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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간송 전형필 탄생 100주년을 기뻐하며 1 - 슬픔이 사람을 키운다.

도깨비-1 2006. 6. 7. 15:46

 

 

올 해는 간송 전형필 선생 탄생 100주년 되는 해입니다. 간송 전형필 선생님은 많은 분께서 알고 계시듯이 자기의 전 재산을 받쳐 일본으로 반출되는 우리 문화재를 사들여 시들어 가는 민족 문화의 위대함을 지켜낸 분이십니다. 또 어렵게 모은 문화재를 널리 많은 사람들과 같이 연구하고 알리고자 한국 최초의 사립미술관인 보화각(현 간송미술관 전시실)을 설립하였습니다.

 

간송미술관은 그런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일년에 두 번(5월, 10월) 특별 무료 기획전시회의 개최하는데 이번 5월 전시회가 70회가 되니 기획전시를 시작한지도 벌써 35년이 되었습니다.  문화재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분들이라도 한번쯤을 들어보셨을 간송미술관 기획전은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언제나 무료관람입니다.

 

저 개인적으로 옛 그림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계기도 바로 간송미술관 기획전을 통해서입니다.

 

특히 올 해는 간송 탄생 100주년 특별전으로 소장품 중 지정 문화재(국보와 보물)와 간송미술관을 대표하는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전시회 첫날 개장시간 10시부터 50m 이상 입장을 위해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간송미술관 입구 –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첫날>

미술관은 성북 초등학교 정문과  맞데고 있는데(오른쪽 방향에 성북초교 정문이 있다) 

그 이유는 원래 북단장 땅의 일부를 간송이 성북초등학교 부지로 기증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분들이 간송미술관에서 작품을 보거나 전시회가 열리는 보화각 건물을 다니면서 전형필 선생님과 간송미술관의 파란만장한 역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으며 그 분의 뜻이 과연 무엇인지, 어떻게 지금 이러한 모습이 가능한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왜 작품만 감상하면 되었지 설립자의 삶이 뭐 그리 중요하냐고 되묻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점은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어쩌면 문화재를 이해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간송미술관과 전형필 선생님의 훌륭함은 이곳에 위대한 작품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전형필 선생이 있었기 때문에 그 작품들의 위대함이 밝혀졌고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간송 전형필 선생님의 삶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민족 문화에 대한 사랑과 소장 작품들의 이해의 깊이를 더 할 것이며 앞으로 우리는 우리 문화재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사람을 태어나게 할 때는 그 사람이 해 야할 일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집안의 부귀나 능력의 고저에 상관없이 삶은 그 사람만의 몫이 있으며 그 몫을 다하면 하늘로 다시 불려드린다 합니다.

 

간송 선생님의 삶을 살펴보면 정말 이러한 이야기가 맞는 이야기구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떻게 막대한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어떻게 문화재 수집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일제시대와 6.25 전쟁 속에서 주요 미술품을 어떻게 지켜냈는지를 알게 되면 한마디로 기적이고 하늘의 뜻 아니라면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첫 번째 기적은 어떻게 간송에게 그 많은 재산이 생기게 되었는가 입니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7월 26일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종로4가 일대는 ‘배우개’라는 이름으로 부렸는데 전형필이 태어난 배우개 양반댁은 종로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간송의 선대는 장사를 천하게 여기던 시절 양반으로서 상업에 일찍 눈을 떠 배우개의 상권을 하나씩 넓혀나가면서 모은 재력으로 전국 각지의 농지를 계속 구입하여 간송의 증조부인 계훈 시절에 수만 석을 추수하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계훈에게는 전창렬, 전창엽 두 아들이 있었는데 간송이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 내외는 70대 중반이었고 작은 할아버지는 69세 동갑, 부모의 나이도 40세를 넘겼으니 손위 형과 14살 터울이 있었고 작은 할아버지 양자인 명기공이 자식이 없어 절손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에 간송의 탄생이 얼마나 집안의 큰 경사였겠습니까.

 

간송은 탄생과 더불어 종숙부 양자로 입후되었으니 큰댁은 생가로 작은댁은 양가로 각기 그 조부모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었으니 한마디로 온갖 복을 타고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완고한 할아버지는 간송에게 신식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송은 열 살 때까지 집에서 스승을 모시고 한문과 경서를 공부했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열 두 살이 되어서야 어의보통학교(현재 효제초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한 게 그 무렵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시작으로 다음해에 양가의 할머니가 그 다음해에 양가 조부가, 두 달 뒤에 생가 조모가 돌아가시면서 3년간 곡성이 끊일 날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조부들의 삼년상이 끝나기 전에 또 양부가 돌아가시고, 그 후 보름도 지나기 전에 간송의 유일한 친형이요 본생가의 계승자인 형설이 불과 28세의 나이로 후사를 두지 못하고 급서하니 양부의 장례를 치르고 양조부의 대상을 막 끝낸 뒤 닷새 만에 당하는 날벼락이었습니다. 남달리 총명하고 감성이 예민했으며 거부집안의 막내손자로 온갖 사랑을 독차지 하며 자랐던 간송에게는 감당키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이는 추사 김정희가 9세 때부터 16세까지 연속적인 근친의 죽음을 당하거나, 공재 윤두서가 3,4년간 근친들의 연이은 죽음을 당하는 것처럼 큰 인물들에게는 시련을 주어 더 큰 그릇으로 성장시키기 위한 하늘의 안배인지 모릅니다.

 

 

<1925 을축년 간송생부 옥포공 회갑연시>

1925년은 여름에 을축년 홍수라고 불리우는 대규모 물난리가 났으며 이로 인해

대흉년으로 간송가도 추수를 받기는 커녕 소작인들의 기근을 구제하여야 했던 해이다.

그래서 회갑연도 가족끼리 모여 조촐하게 치루어졌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해 유달리 많은 관심을 보였던 이성과 감성이 둘 다 잘 발달되어 주위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어린 간송은 슬픔이 사람을 키우듯 말수가 적어지고 생각이 많은 소년으로 변해갔습니다.

 

그 후 간송은 휘문보고를 입학하였고 집안의 대를 위해 18살에 결혼도 합니다. 당시 미술교사였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 선생을 만난 것도 그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간송에게 남모르게 서적을 구입하는 취미를 갖기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는 그냥 취미 수준이었습니다.

 

어째든 간송은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양가 집안 도합 10만석의 추수가 가능한 땅과 재산을 상속받을수 있는 유일한 집안 종손이 되어버린 간송은 서양화를 전공하였지만 조선에 들어와 민족문화의 말살을 안타까워 동양화로 전환한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면서 그 운명적 인생의 장이 시작되었습니다.

 

1926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한 간송은 곧바로 도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 유학생활은 깊은 갈등과 절망감을 맛보는 시기였습니다.

특히 초등학교 시절 종로 모퉁이에서 3.1 만세 운동을 가슴 뛰며 지켜보았던 간송으로서는 항쟁의 의식이 남달랐기에 나라를 빼앗기 처지에서 대학생활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라는 고뇌가 언제나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입술을 깨물며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고서점에서 책을 구입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고서점에서 책을 고르고 있던 간송은 일본학생에게 식민지인 조선인에게도 그런 게 의미가 있느냐는 식의 조롱을 받게 되는데 그때 망국노의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그 일이 얼마나 분했으면 나중에 그 당시 분위기를 고스란히 회고 할 만큼 아픈 경험이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 방학을 맞이하여 고향에 돌아온 간송은 잊을 수 없는 은사인 춘곡 고희동 선생을 만나 울분을 토하며 서로를 위안하던 중 춘곡 선생의 소개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나게 되니 그가 바로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분인 위창 오세창 입니다.

 

..위창 오세창, 추사 김정희 학문의 적통을 이어받은 당대 최고의 감식안이자 서예의 대가. 간송으로서 그 와의 만남은 인생에서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중요한 만남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저서인 [근역서화징]을 보며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올바른 관점을 배우며 위창에게 직접 글씨와 서화를 배우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간송은 문화재란 그것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주체성과 정신적 가치가 깃든 일종의 유산이기에 우리 문화재란 우리 민족의 정신이 함축된 유산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러한 문화재가 일본에게 빼앗기는 것은 민족혼의 말살이며 민족에게 미래가 점점 없어지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송은 위창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깨우쳐주셔서 감사하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데 당대 최고 노학자인 위창은 20대 초반의 간송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너무 많은 책임을 지워 미안하다고 말하며 스승과 제자를 뛰어넘는 인간적 관계를 맺게 됩니다.

 

당대 민족문화의 정점에 서계신 노학자와 당대 조선 최고 갑부의 아들의 만남. 어찌 우리 문화재를 보호하고자 하는 하늘의 안배가 아니라면 어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또 간송은 위창을 통해 그를 도와 집사의 역할을 하면서 평생 문화재 수집에 앞장서는 도움을 주는 이순황을 소개 받았으며 우현 고유섭과 교우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또 우현을 통해 이제는 너무나 알려진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저자이자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하신 혜곡 최순우 선생을 만나게 됩니다.

 

따라서 위창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위창은 간송뿐 아니라 몇몇 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는데 그 중 하나가 우리나라 고고미술의 대부인 우현 고유섭입니다. –고고미술계의 교본인 [조선 탑파의 연구]의 저자 우현 고유섭.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분입니다.-  현재 우리 고고학계, 미술사학계 학문적 계보의 정점에 서 계신 위창 오세창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지금 당장은 저의 능력을 넘어서는 이야기 입니다)

 

 

<보화각 상량 기념사진> 왼쪽부터 청천 이상범, 월탄 박종화, 춘곡 고희동,

석정 안종원, 위창 오세창, 간송, 박종목, 심산 노수현, 이순황

 

 

간송이 위창을 만나 문화재 수호의 뜻을 세울 무렵 간송의 가정에는 또 한번의 슬픔이 찾아옵니다. 홀로된 형수가 세상을 떠나고 이듬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납니다. 이렇게 해서 어른이라고는 어머니 한 분만 남아 십만 석의 재산을 상속 받은 청년가장이 됩니다. 간송집안은 부유하다고 해서 돈을 함부로 쓰는 집안이 아니 였으며 어려서부터 허튼 곳에서는 한 푼도 쓰지 않도록 교육 받아왔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간송은 본격적으로 문화재 공부와 수집에 몰두하는데 당대 최고의 감식안인 위창이 뒤에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1934년 7월 간송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성북리에 있는 양옥과 그 주변 땅을 사들였고 그 집을 ‘북단장’ 이라 이름 붙이고 1938년 윤 7월 5일에 드디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관인 보화각을 건립하여 상량식을 치룹니다. 

 

 

 

<보화각 전경>  건물 분위기나 주변의 모습이 지금과는 많이 다릅니다.

동경대 건축과를 나온 박길용이 보화각을 설계했습니다

 

 

바로 북단장과 보화각이 지금 간송미술관 입니다.

1938년은 일제의 폭압정치와 민족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할 때였고 동시에 대동아전쟁의 와중이었습니다. 양권(糧券)이 없는 사람은 밥을 굶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보화각을 짓는 공사는 조선 최대의 사건이었습니다. 간송이 보화각을 세운 것은 일제에 대한 문화적 저항의 표시였습니다.  

 

간송미술관에 와보신 분들 중 잘 모르시는 분들은 미술관이 좀 낡고 어수선해 보일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의 자재와 기술로도 아파트가 30년이 되면 부시고 다시 지어져야 하는데 80년이 다 되가며 전쟁을 겪었음에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하게 지어졌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대리석이며 전시실 바닥은 당시는 구하기 힘든 단단한 합판으로 깔았고 유물을 볼 수 있게 만든 전시함은 이태리에서 직접 수입된 것입니다. 수입가구를 사용한 이유는 당시 우리의 가구들은 이렇게 밖에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들어진 가구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것 같습니다.

 

 

<간송 전형필 생전모습>  어렵게 수집한 문화재를 보면서 어떤 감회를 가지셨을까?

 

 

간송은 이곳 북단장에서 본격적인 일본과 해외로 반출될 기로에 처한 문화재를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그 과정 하나하나가 운명적으로 하늘이 보살피지 않았다면 간송의 품으로 올 수가 없었던 가슴 졸이는 이야기입니다. 그 흥미 진지한 문화재 수집 이야기는 블러그 글이 너무 길어지는 관계로 다음 편으로 미루겠습니다.

 

 

참고문헌 :[간송문화] 41호- 간송선생 평전 

               [간송문화] 51호- 간송이 문화재 수집하던 이야기

               [간송문화] 55호- 간송 전형필과 위창 오세창

               [간송문화] 70호- 간송 전형필

               [간송선생님이 다시찾은 우리문화유산이야기] 한상남  도서출판 샘터 

               [위창 오세창]  이승연   도서출판 이회

 

 

 

 

2006 . 6 . 1

 

 

 

금강안金剛眼

 

출처 : 우회전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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