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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이순신장군의 유언... 노량해전

도깨비-1 2006. 6. 7. 21:41
<아고라 문화방서 펀글>이순신장군의 유언... 노량해전 [48]
31| 2005-11-10 추천 : 58| 조회 : 20213

한류의 원조라 할수있는  충무공 이순신장군님에 대한 글인데요, 묻혀있기에는 너무 좋은글이라 퍼왔습니다. 문화방에서 가시면 챔피온이란 분이 쓴 다른 글들도 보실수 있구요^0^

 

 

10일 후면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이 벌어졌던 노량해전이 있었던 날이네요. 11월 19일(음력이니까 실제로는 12월 20일이 되겠군요). 역사적으로 보면 4. 28 탄신일 못지않게 의미가 깊은 날이기도 하지만 장군께서 순국하신 이날은 안타깝게도 송년 분위기에 휩쓸려 우리들 기억 저편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계 해전사에 신화로 존재하는 한 영웅의 마지막 결전! 사실 충무공의 신화는 노량해전에서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꺼져가는 촛불이 최후의 빛을 발하듯 장군께서는 스러져가는 심신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가셨고, 피탄되어 숨을 거두시는 그 순간까지도 지휘관으로서의 책무와 사명을 다하셨습니다.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

이 말씀은 장군께서 남기신 유언임과 동시에 지휘관으로서 내린 마지막 명령이셨습니다. 짧은 이 한마디에는 장군의 필승에 대한 집념과 조국수호의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자살설, 은둔설같은 생각하기조차 민망한 주장과 설들이 공공연하게 회자되면서 충무공의 고귀한 정신이 크게 훼손되고 있는 것 같아 오류 수정 차원에서 몇자 적어볼까 합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장에서 지휘관의 죽음은 전투뿐 아니라 전쟁의 승패마저도 뒤바꿔 놓는 매우 중차대한 사건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기 전, “원정군이 본국으로 무사 귀환할 때까지 나의 죽음을 절대 비밀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보다 오래 전에 몽골의 칭기즈칸도 죽기 전에 자신의 죽음이 외부로 세어나가게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죠.

세계의 전사 기록들을 보면 이러한 사례는 아주 많습니다. 지휘관의 죽음이 전쟁의 승패, 곧 나라의 흥망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기관리 리더십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계신 장군께서 스스로 이러한 위험을 자초했다는 추론은 그 어떤 근거와 명분을 같다 붙인다 하더라도 성립될 수 없으며, 충무공의 리더십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망발된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량해전은 피아간에 생사를 걸고 벌인 사생결단의 해전이었습니다. 임진왜란 해전사 중 가장 치열했고 충무공 해전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속전속결의 해전과도 동떨어진 최장의 해전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조명 연합함대 사령관인 명나라 진린 도독이 왜선단에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해 있던 해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살 운운하는 것은 대단히 유치한 가정입니다.

이순신 장군과 여러모로 많이 비교되고 있는 영국의 넬슨 제독은 트라팔카해전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전사합니다.

“주여 감사합니다! 저는 제 임무를 다했습니다! 이제 저는 만족합니다!”

넬슨은 이 유언을 통해 야전의 지휘관에게 부여된 최고의 사명이 승리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전투에 임하는 장수에게 있어서 최고의 가치는 승리이며, 이것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가 없는 최고의 가치라는 것입니다.

핵심을 이 정도로 간추려 보고 지금부터 400년 전, 노량해전의 현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보름 전에 찾아뵈었던 <이순신과 임진왜란>의 저자이신 정광수님에게서 들은 말씀과 정광수님에게 얻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갑니다(사실 며칠전에 글을 올렸다가 인용해서는 안되는 자료를 인용한 것 같아 부랴부랴 삭제를 했습니다. 그때 인용했던 자료는 앞으로 출간될 <이순신과 임진왜란> 4권의 초고자료였기 때문이었죠. 저작권 침해 문제가 생길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음력)1598년 11월 18일 저녁 6시경.
“5백척 규모의 왜선단이 남해로부터 쏟아져 나와 노량으로 몰려온다!”는 급보가 고니시 유키나가 군의 도주를 막기 위해 왜교성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조명 연합함대 지휘부에 전달됩니다.

(이때 조선으로 건너온 전 왜군부대들은 히데요시 사후, 본국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은 상태였고, 고니시군을 제외한 전 왜군부대들은 일본으로의 철군을 신속하게 진행하고 있었죠. 그러나 고니시군만은 이순신에게 퇴로를 봉쇄당한 채 순천 왜교성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다급해진 고니시는 남해에 주둔해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군에 구원을 요청합니다.)

이미 고니시의 탈출작전을 간파하고 있던 이순신은 자칫하다가는 안팎의 적에게 포위되어 협공당할 것을 우려해 먼저 시마즈군부터 치기로 합니다. 조명 연합함대는 왜교성 앞에 복병 함대를 남겨두고 저녁 10시경 기동하여 19일 새벽 2~4시경 노량에 도착합니다.

결전을 앞둔 8천명의 조선수군은 전의를 불태웁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원균 통제사가 지휘한 칠천량해전에서 수중고혼이 된 병사들과 정유재란때 코 베이고 도륙당해 죽은 백성들의 유족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들의 전의는 처음부터 비장했습니다.

<조명 연합함대의 규모/전투편제>
○전선: 250여척
○병력: 2만1천명(조선군 8천 / 명군 1만3천)
○총사령관-진린 / 좌선봉장-등자룡 / 우선봉장-이순신

연합함대로서는 노량의 왜군들을 최대한 빨리 격파하거나 쫓아낸 후, 회항해서 고니시군을 무찔러야 했습니다. 이순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니시는 임진년에 왜군 선봉군 제1대를 이끌고 부산-충주-한성-평양을 함락하며 선조임금과 피난조정을 위협했던 제1의 원흉이었습니다. 또한 정유재란 전, 요시라를 통한 반간계로 충무공을 옥에 갇히게 했던 원수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불과 수개월 전, 칠천량에서 조선함대를 송두리째 파멸시킨 장본인이기도 했습니다.

때문에 고니시가 퇴로를 열어달라며 온갖 교설과 뇌물공세를 퍼부었음에도 장군께서는 “환란의 원흉을 어떻게 보내줄 수가 있겠느냐!”며 해상 봉쇄망을 풀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장군에게 있어서 진정한 적은 다가오는 시마즈군이 아니라 왜교성의 고니시군이었다는 것이죠.

해전이 시작되자 연합함대는 서양식 대포와 동양식 화약무기, 심지어는 장작불에 불을 붙여 던지는 근접전에 이르기까지 온갖 방법을 총동원한 총력공세로 왜군들을 몰아칩니다.

야간에 치러진 전투였던 관계로 해전은 초전부터 대혼전으로 접어들었고, 이같은 혼전 속에서 왜군 시마즈 요시히로의 직속 선단이 야음을 틈타 연합함대 사령관 진린 도독의 본함대를 기습합니다. 그러나 시마즈의 선단은 명군의 강력한 반격에 뒤로 밀려났고, 밀리다보니 뒤가 막힌 관음포구 속에 갇히게 됩니다.

진린의 선단은 관음포로 추격해 들어가 왜선단을 공격합니다. 그런데 그때 포구 외곽에 포진해 있던 또 다른 왜선단이 시마즈 선단을 구원하기 위해 진린의 선단을 포위 공격합니다. 이렇게 되자 진린의 본함대는 포구 안팎의 왜선단으로부터 협격을 받게 되었고 사령관 진린은 사면초가의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에 진린은 전 함대에 “나를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우선봉장 이순신으로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진린을 구해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렵 명나라의 다른 장수들은 모두 귀국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진린만은 조선 조정과 이순신의 간청을 받고 생사를 무릅쓴 최후 기동에 동참해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군령을 떠나 의리와 도의적으로도 최선을 다해 구원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진린을 구원하려는 과정에서 좌선봉장 명나라 등자룡과 진린의 아들이 피탄되어 전사했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진린마저 전사하게 된다면 전투의 승패를 떠나 이 문제는 훗날 명나라와의 정치/외교적인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었습니다. 이에 이순신은 진린의 명령이 떨어지자 전함대에 “진린 도독을 구원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관음포를 향해 즉각 달려갑니다.

11월 19일, 오전 6시경.
조명 연합함대는 너나 할 것 없이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관음포로 내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왜군들의 시야에 이순신의 기함이 통제사의 깃발을 펄럭이며 조총의 유효사정거리 50m 안으로 접근해 오는 광경이 잡힙니다. 왜군들로서는 7년간을 기다려온 회심의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표적을 확인한 왜군 조총수들은 이순신의 기함 장대(함교)를 목표로 일제히 밀집사격을 퍼붓습니다. 수천~수백발의 조총탄이 탄막을 형성하며 이순신의 기함 장대로 쏟아집니다. 그 중 한발이 2중 3중으로 쳐놓은 방패와 방패 사이를 유탄처럼 날아들어 북을 두들기며 독전하고 있던 이순신의 가슴에 명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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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싸움에서는 장수가 전사하게 되면 이기고 있던 싸움도 전세가 역전되어 장수를 잃은 쪽은 대타격을 받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만약 노량해전에서 이순신의 전사 사실이 아군이든 적군이든 외부에 알려졌다면 조명 연합함대는 칠천량에서와 같은 패전을 당하게 되고, 이순신을 포함한 연합함대 수뇌진의 시신마저 빼앗겼을 것입니다.

장군께서는 이러한 점을 우려해 “싸움이 한창 급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는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즉 그때가 죽을 시점이 아닌 위기의 시점임을 강조한 것인데요, 이 대목은 장군의 위기관리 리더십이 빛을 발한 불후의 명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충무공의 자살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 근거로 제시하는 것들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숙종때 대제학을 지낸 이민서의 <김충장공유사>라고 합니다. 이민서는 여기서 ‘이순신은 전쟁중에 갑주를 벗고 스스로 탄환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러나 이민서의 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90년 후에 쓰여졌죠. 즉 이민서는 임진왜란 11년 후에 나온 이분 공의 <이충무공행록>을 읽지 못한 가운데 자신의 취향에 따라 글을 쓴 것이죠. 당시 <이충무공행록>은 소량 발간되었을 것이므로 정조대왕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대량으로 발간되기까지는 일반의 사랑방에서는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이민서의 주장대로라면 충무공에 앞서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돌진해 들어가다가 피탄되어 전사한 명나라 등자룡도 갑주를 벗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당시 조, 명, 왜의 갑옷은 조총의 유효사정거리 50m 안에서 피탄되면 예외 없이 뚫렸습니다. 또 충무공은 임진년 5월 사천포해전 때에도 조총의 유효사정거리까지 접근한 끝에 피탄되어 부상을 당한적이 있는데 그러면 이때에도 갑옷을 벗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외에도 자살설의 소스로 많이 거론되는 이야기 중에 “왜 하필 이순신의 대장선이 선봉에 섰느냐?” 하는 것과 “당시 정치적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해서 의도된 죽음을 택했다”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점에 대해 정광수님은 진린의 기함이 포위되어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게 되었을 정도라면 엄청난 혼전이었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칠흑과도 같은 암흑 속에서 벌어진 대혼전... 피아간에 대형과 진은 이미 무너졌고 연합함대의 모든 선단은 진린을 구원하기 위해 선봉, 중군, 후군 따질 것 없이 앞을 다투어 달려갔을 거라는 말씀이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 상황에서 한가하게 함대의 진형을 따진다는 발상 자체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대장선이 선봉에 섰다는 것을 의도된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 또한 유치한 발상이죠. 노량해전에서 많은 수의 연합함대 장수들이 죽음을 맞았고 부상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조선 측에서는 이언량, 이영남, 고득장, 방덕룡 등의 장수들이 피탄되어 전사했고, 명나라 측에서는 진린의 아들을 비롯해 등자룡, 진우충, 진천의, 도명재 등이 전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모두가 선봉에 섰기 때문에, 혹은 갑옷을 벗었기 때문에 죽은 것일까요? 아니면 이들 역시 자살을 기도했던 것일까요?

이순신 장군은 정치군인이 아닌 참군인이셨습니다. 일신의 안위나 훗날의 고초 따위를 우려해서 대의를 저버릴 분이 아니라는 거죠. 설혹 훗날 정치적 역학구도에 의해 희생양이 된다 하더라도 굽힘없이 군인의 길을 가셨겠죠.

이순신 장군의 생애를 회고해 보면 두고두고 가슴이 아픈 장면들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노량해전에서 숨을 거두시는 장면이지요. 장군께서는 넬슨 제독처럼 승리를 확인하지 못하신 가운데 숨을 거두셨다는 겁니다.

“원수들을 무찌른다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시던 소원을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하시고 떠나셨다는 거죠. 아마도 그것이 장군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으시지는 않으셨을지...


진중음(陣中吟)

님의 수레 서쪽으로 멀리 가시고
왕자들 북녘으로 위태롭구나
나라를 근심하는 외로운 신하
장수들은 공로를 세울 때로다
바다에 맹세함에 어룡이 감동하고
산에 맹세함에 초목이 알아주네
이 원수 모조리 무찌를 수 있다면
이 한 몸 죽음을 어찌 사양하리오
-충무공 이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