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나는 '음모론'으로 세상 봐… 뒤에 숨은 소수 그룹이 모든 걸 조종해"
입력 : 2015.06.08 03:00 / 조선일보
[한국 추리소설의 代父 김성종]
"5共 때 건장한 사내들이 대통령 경호에 대하여
자문을 하려고 찾아와 '상상으로 썼다'고 거절"
"'여명의 눈동자'의 인기로 '추정'이라는 假名 쓴 채
같은 신문 '제5열'도 연재… 신문 연재 사상 유례없어"
부산에 내려갔다가 우연히 김성종(金聖鍾·74)씨의 소식을 들었을 때, 내게는 '발견'과 같았다. 추리소설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추억 속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현실에서 존재할뿐더러 여전히 추리작가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 한 해 부산일보에 매주(每週) 단편 추리소설을 연재했어요. 장편 소설 연재도 힘든 작업이지만, 매주 소재를 바꿔 새 작품을 연재한 사례는 지금껏 없었지요. 1년에 무려 52편을 썼어요."
"작년 한 해 부산일보에 매주(每週) 단편 추리소설을 연재했어요. 장편 소설 연재도 힘든 작업이지만, 매주 소재를 바꿔 새 작품을 연재한 사례는 지금껏 없었지요. 1년에 무려 52편을 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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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종씨는“내게 겁을 먹고 다가오는 독자들도 있었다. 소설에서 사람을 워낙 죽이니까”라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처음에는 가능할까 걱정됐어요. 작심하고 몰입하니 되더군요. 내 나이의 작가들은 거의 작품을 안 써요. 나는 과거에 비해 지금이 훨씬 잘 쓰는 것 같아요. 앞으로 더 좋아질 거고."
―글은 정신과 체력으로 쓰는데, 본인 관리를 잘 해오셨군요.
"보다시피 나는 술·담배를 다 하고 운동은 전혀 안 해요. 비결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글을 써온 거죠."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것은 진을 빼는 일이지 마냥 즐거울 수 있나요?
"어디에 매여서 쓰는 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쓰니까요. 농부가 아침에 일어나면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것처럼 글을 써요. 상상력도 아직 시들지 않았어요. 나이 들수록 보고 싶은 책은 늘어나고, 책을 읽으면 내가 무지한 것을 깨닫게 되니 더 보고 싶은 책이 많아져요. 남은 삶을 허투로 쓸 수가 없는 거죠."
그가 신문 연재한 작품들을 엮은 '달맞이언덕의 안개'는 문장의 긴장감도 살아있었고, 단숨에 읽혔다. 작품들 속 공통된 무대는 카페 '죄와 벌'. 그가 부산 해운대의 달맞이언덕에 세운 '추리문학관' 1층에 실재하는 카페다. 여기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그와 얘기를 나누었다.
―선생의 고향은 전남 구례로 알고 있는데, 어쩌다가 부산에 추리문학관을 지었나요?
"화창한 날에는 여기서 대마도도 보입니다. 안개가 낄 때면 더욱 멋있고. 서울서 한창 집필하던 시절에 머리를 식히러 부산에 몇 번 내려왔어요. 그런 인연으로 땅을 사서는 1992년 이걸 짓게 된 거죠. 사설(私設)문학관 1호입니다. 그 바람에 빼도박도 못하고 부산에 살게 됐어요."
그는 구례농고와 연세대 정외과를 나왔다. 그 뒤 잡지사에 근무하던 중 196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경찰관'이 당선됐다.
―등단(登壇)은 소위 '순수문학'으로 했군요.
"추리소설에 관심이 많았지만 그때는 써봐야 발표할 지면이 없었어요.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주지 않았으니까요. 그러다가 한국일보 장편 현상공모에 '최후의 증인'(1974년)이 당선됐어요. '한국전쟁의 비극을 추리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는 게 심사평이었어요. 그때부터 추리소설 청탁이 오는데 정신이 없었어요. 여기저기 20년간 연재했으니까요."
그는 '여명의 눈동자' '제5열' '국제 열차 살인사건' 등 100여권을 썼고, 몇몇 작품은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출세작인 '최후의 증인'은 배창호 감독의 영화 '흑수선'의 원작으로 쓰였다.
―역시 대표작은 '여명의 눈동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고(故) 김종학 감독의 TV 드라마로 공전의 히트를 쳤고.
"10권짜리였는데 300만부쯤 나갔어요. 아이러니하게도 '여명의 눈동자'는 추리소설이 아니었어요. 1975년부터 81년까지 6년간 일간스포츠에 연재했던 거죠. 워낙 인기가 높으니까,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작품 하나를 더 연재해달라'고 했어요. 그분은 막무가내 스타일이라, '여명의 눈동자'를 연재하면서 같은 지면에 '제5열'도 1년 반 연재했어요."
―같은 신문에 한 작가가 두 작품을 동시 연재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래서 '제5열'에는 '추정'이라는 가명을 썼지요. 신문 연재 사상 그런 적이 없었어요."
―두 작품을 동시에 쓰면 사건 스토리와 등장인물이 헷갈릴 법도 했을 텐데.
"그런 적이 더러 있었죠. 사실 두 작품만 했던 게 아니라 다른 신문에도 연재했어요. 그 시절에는 손으로 쓰고 원고를 직접 신문사에 갖다 줬어요. 지금처럼 인터넷이 되는 시절이 아니었으니."
―마감 시간에 못 맞춰 펑크를 낸 적은 없었고요?
"한번은 지쳐서 펑크를 낼 작정으로 친구들과 지리산 종주를 떠났어요. 산장에서 자다 깼는데 슬며시 걱정이 되더라고요. 거기서 랜턴을 켜고는 원고지 일곱 장을 썼어요. 공중전화로 집에서 자고 있던 내 사무실 여비서를 깨워 불러줬어요. 연재 동안 펑크를 한 번도 못 냈던 거지요."
"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쓸 게 많아요. 일본에서는 열차 범죄 소재로만 쓰는 작가도 있으니까요. 나는 작품을 시작할 때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은 꼭 생각해둡니다."
―추리소설을 계속 읽으면 어떤 도식(圖式)이 보이는 것 같았어요.
"과거에는 '사람이 죽었는데 문이 안으로 잠겨 있었다. 범인은 어디로 갔는가'처럼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식이었어요. 지금은 로펌, 병원, 인터넷, 에너지, 국제테러, 화학무기 같은 전문적인 분야가 소재가 되고 스토리 전개도 복잡해졌지요. 존 르 카레('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를 쓴 영국 작가)의 추리소설에는 서방세계로 넘어온 공산국가의 스파이가 사상적 갈등을 겪는 내면 풍경까지 묘사됩니다."
추리문학관 내 집필실에는 잡다한 책과 자료, 신문 스크랩들로 빽빽해 그 안에서 글을 쓰려면 오히려 정신이 산만할 것 같았다. 그것은 내 관점일 뿐이다.
―선생은 세상을 어떤 식으로 관찰합니까?
"나는 '음모론적'으로 세상을 보지요. 신문 뉴스를 읽어도 그냥 읽지 않고 배후를 상상해보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있다는 거죠. 내가 가장 좋아했던 추리소설은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자칼의 날'이지요. 그는 기자 출신입니다. 최형도 그만두고 한번 써보세요."
―저는 그런 음모론의 허구를 추적하고 벗겨내는 데 더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내가 말하는 음모론적 시각은 사실과 다르게 거짓을 지어내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작동 원리에 관한 겁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이면(裏面)에는 다른 힘이 숨어있고 작용한다는…?
"그런 거죠. 우리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그 세상은 몇몇 소수 실력자들의 음모에 의해 조종된다는 거죠. 선하고 도덕적인 것이 세상을 움직이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어쨌든 좋습니다. 선생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거죠?
"추리를 통한 지적 유희(遊戱), 인간에 내재된 위선과 악마성, 사회의 감춰진 비리를 보여주는 것이지요."
―인간 누구나 위선적이고 악마적 본성이 있다고 봅니까?
"그런 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소설을 쓰니까 인간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고요?
"허허허. 연쇄살인범 같은 범죄자도 한 번 인터뷰해보시지요."
―추리소설 속 범인과 선생을 혼동해, 선생에 대해 집착적이거나 이상한 성격일 것으로 보는 이들은 없던가요?
"내게 겁을 먹고 다가오는 독자들도 있었어요. 소설에서 사람을 워낙 죽이니까."
―실제 살인 사건 현장을 본 적이 있습니까?
"직접 본 경우는 없어요. 살인이나 시신 묘사는 다 상상이지요. '제5열'에는 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암살하는 장면이 나와요. 작품이 나온 뒤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됐어요. 5공 정권 때 건장한 사나이들이 찾아와 '대통령 경호에 대한 자문을 하고 싶다'는 거예요. '난 그거 모른다. 모두 상상해서 썼다'고 했어요."
―선생은 대중적으로 성공했지만, 문단에서는 통속 추리작가로 취급해 눈길을 주지 않았지요?
"한국문학이 도식화되고 폐쇄적이어서 그런 거지요. 애거사 크리스티, 코난 도일, 조앤 롤링이 문학의 순수성을 훼손했나요. 스타인벡, 윌리엄 포크너도 추리소설을 썼어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들의 추리소설 모음집도 있어요. 일본은 추리작가가 1000명쯤 돼요. 하지만 우리는 추리소설이나 SF 분야에 작가가 없어요. 이런 배타성이 한국문학을 왜소하게 만들었어요."
―동료 문인과 평론가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는 떨칠 수가 없지요?
"평론가들은 무식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싶지 않아요. 아예 읽어보지도 않은 채 상업소설이니 어떠니 하니까. 나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어요. 내 인생 내가 사는 겁니다."
―선생의 이력 중에 흥미로운 것은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부산 시의원 후보로 나섰더군요. 동명이인인 줄 알았습니다.
"신문에 '특이한 출마자' '화제의 인물'로 났어요. 800여억원의 부산시 문화 예산을 책정하는 시의원들 중에서 문화계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출마한 거죠. 여당을 싫어해 야당으로 나섰고 물론 떨어졌지요. 내가 엉뚱한 면이 있어요."
카페 '죄와 벌'에서 일어나 청사포 해변의 조개구이집으로 내려갔다. 그는 젊은이처럼 백팩을 메고 있었다. 소주잔을 앞에 놓고 그는 6·25에 관한 대하소설을 준비 중이라고 털어놓았다.
"전쟁이 나면 남자들은 총 들고 싸우지만 제일 고난을 받는 이들은 아녀자이지요. '독일군의 선물'(허버트 릴리호 作)이라는 아주 짤막한 소설이 있어요. 전쟁이 끝난 뒤 병사가 귀향했는데 가로등 아래에서 짙은 화장을 한 여인이 '놀다 가세요'라고 합니다. 몇 년 전 전쟁으로 헤어졌던 자기 아내였던 거죠. 전쟁이 양민에게 선물하는 것은 그런 거지요."
―왜 6·25 소설을 생각했나요?
"6·25 때 내 부친은 제주도로 징용됐고, 임신 중인 모친은 5남매를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갔어요. 피란길에 막내를 낳고 열이틀 만에 돌아가셨고, 그 막내도 죽었어요. 내 나이 열세 살 때였어요. 스페인 내란을 소재로 헤밍웨이는 연애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썼지만, 나는 수백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앙드레 말로의 '희망'(1937년)처럼 쓰고 싶어요. 내가 이걸 쓰면 산소를 마시는 기분이 되겠지요."
어둠이 뱀처럼 청사포 해변으로 몰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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