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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팔렌 조약

도깨비-1 2017. 6. 18. 05:05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falen

 

요약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협정은 1648년 1월 30일에 조인되었으며, 1648년 10월 24일에 맺어진 조약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밖의 독일 군주들, 프랑스와 스웨덴이 참가했다. 영토문제의 타결로 네덜란드와 스위스 연방은 독립된 공화국으로 공식 인정을 받게 되었다. 영토의 재분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종교문제가 타결되었다는 점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을 추인했다. 독일의 경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절대권을 지향해온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 연방주의를 갈망하는 제국 내 독일 군주들 사이에 1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투쟁이 마감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의 기본법으로 인정되었으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모든 조약들의 근간을 이루었다.

베스트팔렌 조약 (Peace of Westfalen)

베스트팔렌 조약의 비준

개요

1644년부터 베스트팔렌의 소읍 뮌스터와 오스나브뤼크에서 진행되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 사이의 협정은 1648년 1월 30일 조인되었으며 1648년 10월 24일 맺어진 조약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와 그밖의 독일 군주들을 비롯해 프랑스 및 스웨덴이 참가했다. 이 2차례의 회동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은 유럽 국가는 영국·폴란드·러시아·투르크뿐이었다.

대표단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수석대표는 막시밀리안 폰 트라우트만스도르프 백작이었으며 조약체결이 마무리된 것은 대체로 그의 명민함 덕분이었다.

프랑스 대표단은 명목상 롱그빌 공작 앙리 도를레앙이 거느렸으나 사블레 후작과 다보 백작이 실질적인 대표였다. 스웨덴에서는 옥센셰르나 총리의 아들 요한 옥센셰르나와 함부르크에서 스웨덴을 위해 활약했던 요한 아들러 살비우스가 대표로 파견되었다. 교황의 대사는 나중에 교황 알렉산데르 7세로 즉위한 파비오 키지였다. 요한 폰 자인 비트겐슈타인 백작을 대표로 한 브란덴부르크는 협상과정에서 신성 로마 제국 내 프로테스탄트 국가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1645년 6월 1일 프랑스와 스웨덴이 평화안을 제시했으며 이 제안은 1645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신성 로마 제국의 각 제후들에 의해 논의되었다. 1646년 2월과 1648년 3월 사이에 종교문제에 관한 타결이 이루어졌으며 토의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전쟁은 계속되었다. 

결정사항

평화안의 타결조건에 따라 많은 나라들이 영토를 얻거나 자신들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보장받았다.

영토에 관한 조항은 스웨덴·프랑스 및 이들의 동맹세력에게 모두 유리한 것이었다. 스웨덴은 포메라니아 서부(슈체친시와 함께)와 비스마르 항(港), 브레멘 대교구 및 페르덴 주교구를 손에 넣었다. 이로써 스웨덴은 발트 해를 장악하게 되었으며 오데르 강과 엘베 강 및 베저 강 어귀에 대한 통제권을 확보했다. 프랑스는 알자스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으며 1세기 전에 장악했던 메스와 툴, 베르됭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받았다.

그결과 프랑스는 라인 강 서쪽의 든든한 변경지역을 손에 넣었다. 브란덴부르크는 포메라니아 동부지역과 몇몇 소규모 영토를 획득했다. 바이에른은 오버팔츠를 보유할 수 있게 된 반면 라인팔츠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의 아들 카를 루트비히에게 되돌려졌다. 영토문제의 타결에 따른 다른 2가지 중요한 결과는 네덜란드와 스위스 연방을 독립된 공화국으로 인정한 것이다.

이로써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사실상 수십 년 간 누려오던 지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영토상의 변화와는 별도로 그간 소유지를 빼앗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무조건적인 은사(恩赦)가 선포되었으며 모든 세속영지(특정의 예외규정과 함께)는 1618년 당시의 소유자들에게 되돌려져야 한다는 칙령이 공포되었다.

영토의 재분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종교문제가 타결되었다는 점이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1555)을 추인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은 제국 내에서 루터교를 종교적으로 용인하는 것이었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1629년 복원칙령(Edict of Restitution)을 발표함으로써 취소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은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의 종교적 관용 조항들을 개혁(칼뱅주의)교회에까지 확대적용했으며 그결과 제국 내의 3대 종교공동체, 즉 가톨릭과 루터교 및 칼뱅 교회가 용인되기에 이르렀다.

아우크스부르크 평화협정

독일에서 종교의 존속을 논의하기 위해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평화 협정

이같은 한도 내에서 제국에 소속된 각국들은 자국 내의 모든 소수종파와 비국교도에게 최소한 사적인 예배의식과 신앙의 자유 및 타국으로 이주할 수 있는 권리를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용조처는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영토 내에 존재하는 비(非)가톨릭교도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교회에 속한 토지의 소유권에 관한 곤란한 문제는 타협으로 해결되었다.

1624년이 '기준 연도'로 선포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지는 가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의 소유로 간주되어야 했다. 어떤 군주가 개종하면 그의 소유지를 몰수하도록 하는 중요한 조항을 둠으로써 종교개혁과 반(反)종교개혁 모두가 더이상 확산되는 것을 막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에 대한 반대나 거부는 어느 누가 표명하든지 간에 모두 백지화·무효화한다는 선언은 독일 문제에 대해 교황이 개입하지 못하게 못을 박은 것이었다.

이 조약으로 파생된 국가체제상의 변화는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독일의 경우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절대권을 지향해온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과 연방주의를 갈망하는 제국 내 독일 군주들 사이에 1세기 동안 지속되어온 투쟁이 마감되었다. 이 조약은 또한 제국에 속한 각 공국들에 대해 완전한 영토적 주권을 인정해 주었다. 황제와 제국이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 한 이들 공국들은 상호간 및 제국 이외의 국가와 조약을 체결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 이를 비롯해 여타 여러 가지 변화로 인해 제국 내 군주들은 자신의 영유지에서 절대적인 주권을 갖게 되었다.

이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그 의회에는 과거에 누리던 권력의 잔영만이 남게 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중앙권력은 이제 제국 내 300여 개에 달하는 공국들의 주권으로 거의 완전히 대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국력이 여러 가지 면에서 실질적으로 약화되었다. 제국은 약 10만㎢에 달하는 영토를 상실했으며 프랑스와 맞닿은 변경지역을 얻었으나 이것은 방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스웨덴프랑스는 평화의 보장세력으로서 제국 내 문제에 간섭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으며 스웨덴은 또한 제국의 평의회에서(의회 구성원으로서) 발언권을 가졌다.

따라서 독일은 여러 해 동안 유럽에서 외교와 전쟁의 중심무대가 되었으며 독일의 국가적 통일을 위한 발전과정은 자연히 지연되었다. 그러나 베스트팔렌 조약이 제국 내에서 구질서의 해체를 선언했음에도 이는 제국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던 새로운 열강들, 특히 오스트리아와 바이에른 및 브란덴부르크 등의 성장을 촉진시켰다. 이 조약은 독일의 기본법으로 인정되었으며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모든 조약들의 근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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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의 종식

베스트팔렌 조약

 

시대

1648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열려 독일 내의 각 도시 국가가 신교와 구교에 관계없이 제후의 종교를 따르는 것을 인정했다.
1620년 보헤미아의 빌라 호라 언덕에서 가톨릭 연맹과 프로테스탄트 군대가 충돌하여 30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16세기 무렵의 독일은 인구도 많고 영토도 넓었지만 여전히 유럽 세계의 변두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2,500여 개의 도시 국가들이 자치권을 나누어 가진 제후국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는 왕의 간섭이 덜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웃의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들처럼 국력을 한데 모으지 못하고 늘 사분오열하여 혼란이 거듭되었다.

독일의 왕은 고대 로마 제국의 계승을 자처해 온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를 겸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허울일 뿐 왕권은 허약했고, 왕은 늘 제후들과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처지였다. 신성로마 제국은 중부 유럽에 위치한 수많은 국가들의 느슨한 연방체에 가까웠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로 카를 5세가 즉위하면서 제후들의 위기감이 높아졌다. 그는 당시 유럽 대륙을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적통자로 독일,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보헤미아, 헝가리, 네덜란드의 왕을 겸하는 절대 군주였다. 특히 개신교를 믿는 제후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이다.

빌라 호라 전투

1620년 가톨릭 연맹과 프로테스탄트 군대의 충돌이 30년 전쟁의 시작을 알렸다.

제후들은 힘을 합쳐 황제를 견제했다. 유럽 곳곳에서 벌인 전쟁 때문에 지친 카를 5세도 제후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가 1555년에 열린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다. 독일의 모든 주민들은 신교든 구교든 관계없이 자신을 다스리는 제후가 선택한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이 회의의 골자였다. 신교와 구교 사이의 임시 평화조약인 셈이다. 이 회의의 결정으로 독일 연방 내의 각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는 한편, 전체 제후들은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북부 지역의 루터파 개신교 제후들과 남부 지역의 가톨릭 제후들이었다. 17세기 초 개신교 제후들은 팔츠를 중심으로 프로테스탄트 연합을, 가톨릭 제후들은 바이에른을 중심으로 가톨릭 동맹을 결성했다. 이것이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 페르디난트 2세가 보헤미아의 신교도들을 탄압한 것이 도화선이 되었다. 1618년 신교도들이 저항하면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 싸움은 무려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중부 유럽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전쟁터는 주로 독일이었지만 이 전쟁은 에스파냐, 프랑스, 잉글랜드, 스웨덴, 네덜란드 등 유럽 열강들이 모두 참가한 세계대전의 성격이 강했다.

페르디난트 2세

가장 먼저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에스파냐가 개입했다. 페르디난트 2세는 이에 힘입어 손쉽게 개신교 제후들의 군대를 격파했다. 개신교 국가인 덴마크가 가세했으나 허무하게 패한 뒤 힘없이 쫓겨났다. 전쟁은 가톨릭 측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고 독일의 개신교 세력은 곧 궤멸될 듯이 보였다. 기고만장해진 페르디난트 2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조약을 깨뜨렸다. 그리고 독일에 있는 모든 신교도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신도들을 추방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전쟁의 판도는 극적으로 뒤집혔다. 1630년 스웨덴 왕 구스타프 2세가 이끄는 군대가 물밀듯이 독일로 진격해 온 것이다. 구스타프 2세는 ‘북방의 사자’로 불리는 젊고 용맹한 개신교 군주였다. 독일 북부의 개신교 세력이 무너지면 그는 가톨릭 세력과 어깨를 마주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 사태를 피하고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것이다. 구스타프 2세의 군대는 승승장구해 가톨릭 진영의 심장인 바이에른의 수도 뮌헨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1632년 뤼첸에서 선봉에 서서 싸우던 구스타프 2세가 전사하면서 다시 전세가 뒤집혔다. 왕을 잃은 스웨덴 군은 에스파냐 군에 패주를 거듭했다.

그런데 또 한 번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프랑스가 신교의 편에서 참전하여 가톨릭 진영을 맹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스는 철저한 가톨릭 국가였다. 참전을 지시한 프랑스의 재상 리슐리외는 가톨릭 교회의 추기경이기도 했다. 그러나 리슐리외의 노림수는 다른 데 있었다. 프랑스의 정적(政敵)이자 눈엣가시로 여기던 오스트리아와 에스파냐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힘을 빼놓으려는 것이었다. 전쟁의 명분은 종교적 신념에 따른 것이었지만, 전쟁에 뛰어든 세력들이 실제로 주시했던 것은 이처럼 국제 역학 구도에서 각자의 이해관계였다.

 

 

30년 전쟁
  

30년 전쟁은 독일에서 일어났지만 유럽 전체가 참가한 유럽 전쟁의 성격이 강했다.

강대국 프랑스가 개입하자 전세는 다시 예측불허가 되었다. 전쟁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지루하게 이어졌다. 결국 1641년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은 페르디난트 3세가 종전을 제의하면서 강화회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은 오랫동안 난항을 거듭했고, 국지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1648년 마침내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되면서 30년 전쟁이 막을 내렸다.

신교와 구교가 서로를 인정하기로 하면서 전쟁은 무승부로 막을 내렸지만, 사실상 신교의 승리에 가까웠다. 신교 측의 프랑스와 스웨덴은 적지 않은 영토를 전리품으로 가져갔고, 스위스와 네덜란드는 독립을 승인받았다. 신교 측에 무게를 실어 주어 구교 측으로 기울던 시소 게임의 향배를 바꾸어 놓은 프랑스는 리슐리외의 계획대로 대륙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반면 독일 황제는 치명타를 입었다. 베스트팔렌 조약이 독일 연방 제후국들의 완전한 주권과 독립을 인정해 줌으로써 제후들의 목소리가 전보다 더 높아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랑스와 스웨덴에 영토를 헌납하고 오랜 전쟁으로 신성로마 제국의 결속력이 약화되면서 황제의 권위는 형편없이 추락했다. 독일이 통일 민족 국가로 발돋움할 싹이 잘리고 만 것이다.

베스트팔렌 강화회의

전쟁으로 인구의 3분의 1 이상을 잃고 국토가 쑥대밭이 된 독일은 향후 100년 동안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독일이 분열되어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프랑스를 비롯한 주변국들이 내심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는 역시 독일 국민들이었다. 가톨릭 군대가 이기든 개신교 군대가 이기든 학살과 약탈은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똑같이 참혹했다.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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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흠 | 직업기자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경남 진해에서 출생했다.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경향신문 사회부 기자로 수년간 재직했다.

김소정 | 직업교사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출생했다. 단국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하고, 수년간 사회 선생님으로 근무했다. 현재 우리 문화와 역사를 중심으로 한 체험학습 선생님으로 있으면서 어린이를 비롯해 청소년들을 위한 역사책을..펼쳐보기

출처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 저자박영흠 | cp명청아출판사 전체목차 도서 소개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발자취를 통해 정치, 사회, 문화, 상식을 종합적으로 이해한다지구상에 인류라고 불릴 만한 존재가 처음 등장한 이후 인류가 겪어온 발자취를 100가지 사건으로 정리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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