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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 1956년 이승만의 원자력 결단 - 조선일보

도깨비-1 2009. 12. 31. 09:28


[특파원 칼럼] 1956년 이승만의 원자력 결단

              이하원 워싱턴특파원/2009년 12월 30일, 조선일보
  

   한국전력 컨소시엄이 47조원 규모의 아랍에미리트(UAE) 원자력 발전소 사업을 수주하기 약 한 달 전인 지난달 18일의 일이다. 기자는 한국형 원전 최초 수출로 우리 국민이 느낀 감흥을 미리 맛볼 기회가 있었다.
   당시 한국전력이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에 처음으로 한국형 원전 APR 1400의 설계인증 허가를 신청했다는 말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갔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NRC의 설계인증은 외국에 원전을 수출할 때 '보증수표' 역할을 한다. 현재 NRC의 설계인증 취득에 나선 업체는 미국 웨스팅사와 GE, 프랑스 아레바, 일본 미쓰비시 같은 쟁쟁한 선발업체들이다.
   NRC가 위치한 메릴랜드주의 한 호텔에서 열린 인·허가 사전검토회의는 하루 종일 계속됐다. NRC 고위 관계자들은 APR 1400의 컴퓨터 프로그램, 연료공급, 유사시 응급처치 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안전 주입 탱크에서 물이 방출되는 실험을 했다는데 사고가 났을 때의 대응기준에 맞게 했느냐", "발전소 안전과 관련해 어떤 컴퓨터 프로그램을 썼느냐"….
   NRC측의 날카로운 질문에 응수하면서 한국형 원전의 안정성을 홍보하는 한국전력과 관련 업체 관계자들은 가벼운 흥분상태에 있었다. 정근모 한전 고문을 비롯한 한국측 참석자들은 원전 기술을 배우던 학생에서 수출용 물건을 만들어 당당하게 심사받는 사업가로 성장했다는 감회를 공유하고 있었다.
   한국전력 원자로 설계개발단의 서종태 처장은 이날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미국으로부터 밑바닥에서부터 원자력 기술을 배웠습니다. 그런 우리가 원전 수출을 위해 NRC에 APR 1400의 안전성을 설명한 이날은 한국 원자력 역사에서 의미 있는 날로 기록될 겁니다." 한국측 참석자들은 쉬는 시간에도 서로를 격려하면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NRC 인·허가 검토회의 전략을 논의했다.
   이날 한전 관계자들이 공통으로 언급한 인물은 한국 원자력 역사를 만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었다. "이 대통령이 없었다면 원전 수출을 꿈꾸는 것은 불가능했다"(정근모 고문)는 데 모두가 공감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승만은 한국 발전의 버팀목이 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1953년 체결 후 3년 만인 1956년에 미국과 원자력 협정에 조인했다. 1956년이 어떤 해인가. 북한의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을 시작했고, 대한민국 국민의 상당수는 미국의 잉여농산물 원조를 받아 끼니를 때우던 때였다. 그해, 증권거래소가 처음으로 문을 열었지만 거래될 수 있는 주식은 12개뿐이었다. 2008년 한국 GDP의 약 80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던 당시의 GDP는 그나마 1.3% 하락할 정도로 먹고살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원자력을 언급하는 것이 사치스러운 상황에서 이승만은 문교부에 원자력과를 신설하고, 1959년에는 35만달러를 들여서 교육용 원자로를 들여왔다. 당시 지도자로서는 드물게 한반도 밖의 동향에 밝았던 이 대통령은 원자력 산업 투자가 나라를 부강하게 할 것이라는 꿈을 꾸었을 것이다.
   이승만의 꿈은 박정희로 이어져 1978년 고리 1호기가 가동돼 한국 원전 발전시대를 열었다. 이승만이 뿌린 '원자력 씨앗'은 한전이 미국 회사를 하도급업체로 삼을 정도로 기술발전을 이뤄 곧 만료되는 한미원자력 협정 개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400억달러의 초대형 원전 공사를 따낸 배경에는 그의 과오(過誤)가 크게 부각돼 기념관 하나 갖지 못하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의 혜안(慧眼)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한 해를 마감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