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고향-상주이야기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도깨비-1 2007. 11. 9. 21:49

 ‘영남아리랑’의 재발견

2007-09-14 21:05:53, Hit :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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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영남아리랑 권역은 경상도와 대구광역시와 부산특별시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여기에는 토속 아리랑인 문경아리랑과 1926년 일제강점기 잡가적 성격의 신민요로 형성된
밀양아리랑과 근래 들어서 창작된 대구아리랑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분포권이 넓은 곳이다.
그럼에도 <밀양아리랑>외에는 영남지역 아리랑에 대해 이에 주목하여 조명하고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였다.
이들 영남아리랑은 영남인 공동체의 소통어로 존재해 왔음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아리랑의 현재상을 조망케 하여 영남인의 역동성을 담은 심상(心象)의 전승이자 잃어버린 대동의 자족을 복원하는 행위전승으로  예능화하여, 현대적 콘텐츠 요소로 활용하는데 기여할 것이기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사정에서 간단하게 영남아리랑의 전체상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영남 아리랑이
‘영남의 窓’으로 역활하여 ‘영남 아리랑의 재발견’으로 진전되길 바란다.



① “오라 ! 들으라 ! 아리랑을 보시라 ! 아리랑을 들으시라!

여러 차례를 상영하여도 인기는 그대로 올라가는  <아리랑>을 시내 조선극장에서
20일 저녁부터 상영한다는데···.”

② “속요는 그 민족 그 지방의 마음이다.
감정이다. -중략- 아리랑은 근세조선의 대표적 구전속요이다.”

③ “우리의 노래를 아리랑 가튼 재래의 민요곡조로 지으면 되는 줄로 알아서는 안 된다.
왜 그러냐면 민요는 봉건사회 뿌르사회의 영락퇴패한 자의 입에서 나온 만큼, 그 안에
포재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 형식 곡조도 애수적이고 퇴폐적이어서 읽고 듣는 자로
하여곰 신경이 무의식적으로 마비 위축케 한다”

④ “1920년대 일부 명칭의 지역화와 문헌화 현상은 강원도아리랑(1921년)·‘구정선아리랑’과 그리고 서울아리랑(京卵卵打令)과 밀양아리랑(密陽卵卵打令) 정도였던 것이 1930년 중반에 이르면 남도잡가 대구아리랑과 동래아리랑 등의 도시 명을 쓰는 아리랑은 물론이고 <거차도(巨次島)아리랑>과 같이 벽지 도서지역 명을 쓴 아리랑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상에서 제시한 네 가지 아리랑에 대한 언술들은 내용상에서는 오늘의 시점으로 보아 논의의 여지가 있겠지만, 1920년대와 1930년대 초의 아리랑 상황을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하게 한다. 그럼으로 이러한 상황이 1930년대 초 지식인 사회의 민요에 대한 관심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도  흘려 넘길 수 없게 한다. 적어도 아리랑을 중심에 둔다면 그렇다.


-민요는 詩의 詩-

이는 1930년대 국학자들의 한 명제였다. 그런데 바로 이 국학자들의 중심에 있던 이들이
영남 출신이었고, 이들의 연구 대상이 당연히 영남민요 중심이었다. 대표적인 이들이 1924년『조선동요집』을 발행한 김천 출신 엄필진이고, 1929년 영남지역 민요를 조사하여『영남전래민요집』을 엮은 대구 출신 이재욱이고, 1935년『민요집』을 발행한 예천 출신 조윤제이고, 1933년《언문조선구전민요집》을 발간한 부산 출신 김소운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를 이어 김사엽·최상수·심재완 등이 민요집을 냈거나 조사를 했다.  

이로서 우리나라 민요와 그 관심에서 영남민요와 영남 국학자들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이 영남민요 속의 아리랑은 어떤 위치일까? 이는 영남민요의 위치로 보아 그 만한
값으로 존재하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1. 영남의 토속 아리랑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는 영남지역의 아리랑은 경북 문경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문경아리랑과 예천지역에 전승되어 오는 예천아리랑과 일부에 의해 불리어져 오는 상주아리랑과 울릉도아리랑이 있다. 1926년 10월에 ‘박춘재 장고 대구 김금화 창’의 음반 <밀양아리랑>의 존재와 1929년 발행된《조선곡집》(영창서관 발행, 임원상 발행)에 수록된 영남아리랑과 1930년 이재욱이 조사하고 정리 한 <영남전래민요집>의 ‘경북아리랑’ 1935년 월간『중앙』1월호 <朝鮮俗謠行脚>에 수록된 경상도아리랑, 김사엽이 1935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新民謠의 再認識>에 수록한 영천아리랑, 1936. 고려(Korai)레코드사가 낸 최계란의 창작 <대구아리랑>이 있다.
그리고 70년대 들어 중국동포사회의 아리랑 상황이 알려지면서 밀양아리랑 곡조를 차용한 ‘광복군아리랑’과 영천아리랑 곡조를 차용한 ‘독립군아리랑’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90년대 들어조사된 보고서에 현지명으로 기록된 아리랑이 있고, 여러  창작 아리랑이 나타나고 있는데, 봉화아리랑·대구아리랑(03)·구미아리랑(05)·경산아리랑(06)·울산아리랑(07)·안동아리랑(07)이 그것이다.


이상에서 살핀 바와 같이 영남지역의 아리랑 상황은 매우 다양한 형태이다.
그런 만큼 주목할 만하다. 첫째는 어느 민요권 보다도 다양한 아리랑이 지역적 분포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째는 근대 이후 형성된 아리랑의 시간적 층위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셋째는 각 아리랑의 형성 시기와 지역적 차이가 접변양상으로 나타나 메나리토리·경토리·육자배기토리도 보여 진다는 점이다. 넷째 창작아리랑이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는 도시적 개념의 기층성을 확보하려는 축제 개최와 음반 발매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강원도는 물론 다른 어느 민요권과도 비교되는 점이 아닐 수 없다. 이제 각각의 아리랑들을 살펴본다.


오늘날 구비문학에 대한 시각은 전승체계 내에서의 닫힌 가치를 벗어나 문화산업시대 문화자원의 차원에서 평가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문화컨텐츠로 재생산 가능성 여부로, 기능에서 음악성이 부각되어 감상용으로의 자기변용이 가능하고,  곡조에서 독특한 개성이 확인되어 교육용으로의 가치가 확인되는 민요가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영남의 아리랑은 앞으로 이러한 시각에서 조명되어야 한다. 이런 차원에서 2002년부터 영남민요보존회가 연례화 한 <대구아리랑제>와 2003년부터 영남민요연구회가 정례화해오는 <영남민요 발표회>, 그리고 2003년부터 개최해오는 <영천아리랑제>와 시안미술과 주최 아리랑 주제 특별전 등, 특히 2005년 대구 KBS라디오의 <영남민요의 재발견> 제3부 <영남의 아리랑> 방송은 이에 기여하는 의미 있는 작업인 것이다.
  
        영천, ‘새로운 아리랑’의 탯자리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귀향하게 된 영천아리랑. 이 노래는 아리랑의 생명력과 그 성격을 명료하게 보여준 보배로운 노래다. 이를 기념하여 경북 영천지방에서는 음반을 발매하여 배포했고, <영천아리랑축제>와 <아리랑미술제>로 까지 발전 시켰고 금녕에는 전국 최초로 독립적인 아리랑경창대회로 까지 컨텐츠화게 되었다.  
그야말로 전통문화의 현재적 가치화로 지역공동체문화로 육성시키고 있다. 그럼으로 ‘강인한 생명력과 역사성을 담은 영천아리랑에 의한 문화컨텐츠’로 재탄생 하고 있는, 그래서 영천지역은 ‘21세기형 아리랑’의 ‘탯자리’가 된다. 아리랑과 연고가 있는 전국 여러 지역이 참고할 만한 사례가 된다.
그런데 이런 영천아리랑에 대한 이해가 일반화 되지 못했음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글은 제1회 아리랑경창대회 축사의 자리를 빌어 영천아리랑에 의한 형태의 컨텐츠가 이뤄지게 된 배경과 당위성을 재확인하고 연구를 촉진 시킨다는 뜻에서 영천아리랑의 형성에 따른 문제를 살피고자 한다.    

     ‘영천아리랑’의 ‘영천’과 ‘용천’은 별개
1930년『조선』이란 총독부 기관지에는 <정읍신태인아리랑>과 <순창아리랑>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두 아리랑의 사설 중 전자에는 “아리랑인가 용텬인가 / 얼마나조흐면 저질알인고”가, 후자에는 “아라린가 질아린가 용텬인가 / 거름손이나 하는 놈는 제자품팔고” 라는 사설이 있다. 이 두 자료의 ‘용텬’ (용천)은 ‘질알’이라는 비속어가 함께 쓰이고 있어 문맥상으로도 욕설인 ‘용천’이 분명하다.  
그런데 영천아리랑 후렴(고정부)에도 얼핏 보기에는 유사한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고개로 날넘겨 주오”가 나온다. 여기에는 ‘질알’이 없다. 뿐만 아니라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라는 전형적인 후렴 후행과 함께 쓰인 ‘아리 쓰리형’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럼으로 이때의  ‘영천’은 지명 경북  ‘영천’ 이지, 위의 두 자료에서와 같이 욕설  ‘용천’ 이 아니다.
결국 두 자료의 ‘용천’과 영천아리랑의 ‘영천’은 전혀 다른 별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일부 논자들은 위의 두 아리랑의 사설을 제시하며 “근래 용천을 경북의 영천으로 이해하여 이 노래를 <영천아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라고 주장 한다. 이는 논리적으로나 민속음악의 속성상으로나 문제가 있는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의 네 가지에 대한 설명이 어렵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여섯 가지의 이유를 들어 시정하고자 한다.
  
    첫째는 전라도 지명을 쓴 <순창아리랑>과 <정읍신태인아리랑> 자체와 문제의 사설(후렴)
              이 지역적 기층을 이루고 전승력을 확보한 아리랑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기록 이외에 확인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 ‘지(랄)인가 용천인가’가  다른 민
              요의 일부 사설로 쓰인 예가 없진 않지만, 이른바 전승사설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 같은 아리랑의 사설과 후렴이 영향을 주어 영천아리랑의 후렴
             “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오”로 전이되었다거나, 또는
            ‘질알 용천’에서 전이되어 ‘영천’아리랑이 되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둘째는 경상도 욕설로 잘 알려진 이 ‘지(랄) 용천났네’를 지명과 환치시켜  ‘지역’ 아리랑으로
            부른다는 것이 공동체에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까의 문제다. 물론 그것이 긍정적이고
            관용적인 표현이긴 해도 말이다. 이러함에서 오히려 영천 지명을 쓰는 ‘아리랑인가
            쓰라린가 영천인가’를 전라도의 정읍이나 순창 지역의 어떤 제보자 또는 기록자가
           ‘지(랄) 용천났네’로 대체 시켰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김지연이『조선』에 게재한
           내용을 일부 첨삭하여 5년 후 단행본으로 출판한『朝鮮民謠아리랑』에서 후자의
           후렴을 “아리랑인가 질알인가”를 “아리랑인가 ‘쓰리랑인가”로 수정하여 수록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본다. 이 전이의 역방향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부정할 근거가 있는가이
           다. 이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상의 두 가지는 지역 정서를 감안하여 문제를 제기 한 것이다. 다음은 기록 문제를
           제기해 보기로 한다.

    셋째 영천아리랑이 경부 영천 지역의 소리임을 명시적으로 밝힌 기록 중에는 1954년
            북한 <조선작곡가동맹  중앙위원회>가 발행한『조선민요곡집 1』이 있다. 여기에는
           총 31곡, 그 중 아리랑, 긴아리랑, 정선아리랑, 영천아리랑,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6종을 곡보와 함께 수록하고, 영천아리랑에 대해서는 ‘윤봉식창, 영천지방 민요’라고
            밝혔다. 바로 여기에 북한이 굳이 ‘용천’을 남측 지명으로 고처 수록할 이유가 있었겠
            는가? 이는 일제강점기 때 중국 동포들이 부르던 것이 남북 분단 기간 북한과의 교류
            로 전해졌든가, 抗米援助(한국전쟁) 기간 중국동포들의 참전으로 북한에서 불려지게
            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이 반세기 전의 기록과 중국과 북한과 일본총련 사회에서의
            전승상을 어떻게 부인 할 수 있는가?

     영천아리랑의 역사성 부인 못해

   넷째는 이 영천아리랑을 이미 1970년 남측 학술논문에서 수용했다는 점이다.
            이는 대구 계명대가 발행한 『東西文化』(제4집)에 김진균교수가 <韓國音樂民謠의
             類型的 考察>에서 영천아리랑과 경상도아리랑을 ‘경상도’ 민요로 텍스트화 한 것이
            다.  이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북한 문헌에서 자료화 한 것으로 보는데, 계명대 교수로
            서 영남지역 아리랑을 허수이 취급할리 없었을 것임을 감안하면, 이 사실을 어떻게 부
            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메나리조에다 특히 중국과 북한에서 불려지는 경상도아리
            랑의 존재가 영천아리랑의 존재를 상보해 준다고 보아 연구자료화 했다고 보는 것이
           다. 이를 부인 할 수 있는가

    다섯째는 중국 또는 러시아 접경지대에 거주하던 동포들이 부르는 광복군아리랑과 독립군
           아리랑의 곡조가 전자는 밀양아리랑, 후자는 영천아리랑 곡조로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다. 이는 독립군과 광복군이 활동하던 일제강점기 중국에서 불렸다고 볼 때 중국동포
          사회에서 밀양아리랑과 영천아리랑이 존재했음을 방증하는 것이 된다. 이를 어떻게
          부인 할 것인가?
    
      여섯째는 1935년 12월 <조선일보>에 연재한 김사엽(金思燁)의 논문 <新民謠의 再認識>
             에서 ‘永川아리랑’의 존재를 확인시켜 준다는 점이다. 김사엽은 경북 칠곡(漆谷) 출신
            으로 경성제대 법문학부 재학 중이던 1935년 10월 같은 신문에 <慶北民謠의 特異性
            >을 16회에 걸쳐 연재한 이로 영천아리랑 2수의 사설을 제시한 것은 오늘의 영천아리
             랑과의 동일성 여부를 떠나서 이미 영천 지명을 쓴 아리랑이 존재했음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논문에서 제시한 ‘永川아리랑 一節’은 다음과 같다.

아주까리 피마자는 일년에 한번/ 지럼머리 단장은 나날이 하네
물여다 놓고서 거렁지 보니/ 촌갈보 되기도 원통하다

위의 사설에서 후렴이 수록되지 않고 곡조 표기가 없어 그 정체성을 드러내 주지 못한 점이 유감이지만, 이는 설령 ‘용천’이 ‘영천’으로 轉移 되었다 해도 민속의 속성을 이해한다면 오늘의 영천아리랑에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야말로 ‘문제’인 것이다. 더욱 난감한 것은 ‘용천’을 사설에서 쓴 정읍신태인아리랑이나 순천아리랑을  ‘용천아리랑’으로 바꿔 불러야 하느냐의 문제이다. 되돌릴 수 있는 논리가 없다면 백번 양보하여 영천아리랑도 마찬가지 아닌가?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가?

그럼으로 이 문제의 본질은 과연 현 ‘영천아리랑’을 어떻게 처리 할 것이냐에 있다. 영천에서 ‘귀향 한 영천아리랑’으로 부르지 않아야 할, 또는 못 할 이유를 제시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러함에서 “근래 용천을 경북의 영천으로 이해하여 이 노래를 <영천아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다”라는 논리는 잘못된 것이다. 사실 민요에서 소위 ‘곡명의 자극전파설’에 의한다 해도 욕설인 ‘용천’을 전이시켜 아리랑의 곡명으로 쓴다는 것은 좌중을 웃기기 위한 일회적인 가창은 몰라도 공동체적인 합의를 획득하기는 어려운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설령 ‘용천’을 쓰는 ‘용천아리랑’이 있다하더라도 오늘의 경북 영천의 영천아리랑과는 별개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말이다.

    ‘21세기형 아리랑’의 전형

따지고 보면 이러한 논란조차도 영천아리랑으로서는 일종의 역사성, 시대상을 반영하는 아리랑의 속성상 긍정적인 현상이기도 하다. 그 귀향의 역정이 고난이었듯이, 그러나 그것을 넘어 아리랑의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영천지역의 공동체 문화로 거듭나고 있음은 바로 ‘새로운 아리랑’, ‘21세기형 아리랑’의 전형을 영천아리랑이 보여주는 것이 된다. 이렇게 볼 때 영천 지역은 우리나라 새로운 아리랑의 탯자리가 되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이번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적인 <아리랑경창대회>를 영천에서 개최한다는 사실이 이를 분명하게 선언한 것이 아니겠는가.
-끝-       김연갑/(사)아리랑연합회 상임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