설이었습니다만, 첫날 아내와 부둥켜안고 울었어요. 전에는 겉모습만 봤는데 뒷골목을 처음 본 거지요. 지저분하기 짝이 없고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형편없는 모습에 '잘못 왔구나' '이건 사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평양에 같이 간 다른 가족들도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 거리에 나간 날 아내가 소매치기를 당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일에 심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실망한 표정에 그들이 뭐라던가요.
   "아내가 대남(對南)방송 중 변소에 갔다가 놀라 '너무 더럽다'고 말한 걸 누군가 고발했어요. '대우를 잘해주니 배가 불렀구나' '남조선 혁명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느냐'고 핀잔을 받았어요. 그날 밤 가족이 대성통곡을 했어요. 류장식 때문에 살았습니다. '변소가 더러우니 더럽다고 한 거지'라며 편들어줬어요."
   ―김일성도 자주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국회의사당 같은 곳의 접견실에서 45분간 단독으로 만났습니다. 죄과(罪過)를 별개로 친다면 김일성은 대단한 인물이었습니다. 저를 보자마자 '유럽에 있다 우리 실정 보니 말도 아니지?' '미제(美帝) 놈들이 통일을 막아 이리된 거야'라며 사람을 녹이더군요. 김일성을 그 후 열번도 넘게 만나고 '1호 행사'에도 참석했는데 들은 이야기가 많아요."
   ―무슨 이야긴가요.
   "문선명(文鮮明) 목사와 조찬할 때는 '목사님, 기도를 하셔야지'라고 선수를 쳤어요. 이후락(李厚洛) 중정부장은 방북하자마자 지하 탱크공장에 데려가 기를 죽여놓은 뒤 '당신은 영웅이오!'라며 비행기를 태웠답니다."
   ―김일성이 남침에 의욕을 보이던가요.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소련 놈하고 중국 놈들이 꽹과리만 쳐줘도 당장 남조선을 먹겠는데….' 양쪽 지원 없이는 절대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뜻이지요. 저놈(북한)들도 바보가 아니거든요."
   ―요즘 한국에선 좌파, 우파를 막론하고 김정일이 통이 크다, 매우 솔직하다고 아양을 떠는데.
   "한마디로 똘마니지요. 깡패 두목이니 통이라도 커야지요. 김일성은 담배를 많이 피웠지만 절대 외국 담배는 안 피웠어요. 김정일과는 다릅니다. 김정일은 절대 지식인층을 안 만납니다."
   ―1호 행사에 자주 갔으니 기쁨조도 봤겠습니다.
   "기쁨조는 무대 위에도 나오지만 남쪽에서 생각하는 기쁨조를 데리고 노는 장소는 따로 있어요. 기쁨조가 나오는 모임의 참석자들은 절대 운전사를 데려오면 안 됩니다."
  
   70년대 남미서 국적세탁 공작
   
■종횡사해(縱橫四海)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 교육을 받다 간첩으로 전락한 부부는 1969년부터 공작원이 됐다. 처음에는 일본인으로 위장해 만든 가짜 여권으로 유럽 일대를 다녔다. 이 임무는 1971년까지 계속됐다. 그때 그는 꾀를 냈다. 류장식에게 '남미에서 활동해보겠다'고 제안한 것이다. "남미는 나치스 잔당들이 신분을 세탁할 만큼 모든 게 허술합니다. 교포 포섭이 쉽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류장식은 선뜻 넘어갔다.
   ―맨 먼저 아르헨티나로 갔지요. 아내와 함께 나가는 걸 허락하던가요?
   "처음엔 혼자 다녔어요. 나중에 '부부로 위장하는 게 낫겠다'고 담당자들을 여러 번 꾀었습니다. 제 아이들이 북에 남아 있으니 허락했을 겁니다. 아르헨티나에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생계를 자체 해결해야 했는데 할 줄 아는 게 없었습니다. 함께 털실공장에 취직했지만 하루 한 끼 먹기가 힘들었습니다."
   ―북한에서 공작금을 안 주던가요.
   "받았지요. 그런데 그건 쓰면 안 됩니다. 북한에 정기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비행기 값만 얼맙니까. 굶어도 쓸 수 없지요."
   ―무슨 활동을 했나요.
   "제 목적이 국적세탁입니다. 직접 해 본 뒤 다른 공작원들의 시민권이나 여권을 만들어줬습니다."
   ―그게 가능한가요?
   "다는 아니지만 남미가 유럽보다 교육수준이 낮습니다. 시골은 더 그래요. 시골등기소에 가면 의심 없이 서류를 해줍니다. 저는 일본인 행세를 했어요. 국적세탁에는 원칙이 있어요. 말단 공무원이 제일 쉽고요, 돈을 쥐여주는 건 기본입니다. 그게 요령이에요."
   ―1974년에는 파라과이로 갔지요.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했으니 파라과이 국적을 획득해보려 했는데 생각보다 어려웠습니다. 거기선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수도 아순시온에선 그때 대문을 조각(彫刻)으로 장식하는 게 유행했어요. 제 전공이 뭡니까? 몇번 해주니 금세 소문이 나 감사원장, 장관 같은 고위층과도 친해졌습니다. 목공소까지 차렸습니다. 아내가 송상(松商)의 후예인데 소질이 그때 나오더군요. 저는 그 돈으로 환투기를 했고, 나중에 재산이 17만달러까지 늘었습니다."
   ―그 뒤에도 캐나다, 과테말라, 에콰도르까지 갔지요.
   "다 국적세탁이 목적이었습니다. 최종 목적지는 미국이었습니다만, 캐나다에서 실패했어요. 에콰도르에선 단추사업을 했습니다. '따과'라는 나무 열매로 만든 단추가 고급 의상에 쓰이는데 제가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월북자는 대개 김철수로 칭해
   
   ―그 정도로 자유롭게 공작할 정도면 거물이었던 모양입니다. 재독학자 송두율(宋斗律)이 북한에서 '김철수'로 불리며 서열이 꽤 높았다는 설이 있는데 그 정도는 됐나요.
   "아! 그건 남쪽에서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제가 1971년 북한에서 열린 중요한 국제대회 때 남조선 대표단 자격으로 참석했습니다. 그때 제 이름이 '김철'이었어요. 북한에선 밖에서 온 사람들을 대개 '김철수'나 '김철'로 부릅니다. 고유명사가 아니에요."
   ―그런데 무슨 간첩이 그렇게 지냅니까? 북한에서 의심하진 않던가요.
   "몇 차례 위기가 있었습니다. 1974년과 75년에 무척 비판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노동당에서 저희 부부를 두고 말이 많았답니다. 반(半)은 변심했다고 하고 반은 그럴 리 없다고 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1981년에는 귀화(歸化)했다고 보고하니 깜짝 놀라면서 '빨리 평양에 들어오라'는 지령이 내려왔어요. 그때 들어가 보니 아이들이 바닥생활을 하고 있더군요."
   ―자제들이 아버지를 잘못 만나 고생했군요.
   "아이들은 혁명학원에 다녔어요. 저희가 밖으로 도니 아이들 대접도 점점 나빠졌지요. 1981년 입북(入北)할 때 제가 온다니 부랴부랴 아이들을 좋은 집으로 옮겼답니다. 북한에서는 이사할 때 그전에 살던 집의 방바닥까지 다 뜯어봅니다. 그때 놀랐대요. 다른 공작원들은 시계도 사다주고 옷도 가져다주는데 우리 집에선 아무것도 안 나왔으니. 대남공작부에서 감동했다는 이야길 나중에 들었습니다."
   ―진짜 맨손으로 갔습니까.
   "아이들에겐 안 해줬지만 간부들에겐 선물을 사갔지요. 공작금이 대개 남아요. 러시아에서 만드는 약(藥)의 수준이 높습니다. 모스크바공항에서 약을 잔뜩 사 한 꾸러미씩 주면 입이 쩍 벌어지지요. 그렇게 관계를 맺어서인지 저는 다른 공작원들과 달리 사후(事後)보고를 했어요."
   ―남미에서 그렇게 자유롭게 살면서 남한의 가족과 연락을 취해볼 생각은 안 했나요.
   "제가 1967년에 평양으로 들어갔으니 연락할 방도가 없었지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은 한인신문을 보고 알았어요. 아버지는 1988년에 돌아가셨는데 그때 제가 본 신문은 8이 0으로 오자(誤字)가 난 겁니다. 저는 '아! 1980년에 세상을 뜨셨구나'라고만 생각했지요."
   ―북한공작원 생활을 탈피할 생각은 언제부터 한 겁니까.
   "1990년대 초 동구권이 붕괴됐습니다. '이제 살 길을 찾아야겠다'고 한 건 북한 붕괴가 머지않아 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남미에 남아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안기부 파견원을 저나 아내 생일날 초청하기도 했어요. 우리 생년월일을 알면 정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전혀 눈치 채지 못하더군요."
   ―그래서요.
   "하는 수 없이 그와 술을 마시면서 몇몇 대사 이름을 댔지요. A대사는 제 매제(妹弟), B대사 부인이 제 여동생과 학교 동기, C대사는 제 아내와 이화여중고 동창, D대사와는 어떤 관계다…라고 하니 그제야 부랴부랴 제 신분을 조사하더군요. 한참 후 여동생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몇십년 만의 통화였지요. 당시 여동생이 이탈리아에 있었는데 올 수 있느냐고요. 아내를 보냈는데 동생 조태권이가 와있었습니다. 동생 친구가 국정원 간부였거든요."
■조국의 품으로
   1997년 그는 한국으로 귀순(歸順)했다. 북에 남아 있는 자녀들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그 일은 실패했다. 그는 서울 평창동 안가(安家)에서 1년 반 동안 조사를 받았다.
   그는 1997년 대선(大選) 때 북풍(北風)공작에 쓰일 뻔했었다. 안가를 나와선 검찰 조사도 받았다. "공작원인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가 북으로 넘겼거나 하는 등의 피해를 본 국민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랬다면 남에 오지 않았을 겁니다."
   ―한국에 온 뒤 정권이 여러 번 바뀌었습니다.
   "DJ정권 때나 노(盧)정권 때는 '북에다 대고 욕하지 않을까'하며 저를 꺼리고 우파 정권이 들어서니 이제는 '조상권이 다시 북으로 도망가지 않을까' 꺼리고. 저는 여권이 없어 해외로 못 나갑니다."
   ―북으로 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당연히 죽죠."
   ―도자기는 조태권 광주요 회장이 권유했겠지요.
   "동생이 저보고 광주요 도자문화연구소를 맡으라고 했어요. 연구소 부지가 1만8000평쯤 되는데 동생이 마련해준 겁니다. 도자문화연구소는 아버지가 1963년 세운 것인데 제가 형이라고 2대(代) 이사장을 할 순 없지요. 그래서 3대 이사장이 된 겁니다."
   ―북한에 있을 때 도자기와 인연이 있었죠.
   "1972년 4월 15일이 김일성 환갑이었습니다. '무슨 선물을 할 거냐'고 묻길래 '고려청자 재생사업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어요. 김일성이 금방 OK했답니다. '조 선생, 어떻게 청자재생사업을 하겠소'라고 묻기에 '북한에도 청자 만들어본 사람이 한 명은 남아 있을 겁니다'라고 했지요. 사흘 만에 찾아내더군요."
   ―누구였습니까.
   "평양은 대동강 남쪽이 부촌(富村)이고 북쪽은 상대적으로 생활이 열악해요. 평양도자기공장의 직원 800명 가운데 화부(火夫)로 일하던 우치선이란 분이었어요. 청자 전문가가 화부로 일하고 있으니 참 한심하지요. 그를 세 차례나 만났는데 속마음을 안 보여줘 애를 먹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기술만 빼앗고 제거하려는구나 하고 걱정했겠지요. '제가 남한 출신'이라고 하니 마음을 열더군요. 그도 남한 출신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의기투합했는데 첫 번째가 가마를 만드는 것, 두 번째가 흙, 세 번째가 굴(窟)이 있는 곳이어야 한답니다. 평양 부근 용성에 초대소가 있는데 그 조건을 다 충족했어요."
   ―얼마 만에 청자를 재현해냈습니까.
   "재생사업 시작 8개월 만에 처음 12개를 구워냈는데 제일 잘된 거 2개는 김일성, 2개는 김정일, 2개는 우리 아이들에게 줬습니다. 그 일로 우치선은 공훈예술가가 됐어요. 평양도자기공장장보다 더 높지요. 그는 인민예술가(국장급)를 거쳐 '김일성 계관(桂冠)'까지 됐습니다. 장관급이지요. 자식 둘이 청자사업을 잇고 있을 겁니다."
   ―인생이 참 묘합니다.
   "막내 태권이에게 제가 물었어요. '내가 못다 한 꿈을 도자기에서 실현하고 싶다. 네가 한다는 도자기공장이 한국에서 제일 크다는데 내가 도자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겠느냐'고요. 동생은 '형님이 얼마든지 할 수 있도록 돕겠다'고 했습니다. 참 착하지요."
   ―어떤 도자기를 만들고 싶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 문화를 소박하다, 해학적이다라고 하잖아요? 틀린 말입니다. 세계 어느 나라도 민중예술은 다 소박하고 해학적이지요. 우리 문화의 본류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와 고려 초기까지가 진짜입니다. 정제되고, 세련되고 힘이 있는 것, 그 대표적인 게 정림사지 5층 석탑입니다. 우리 옛 지붕을 보면 그야말로 하늘로 날아오를 듯하면서도 날지 않는 모습이 보이지요? 그런 기상, 그런 힘이 우리의 참모습입니다."
   ―보면 볼수록 이상한 간첩입니다.
   "제가 지인(知人)들에게 옛 이야길 하면 믿질 않아요. 007영화 가운데 코믹한 영화 있잖아요. 제가 그 주인공 하면 딱 맞을 겁니다."
   ―한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아내를 평생 고생시켰습니다. 자녀들은 아직도 북에서 고생할 테고.
   "아내는 죽을 때까지 제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어요.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괴롭습니다. 제가 매일 술을 마십니다. 술기운으로 자는 거지요. 새벽 1시고 2시고 깨면 작업실에 가 도자기를 만듭니다. 지쳐 떨어질 때까지."
   ―왜 이런 이야기를 남쪽에 온 지 12년 만에 하는 겁니까.
   "이제는 공개할 때가 됐지요. 사연은 다 말하겠습니다. 다만 쓰지는 마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