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의 죽음〉

위대한 화학자를 단두대로 보낸 선동화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11.3×85.6cm, 프랑스 랭스 미술관

 

 

2005년 4월 예술의 전당에서 '서양미술 400년전'이 열렸다. 많은 귀한 작품 원본이 선보인 전시라서 매우 흥미있게 감상하였다. 그런데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748~1825)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라는 작품은 상당히 크다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보니 좀 작았다. 더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그림과 전시된 그림이 달랐다. 그림 속 침대 앞에 놓인 나무 상자의 글이 달랐다. "A MARAT. DAVID"라고 써 있어야 하는데, 그 작품에는 "N'AYANT PU ME CORROMPRE, ILS M'onT ASSASSINE"라고 써 있었다. 이상해서 전시 관계자에게 물어 보았더니 분명히 원본이라고 했다. 어찌된 일인가? 전시 도록을 사 가지고 와서 집에 있는 미술도감의 〈마라의 죽음〉을 찾아 비교해 보니 크기와 나무 상자의 글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심지어 옷감의 주름까지 정확히 같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소장된 작품의 크기는 165×128cm이고, 이번에 전시된 것은 111.3×85.6cm였다. 나중에 참 독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년, 캔버스에 유채, 165×128cm, 벨기에 브뤼셀 왕립 미술관

 

혁명을 선동하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세 점이나 그렸다. 왜 그랬을까? 예술 작품을 남기려는 의도보다는 민중을 선동하려는 의도가 더 컸던 것 같다. 하나는 루브르 박물관에, 또 하나는 랭스 미술관에, 또 다른 하나는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것은 나무 상자에 아무 글이 없다. 랭스 미술관에 소장된 것에는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를 부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N'AYANT PU ME CORROMPRE, ILS M'onT ASSASSINE)라고 쓰여 있다. 브뤼셀 왕립 미술관에 소장된 것에는 "다비드가 마라에게 바침"(A MARAT. DAVID)이라고 쓰여 있다. 랭스 미술관의 작품은 보관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공개하지 못하다가 10개월간의 보수를 마치고 일반인에게 전시되고 있다.

다비드는 1748년 8월 30일 파리에서 태어났다. 1774년 스물여섯 살 때 당시 화가들이 동경하던 로마대상을 수상하였고, 1775~80년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미술을 연구하였다. 그는 앵그르(Jean-Auguste Dominigue Ingres, 1780~1867)와 더불어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이다.

 

다비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1785년, 캔버스에 유채, 330×425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파리로 돌아온 때는 막 혁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다비드의 최고 걸작인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애국적인 내용을 담았다고 하나 혁명을 선동한 것도 사실이다. 그는 급진적인 자코뱅파에 가담하여 미술가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큰 권력을 누렸다.

다비드는 자코뱅파의 지도자 로베스피에르(Maximilien Robespierre, 1758~1794)가 실각한 후 투옥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황제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대작들을 그려 나폴레옹(Napoléon Bonaparte, 1769~1721)의 신임을 받고 정치적으로도 복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1816년 벨기에 브뤼셀로 망명하여 끝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825년 12월 29일 생을 마감했다.

과학을 덮친 혁명의 그림자

이 그림의 주인공 마라(Jean Paul Marat, 1743~1793)는 스위스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영국과 프랑스에서 의사로서 명망을 얻었다. 그는 학문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야심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철학적 에세이와 빛, 불에 대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는데, 평은 그리 좋지 않았다.

1779년경 라부아지에는 마라의 한림원 입성을 반대했다. 이 때문에 마라는 한림원과 라부아지에를 적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불이 입자같은 물질이라고 주장했고 라부아지에는 그 논리와 실험의 부당함을 지적하였다.

1789년 혁명이 시작되자 마라는 「시민의 친구」라는 신문을 발간하여 혁명을 선동하였다. 위법적인 비방과 폭력을 선동하다가 1790년과 1791년에 두 번이나 영국으로 피신하였다. 그런 중에도 지하에서 계속 신문을 내면서 독설로 혁명을 선동하였다.

마라는 왕당파뿐만 아니라 같은 공화주의자 중에서도 급진적이지 않은 사람은 모두 적으로 몰고 공격하였다. 성직자, 귀족, 평민 대표들로 이루어진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온건한 혁명을 이루려던 네케르(Jacques Necker, 1732~1804), 혁명의 이론적 바탕이 되었던 「인권 선언문」을 작성했던 라파예트 후작(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입헌군주제 공화정주의자인 혁명지도자 미라보(Honoré Mirabeau, 1749~1791) 등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하였다.

마라는 이렇게 급진적인 폭력 혁명을 선동하여 1789년 9월 피의 대혁명을 일으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 여세로 국민회의에 입성하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그는 정치적 원수이자 학문적 원수인 라부아지에가 가난한 시민의 세금을 착취하는 악덕 세금징수원이었다고 고소하였다.

1793년 7월 13일, 온건한 혁명주의자인 지롱드파에 속한 스물네 살의 시골 처녀 샤를로트 코르데(Charlotte de Corday, 1768~1793)가 마라를 살해했다. 마라는 고질적인 피부병으로 피부가 마르는 것을 막기 위해 욕조에서 집무를 보는 때가 많았는데 그곳에서 살해 당했다. 다비드는 그의 죽음을 미화하여 이 그림을 그렸다.

다비드가 그린 뛰어난 회화 덕분인지 마라의 시체는 역사적 위인들과 같이 판테온에 안장되어 2년간 시민의 애도를 받았다. 그러나 곧 그의 급진적인 사상과 피를 부른 폭력의 선동에 대한 역사의 재평가가 이루어졌고, 그를 암살한 코르데의 평가와 희비가 뒤집혀서 지금은 잔인한 인물로 평가하는 역사가도 있을 정도다.

마라의 살해 사건에 다비드의 그림까지 영향을 끼쳐 혁명은 극단으로 치달았고, 1794년 5월 8일에 결국 라부아지에와 그의 장인인 자크 폴제도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코르데는 〈마라의 죽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 그림의 또 한 명의 주인공이다. 가난한 귀족 출신으로 노르망디 시골에서 태어나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읜 뒤 캉(Caen)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등의 저작을 읽고 혁명적 시민 사상에 심취하여 공화주의자가 되었으나 피의 혁명이 아닌 온건한 개혁을 지지하여 지롱드파의 청년당원이 되었다.

코르데는 파리에서 자코뱅파가 득세하여 수많은 사람을 죽인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그런 폭력과 숙청이 공화국을 세우는 데 오히려 해가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잔인한 숙청 운동의 중심에 있는 자코뱅파의 지도자인 마라를 살해하기로 결심하고, 그 길로 파리에 올라와 마라의 집을 방문하여 욕조에 있던 그를 살해하였다.

 

보드리, 〈샤를로트 코르데〉, 1860년, 캔버스에 유채, 203×154cm, 프랑스 낭트 미술관

 

코르데는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에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요구하고, 의연하고 편안한 표정으로 공화국을 위해 순교한다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영웅이 되었다. 후에 그녀의 소원대로 자기가 살해한 마라와 평판이 뒤바뀌며 프랑스 혁명의 중요 인물로 역사에 남았다.

마라의 살해 사건을 다룬 또 하나의 유명한 그림은 제2제정 때인 1860년 보드리(Paul Jacques Aime Baudry, 1828~1886)가 그린 〈샤를로트 코르데〉다. 보드리의 그림에는 막 죽은 마라만이 아니라, 그를 살해한 코르데가 프랑스 지도를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위대한 화학자를 희생시킨 음모

다비드의 작품 〈마라의 죽음〉은 한 급진적 혁명가의 죽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살해할 때 사용했을 바닥에 떨어진 칼, 코르데가 보낸 편지, 칼에 찔린 가슴의 상처 등, 마치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듯이 화면 안에 그대로 그려 놓아 살인 사건의 실제적인 기록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마라와 같은 급진적 자코뱅파에 있던 다비드에 의하여 마라의 죽음은 교묘하게 미화되었다.

다비드, 〈마라의 죽음〉 중 편지 부분도

 

마라의 손에 들린 편지는 살해자 코르데가 그에게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1793년 7월 13일, 마리 안느 샤로테가 시민 마라 씨에게, 제가 너무나 비참하여 당신의 친절을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편지를 마라의 손에 들린 다비드의 의도는 확실하다. 청렴하고 헌신적인 마라는 병환 중에도 불구하고 욕조에서까지 국민을 위해 일하였다. 코르데는 고통받는 시민으로 위장하여 잠입하였고, 마라는 죽는 순간까지도 불쌍한 시민으로 위장한 살인자를 위해 헌신하다가 억울하게 죽었다. 이 그림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다비드 그림의 힘이다.

다비드는 마라의 죽음을 알자마자 곧 이 그림을 제작하였고, 1793년 11월 14일 의회에 전시하였다. 그림을 본 시민들은 흥분하였다. 다비드는 자코뱅파가 너무 잔인하다고 불평하던 시민들의 마음을 자기편으로 돌려놓았다. 다비드는 이렇게 정치적인 살해 사건을 불멸의 이미지로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사진과 같은 이 그림의 영향은 당시에 실로 지대하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다비드는 그런 영향을 강하게 하기 위해 화면의 반 이상을 어둡게 하고 낮게 숙인 마라의 머리에 관객의 시선을 모으고 강한 감정을 갖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윗부분의 어둠은 진공처럼 우리에게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데, 어둠의 오른쪽에 있는 어렴풋한 빛은 그의 순교에 의한 결과로서 희망을 보여주는 듯하다.

마라의 가슴에 난 상처나 드러난 피 자국은 모두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가 않다. 얼굴도 시체 같지 않고 살해당했을 때의 괴로움도 없이 온화한 표정이다. 시체가 이렇게 편지와 펜을 들고 있는 것도 이상하지만, 편지를 쥔 팔과 펜을 들고 늘어진 팔까지도 시체 같지 않고 여전히 집무를 하는 살아 있는 팔 같다.

이것은 시민의 영웅이 초췌한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는 다비드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머리에 두른 수건은 마치 성인의 후광 같은 효과를 주고, 가슴에 난 상처는 그리스도의 창에 찔린 상처를 연상시킨다. 다비드가 나무 상자에 쓴 "다비드가 마라에게 바침"이라는 문구는 마치 묘비 같아서 그의 죽음을 순교자나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경건한 기념비로 격상시킨다. 또한 랭스 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의 "그들이 나를 죽여도 나를 부패시키지는 못할 것이다"라는 글은 마라의 청렴결백함과 그의 개혁이 약화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동적 의미를 담고 있다.

다비드의 예술과 마라의 죽음은 전문가, 지식인, 국가, 개혁 등 여러 가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게 한다. 사회 저명인사 등 이른바 공인은 일반 대중에게 때로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한다. 때로는 사실을 왜곡하고 감정을 증폭시키거나 방향을 바꾸게도 한다.

마라는 위대한 학자 라부아지에가 자신의 학문적 오류를 지적하고 한림원 입성을 반대했다고 하여 혁명의 시기에 그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 한때 라부아지에를 존경했던 제자 푸르크루아도 그의 처형에 찬성했다. 마라, 다비드, 로베스피에르는 시민의 적을 척결한다는 미명하에 단두대 앞에 서서 "공화국은 과학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의만 있을 뿐이다"는 말을 던지며 인류의 재산인 라부아지에의 생명을 단두대로 끊어버렸다.

다비드는 공화파로서 왕당파를 격파하고 300명이 넘는 사람을 단두대로 보내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그런데 나폴레옹이 집권하자 철저한 황당파(황제 옹립 당파)가 되었다. 황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인류에게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으며, 얼마나 잔혹할 수 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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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 전체항목 집필자 소개

한양대학교 화학공학과와 동 대학원 산업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파리 국립대학교(Universite Piere et Marie Curie)에서 고분자화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결정구조의 아름..펼쳐보기

출처

미술관에 간 화학자
미술관에 간 화학자 | 저자전창림 | cp명어바웃어북 전체목차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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