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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로 본 간단한 중국역사...

도깨비-1 2015. 4. 13. 00:47

 

 

삼국지로 본 간단한 중국역사...

 

나는 삼국지를 어릴 적 그러니까 중/고등학교 때인가 옛날 소설로 읽은 적이 있다.

그 때 억지로 읽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읽어서 내용은 가물가물하다.

특히 수 없이 많은 인명과 지명은 사람 골치 아프게 했다.

나중에 성인이 되어서 아마도 한 번 더 읽은 것 같다. 같은 책을 2번 읽은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이문열씨가 지은 것도 한 번 읽었다.

그래서 횟수로만 3번은 읽은 것이다. 그래도 머릿속에 기억나는 것이 거의 없다.

 

내가 읽으면서 불만인 것이 자꾸 인명과 지명을 잊어버리는 것과

이야기의 앞과 뒤의 연결을 자꾸 잊어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기억력이 나쁜가보다.

 

그 당시 불만이 왜 지도로 설명하는 것이 없냐는 것이었다.

위치가 파악이 되지 않으니 내용도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좀 중요한 인명과 지명은 굵게 표시를 해서 주의해서 외우도록 유도를 해야 할 것 아닌가?

그래야 두뇌도 주의 깊게 읽어서 외우게 되지 않는가?

 

중요한 인명과 지명은 굵게 표시를 하고, 가능한 지도를 곁들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직접 삼국지 지도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달랑 한 개가 나오더라.

그 도시 이름도 한자로 적혀 있고, 한자가 뭉개져서 잘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 지도 하나와 <삼국지 바로 보기>라는 글이 있어서 거기서 얻은 내용과

유명한 일본 KOEI社의 삼국지 Ⅸ(9편)에 나오는 지명을 이용해서 만들어 보았다.

 

도대체 어디쯤 있는 지명인가 보기 위해서 3개 자료를 잡탕으로 섞어 만들어 보았다.

 

 

1. 삼국지 소설과 삼국지 역사는 다르다.

 

<삼국지 바로 보기>라는 글을 삼국지 게임을 하거나 삼국지를 읽어 본 사람은 꼭 읽어 보길 권장한다.

<삼국지 바로보기>의 내용은 삼국지 소설과 삼국지 역사를 구분해서 알자는 것이다.

소설은 역사적 내용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와 주변 민족의 역사도 함께 설명하고 있다. 비교가 될 것이다.

 

삼국지가 중국 중심의 국수주의인 중화사상을 나타내며 동북공정과 다를 것이 없다고 본다.

우리 민족의 기원을 찾는 것이 이 글에 포함되어 있다.

단군신화와 관련 있는 내용도 나온다.

가설도 있지만 그래도 다 역사책에 근거가 있는 내용들로 이루어진 것이다. 무시하면 안 된다.

 

그 글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삼국지 소설 = 국수적인 중화사상 = 주변민족의 한화 = 중국 사대주의

 

 

2. 삼국지 소설 지도

 

<그림 : 삼국지 지도 - 내가 억지로 만든 지도>

 

<그림 : KOEI 삼국지 11 지도 - 비교적 정상적인 영역 표현>

 

 

<그림 : KOEI 삼국지 10 지도 - 동남부(베트남, 홍콩, 복건성 지역 포함)

 

 

우선 내가 그린 지도를 설명하겠다. 정확한 것이 아님을 주의하기 바란다.

일단 지도에서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지형이다.

 

즉, <산지와 평지와 강과 바다>이다.

이 지형의 위치는 고대나 지금이나 변함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도시는 옛 지명을 가지고 있거나, 과거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이 도시들이 또한 기준이 된다.

이렇게 하여 나머지 도시들의 위치는 상대적인 위치를 추정하여 집어넣은 것이다.

잘 보면 모두 강을 따라 그 주변에 도시들이 배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인은 양자강 이남으로 거의 내려가지 않았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요즘 도시도 나라의 수도가 있고 '도/주'의 수도가 있다.

분명 삼국지(후한) 시대에도 주를 대표하는 도시가 있고, '군/현'과 군사적 요충지 등

여러 단계의 지명이 나온다.

 

이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모두 같은 등급으로 나타나 있다.

또한 두 개의 이름이 같은 지명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경우는 같은 도시가 2곳에 표시되는 꼴이 된다.

하나의 지명을 자료마다 다른 이름을 쓴 경우 나는 구분하지 못한다.

역사학자도 아니고, 삼국지 열성 팬도 아니다.

그것 구분하느니 그냥 잠이나 자겠다. 이런 작업은 작가들이나 학자가 했어야 할 일이다.

 

이 지도의 목적은 삼국지 게임을 하거나, 삼국지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참고하라고 만든 것이다.

역사적인 실제 지도와는 다르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중국인의 인종 구성과 중국 역사

 

아주 고대에는 동양인이 모두 같은 조상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방과 남방의 종자로 갈리게 된다.

 

중국인은 북방과 남방의 중간에 있는 종자다.

한족(漢族)은 원 거주지가 서쪽 산지 지역인 황토고원지대(장안/낙양)라고 한다.

 

동쪽 평지(중원)는 원래 동이(東夷)의 땅이라고 그들의 역사책에 나온다.

중원이라고 부르는 평지에는 동이족이 살고 있었고 그 가운데 태산이 홀로 솟아서

그곳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제사를 지냈다.

아직도 태산은 중국의 신령한 산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동이가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한족을 압도했었다.

그래서 초창기 주/진/한의 수도인 장안/낙양이 너무 서쪽에 위치해 있는 것이다.

 

이 동이족이 우리의 조상이거나 우리와 친척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단지 중국인들이 같은 한자의 동이라는 이름을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왜 사람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그 후 한족과 동이(東夷)가 혼혈이 되었지만, 성씨와 이름은 지배족인 한족(漢族)을 따르게 된 것이다.

원래 봉건 국가들의 연합이었지만 진나라에 의해서 하나의 법과 하나의 문자로 통일된다.

 

그 후 한나라에 의해서 약 400년 통합이 이루어지게 되어 한족이 탄생한다.

원래의 중국 민족인 화하(華夏)족은 사라지고 동이와 혼혈이 된 새로운 한족이 '진/한' 때에 만들어진다.

 

그들의 이야기가 삼국지이다.

그 중 조조가 차지한 중원 노른자위 땅이 동이족의 영토이고, 촉과 오는 변방이다.

중국의 정통성은 위나라 조조에게 있다고 해도 문제될 것이 없는데

삼국지 소설에서 촉 땅의 유비에게 정통성을 주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원래의 한족은 황토고원의 화하족 사람들이고, 중원은 동이족이며,

양자강 이남은 또 다른 별개의 민족들이다.

 

동이족은 한족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의 중심으로 남아 있다.

그 중에 중국 역사에 3번째 서열로 가담한 것이 오 땅의 사람들이다.

 

기타 양자강 이남의 종족은 나중에 중국에 흡수되거나 쫓겨난다.

태국의 타이족은 원래 운남성 대리국에 살던 사람들이었는데 몽고족 침입 때에 도망쳤으니

양자강 이남 사람들이 남방계 인종임을 알 수 있다.

 

역사는 동이족이 끌고 왔지만, 타이틀은 한족으로 되어 있다.

중국의 역사는 동이족의 역사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를 한족이라 부르기 때문에 동이는 사라졌다.

이 혼혈 한족(북방인)은 양자강이남 사람들(남방인)을 차별대우 했다.

그래서 중국인 90%이상이 스스로를 한족이라고 부른다. 즉, 한족이 되고 싶어 한다.

그것이 서남공정(학살&혼혈), 서북공정, 동북공정(역사말살)이다.

 

유대인들의 예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민족은 가장 중요한 것이 머릿속에 들어 있는 <정체성>이다.

인종은 유대인이나 터키인처럼 혼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정신은 어느 쪽을 따르는가?

유대인은 모계의 종교를 받으면 바로 유대인이 된다.

터키인은 언어와 역사를 투르크족의 것으로 계승했다. 외모는 유럽 백인, 아랍인과 혼혈이다.

언어도 점차 달라져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적인 기억(자신의 족보와 일기장)을 잊어버리면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동족 간에 적이 되는 수도 있다.

 

육체적 한족은 없어졌지만, 정신적 한족은 남아 있어서 오늘날 중국이 동이족이 아닌

한족의 나라가 된 것이다.

 

중국인이 한족이란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은 '진/한'을 거쳐서 약 400년 동안을

하나의 국가로 존재한 것에 이유가 있다.

 

즉, 하나의 국가를 이루어 오랜동안 있으면 하나의 민족이 생긴다.

아마 미국도 나중엔 하나의 민족이 될 것이다. 민족도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니까.

 

 

4. 지도로 보는 간단한 중국역사

 

<삼국지 바로 보기>에서 중국 역사 모음이 있어서 요약해 보았다.

<그림 : 우리가 흔히 아는 가짜 삼국지 지도>

 

이 지도는 한대의 영향력이 미치던 영토로 착각해서 그린 것이다.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역이 아니다.

 

<그림 : 진짜 삼국지도, 실제 한족이 지배한 영역>

어째서 그러한가?

또는 다른 지도(^^)

삼국의 영토는 한대의 영토를 기초로 하고 있다.

한대의 영토 중에 한족이 직접 지배한 영토가 삼국지의 무대가 된다.

기타 지역은 아직 한화되지 않은 이민족이 살던 곳이다.

중국이 분열되면 당연 독립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그림 : 중국의 고대 은나라-주나라-춘추전국시대-진나라-한나라(전한) 영토>

오리지날 한족 영토

원래는 <하-은-주-한>으로 간다고 하지만 <하>의 유적은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그 전에 고조선이 있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기록상으로만 존재한다.

처음 중국은 하나라에서 시작하니 <화하족>이라 불렀다.

그리고 동쪽의 <동이족>과 결합해서 <한족>이라 부른다.

중국을 한족이라 부르는 것은 한나라를 그 시작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수도는 낙약과 장안으로 화하족의 중심이다.

이 수도는 주나라와 진나라의 수도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국 문명은 황하에서 시작되었고 동이족의 영토다.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것으로 한자가 처음 만들어 졌다.

그러니 동이족이 바로 한족이다.

지도를 보면 은나라는 황하를 따라 주변을 지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동쪽 산동 지역에 태산이 있다.

은나라(상나라)를 엎은 주나라는 양자강 이북까지 영토를 넓혔다.

진나라, 한나라가 되고 나서 양자강 이남까지 지배하게 된다.

<그림 : 중국 북쪽의 지명>

<우랄 알타이 어족>이라는 것이 있다.

다시 <우랄 어족>과 <알타이 어족>으로 나뉜다.

그 알타이가 알타이 산맥에서 나온 것이다. 우랄은 우랄 산맥에서 나온다.

우랄은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해 준다. 알타이는 아시아의 중앙에 있다.

우랄 알타이 어족은 주로 북방 몽골 계통의 언어를 뜻한다.

우리나라 말이나 일본어나 몽고어나 터키어 같은 경우가 이런 쪽과 가깝다.

<그림 :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한>통일 전의 영토>

이 영토가 한나라의 영토가 된다.

요동은 고조선의 영토로 추정되지만

연나라의 공격으로 평양으로 후퇴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 요동이 진나라때 중국 영토에 속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은 만리장성의 끝이 요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영토는 나중에 고구려에 의해서 수복된다.

<연/제/초>는 동이족의 영토였다. 반면 <진/위/한>은 화하족의 영토였다.

이곳에 낙양과 장안이 있다.

이 수도는 주나라때부터 당나라까지 수도로 쓰인다.

이 수도는 서역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곳에 있다.

<그림 : 중국 고대의 주변 민족>

 

중국의 <한대>는 유럽의 <로마>에 해당된다.

그 이전 <진대>는 유럽의 <알렉산더>시대에 해당된다.

 

중국에서 흉노가 사라질 무렵 유럽에선 훈족이 나타나서 로마를 멸망시킨다.

중국에서 돌궐이 사라질 무렵 서쪽에선 투르크 왕국들이 생기며 동로마를 멸망시킨다.

 

몽고족이 동서를 왔다갔다 할 수 있다면 과거 흉노와 돌궐이 그렇게 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과거에는 기마 유목민의 군사력이 최강이었다.

로마도 훈족에게 조공을 받쳤고, 한나라도 흉노에 조공을 받쳤다.

 

 

<그림 : 흉노족의 이동> 기록을 좇아서 찾은 추정 위치

중국에서 이미 동서로 흉노족이 갈라진 기록이 나온다.

서쪽에서 조금만 더 가면 바로 유럽이다.

흉노를 대쥬신이라고 부르는 것은 흉노를 조선의 선조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흉노와 고조선은 다른 종족인 것 같다.

흉노는 북방 유목민족의 뿌리이긴 하지만

흉노 동쪽에 동호(선비/오환)가 있었고 그 동쪽에 고조선이 있었다.

고로 나는 흉노와 고조선은 다른 종족이라고 본다.

고조선은 중국 문명을 이끈 정주문명인 것 같고,

동과 서로 갈라져서 중국과 만주 한반도로 갈라진 것 같다.

기마유목민족은 이후에 들어온다.

<그림 : 고대의 우리나라 민족 이동 경로 추정>

우리민족을 북방 기마민족이라 가정할 경우

우리 민족을 북방 유목민 중의 어느 한 종족으로 가정한 경우 민족 이동 경로이다.

아마도 흉노를 우리 조상 민족으로 본 것 같다.

탁록 전투는 치우와 황제가 싸운 것인데 흉노와 한족이 싸운 것으로 그려 놓았다.

그 이후 동북으로 가서 부여를 건국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허나 부여가 있기 전에 동북에는 분명 고조선이 있었다.

고로 기마유목민족 계통의 부여와 고조선 계통의 원주민이 섞인 것으로 보인다.

중국인이 맥족이라 부르던 종족이 직계조상으로 추정된다.

몽골과 고구려의 관계는 몽골의 신화에서 발견되는 유사점으로 추정한 것이다.

코리(=구리=구려=고려=Corea=Korea)족고주몽과 같은 활솜씨가 좋은 자에 대한 전설이 있다.

하나의 부족이 둘로 갈라지는 내용이 담겨 있다.

나중에 몽골에서 징기스칸이 나온다.

동명성왕은 고주몽이 아니다.

동명성왕은 부여를 건국한 사람이고, 고주몽은 고구려를 건국한 사람이다.

고주몽은 동명성왕의 신화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렇다면 부여의 건국 신화를 몽골과 고구려가 나누어 가진 꼴이 된다.

고조선은 청동기과 고인돌의 문명인데,

부여와 고구려, 백제계통의 기마민족 뿌리와는 다른 것 같다.

최근 발견된 홍산문명을 보면 고조선은 기마민족 국가가 아닌 정주문명 국가였다.

흉노로부터 시작된 기마 유목 민족의 역사는 부여와 고구려로 이어지는 모양이다.

그럼 고조선은 어디로 이어지는 것일까? 삼한?

<그림 : 중국 한대의 동북아 종족>

여기서부터는 이미 알고 있는 역사의 세계이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켰고, 한반도에 한4군을 두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건국되는 과정에 있다.

기마 문명은 서쪽 터키지역에서 중앙 아시아 초원지대와

한반도 신라와 가야까지 걸쳐있다.

스키타이에서 시작해서 흉노를 거치면서

그 피지배 민족으로 있던 동호(선비)로 전해지고,

그 동쪽의 부여와 여기서 나온 고구려와 백제로 이어진다.

신라는 흉노계 민족이 이동해서 건국한 서라벌이 시작이다.

과연 신라만 흉노계일까?

그러나 한반도와 일본에도 원주민이 있었다.

한반도 남부는 고조선의 지배 영역은 아니었다.

결국 한반도와 일본은 원주민과 기마유목민의 혼혈이라고 봐야 한다.

특히 한반도는 <기마유목민+한족+고조선민족+원주민 = 한민족>이 된다.

<그림 : 한나라와 고구려>

고구려가 막 태어나고 신라/백제/가야/왜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상태이다.

왜란 남한의 삼한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야요이 문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백제는 부여에서 나온 지배자들이 마한을 정복한 것이다.

신라는 흉노계의 지배자들이 진한을 정복한 것이다.

가야도 아마 흉노계 지배자가 변한을 정복한 것이라고 본다.

삼한은 원래 고조선 계통의 사람들일 것이다.

부여계는 흉노계와 같은 기마유목민일 가능성이 크다.

우린 우리 역사를 한나라의 기록을 통해서만 볼 수 밖에 없다.

고조선의 역사를 중국 기록에서 찾았듯이 고구려의 역사도 중국 기록에서 찾게 될 것이다.

<그림 : 한나라 때의 지방 명칭>

중원의 주요 주(소국)의 명칭이다.

조조는 청주병을 거느렸다.

청주는 산동반도이고 동이족의 땅이었다.

동탁, 마등, 마초는 서량병을 거느렸다.

서량병은 북방계통의 기마유목민족일 것이다.

마초는 아마도 혼혈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림 : 전한-후한-황건봉기 현황>

여러 곳에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조직적인 반란이다.

황건적의 난이 아니라 황건민중봉기이다. 중국은 종교단체로 인한 반란이 많이 있었다.

그래서 최근 파룬궁(법륜공)이란 기수련 단체도 수난을 겪고 있다.

공산국가에서 종교를 허용할 리가 없다.

로마도 기독교의 지지를 받은 지휘관의 승리로 기독교가 국교가 되었다.

종교란 위험한 것이다.

여하튼 황건적은 도교 계통 종교의 반란이다. 중국에는 도교라는 전통 종교가 있었다.

아직 불교는 큰 부분을 차지 하지 못 한다.

<그림 : 삼국지의 영웅출생지>

서부/북부 유목민 출신 또는 그 문화 영향을 받은 영웅은 항상 악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중국인은 북방 기마민족을 아주 싫어 한다.

중국 한족은 그들의 정통성을 한나라와 촉한(유비)에서 찾는다.

그러나 위나라(조조)가 중국의 정통을 계승한 나라다.

단지 북방 민족이 지배하던 북방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동탁/여포/이각/곽사가 삼국지에서 그렇게 오래동안 나올 수 있던 것은 강력한 군대 덕분이다.

조조가 마초와 싸울 때의 두려움 또한 북방 유목민의 군대 때문이다.

여하튼 삼국지가 만들어질 당시에 북방은 한족의 땅이 아니었다.

그래서 황실과 같은 유씨인 유비와 남방의 손권을 조조보다 좋게 그린 것이다.

여포는 아마도 흉노 사람인 모양이다.

<그림 : 삼국지 초기 군웅들의 위치>

<그림 : 삼국지 1차 대전 = 관도대전 초반, 원소 vs 조조>

북방의 원소가 낙양 근처의 조조를 치러 온 것이니 위치가 사진과 같다.

방어자가 조조이고 공격자가 원소이다.

원소가 세력이 더 컸지만 한심하게 조조에게 당한다.

원소는 북방 민족과 관계가 좋았다.

<그림 : 삼국지 관도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오환족과의 전투>

원소는 북방의 오환과 관계가 좋았기 때문에 오환이 원소를 돕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조조와 오환이 싸움을 하는 것이다.

삼국 시대 중국 군사력은 북방 민족보다 강했던 모양이다.

삼국 시대는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지 않는다.

원소의 자식들은 요동까지 도망갔다. 당시 요동은 고구려 영토가 아니었다.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 후반, 조조의 추격 마무리>

<그림 : 관도 대전 당시의 주변 민족>

여기 나오는 오환족은 거란족의 땅과 일치한다.

선비족이 중원으로 들어가면 그 빈 땅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어느 한 순간 돌궐(투르크)이라는 나라가 동방에서 시작된다.

이 시대는 흉노가 힘을 잃은 상태다.

흉노의 지배 하에 있던 부족들이 오히려 힘을 더 크게 키운다.

<그림 : 삼국지 관도 대전의 결말, 조조의 영토>

사실상 중국의 통일 달성

사실상 삼국지는 여기서 끝난다. 조조가 중국을 통일한 것이다.

조조가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중원이라고 부르는 노른자위땅이다.

이곳에 태산(중국 황제가 제사지내는 곳)이 있다.

이제 남은 것은 촉 땅인 익주, 형주, 손권의 땅인 오, 마등의 땅인 서량이다.

조조는 남쪽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형주를 얻는다.

<그림 : 삼국지 2차 대전 = 적벽대전, 조조 vs 손권>

형주를 얻은 조조는 형주의 해군의 도움을 받아 양자강을 건너려고 한다.

적벽의 위치를 찾아 보면 형주의 아래에 있다.

유비의 제갈량이 엄청난 힘을 발휘하지만

실제 그런 일이 있었다고 보긴 어렵고, 조조와 손권의 싸움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후반, 조조퇴각>

<그림 : 삼국지 적벽대전 결과 손권 오의 영토>

모든 도시들이 황하와 양자강 주변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강을 통해 배로 물자를 수송하고 이동하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또한 강 주변에 물이 풍부하여 농사짓기 좋기 때문이다.

형주땅은 적벽 대전 결과로 유비가 먹었으나

촉으로 이동하고 나서 오에 빼앗기고 만다.

<그림 : 삼국의 성립>

이렇게 하여 명목상 삼국이 성립된다.

단지 요동에 미친 연나라가 하나 있다.

아마도 요하의 요택이 있어 독립을 오래 유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고조선의 시대는 이미 끝났지?

부여 계통에서 나온 국가들은 고조선 영토 회복에 대한 집착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고구려, 백제 모두 부여를 조상이라고 말하지만

고조선을 조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오히려 삼한이 고조선에서 나왔다고 한다.

내 생각에는 삼한도 고조선과는 다른 것 같다.

<그림 : 빠진 내용, 1차 요동전쟁, 고구려 위 연합 vs 연>

조조와 고구려가 연합해서 공손연을 치는 내용이다.

아마도 요동을 나누어 가지자고 얘기했을 것이다.

<그림 : 1차 요동전쟁, 상세>

초반에는 위나라와 고구려가 연합해서 좋은 성적을 거둔 것 같다.

<그림 : 2차 요동전쟁, 고구려 vs 위> 고구려의 굴욕

처음엔 고구려-위 연합이 연나라를 깬다.

그 후 고구려와 위나라가 한 판 붙는다.

이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이 의외로 오래전에 중국인들이

한반도 깊이 들어와 있었다는 것이다.

이 말은 한국인의 상당수(요동/평양/경기/전라)가

중국인의 피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인의 아무거나 먹기 문화도 중국의 영향이 아닐까?

이 때 고구려는 멸망직전까지 간다.

<그림 : 제갈량의 남만 정복>

베트남까지는 가지도 못했다.

당시 남만이란 양자강 이남 사람을 뜻한다.

당시 동이족이 중국 동해안 평지사람들을 나타내듯이

남만은 양자강 이남 사람들을 나타낸다.

중국인들의 영토는 크지 않았다. 베트남까지는 참으로 멀다.

<그림 : 제갈량의 소설상의 행군로>

불가능할 것으로 판단됨.

보면 알겠지만 베트남과는 상관 없는 곳이다.

전부 산악지대다. 홍콩까지도 가지 못 한다.

<그림 : 제갈량의 실제 예상 행군로>

제갈량이 놀았던 지점은 촉땅 남부 지금의 운남성 정도이다.

그러나 소설이나 게임에는 베트남까지 간 것으로 나와 있다.

남만은 베트남이 아니다.

시간이 많지 않기 때문에 맹획을 7번잡았다 놓아 주긴 뭐하니

그냥 힘으로 눌렀다. 그게 중국 방식이다.

그 다음이 제갈량과 강유의 북방공격이다.

별로 성과 없는 소모전만 벌이다가 제갈량이 죽는다.

강유 또한 전쟁만 벌이느라 국고를 탕진하게 된다.

위나라는 실속이 없는 전쟁을 피하려고 촉과 오를 남겨 놓는다.

그러나 사마씨가 진나라를 세우면서

새 왕조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촉과 오를 통일하게 된다.

<그림 : 진의 오나라 정벌>

간단한 촉 정벌후 대대적인 오나라 공격

삼국지 소설을 봐도 나오지만 매우 쉽게 촉과 오가 무너진다.

촉을 지켜주는 것은 촉의 군사력이 아닌 제갈량의 귀신 같은 첩보력이라고 나온다.

제갈량이 죽고 이렇게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면

촉과 오의 군사력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오의 경우는 왕의 타락으로 망한 것으로 그려진다.

그림을 보면 여러 곳에서 전면적인 공격이다.

이로써 삼국지의 시대는 끝난다. 촉과 오는 아주 쉽게 무너진다.

이로써 나라가 망하는 것은 2가지 외에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력층의 부패와 외부의 강력한 힘이다.

<그림 : 삼국의 통일, 사마씨의 나라 분열, 8왕의 난과 당시 5호의 위치>

다 통일한 나라를 사마씨들이 망친다.

8왕의 난으로 서로 싸우고 있을 때 북방 기마민족 5종족이 중국을 쳐들어 온다.

강/저는 지금의 티베트와 위구르 족속의 위치에 있다.

서강 자치구라는 것도 강에서 온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위구르와는 다를 것이다. 위구르는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서쪽의 터키가 백인종과 몽골종의 혼혈이다.

이렇게 넓은 곳을 이동할 민족은 기마유목민 밖에 없다.

선비/흉노/갈은 중국에 흡수되어 이미 사라진 종족이다.

흉노와 갈은 중국과 인접한 곳에 있다. 아마도 여포는 흉노족일 것이다.

갈은 이미 중국 땅에 있다.

이때부터 5호 16국(5 종족이 16개의 국가를 세우고 망하는 어지러운 세상)시대다.

<그림 : 5호의 침입으로 줄어든 중국 영토>

남쪽으로 쫓겨간 중국인들

이 때 중국인들이 양자강 이남으로 내려가 양자강 이남이 중국 영토가 된다.

양자강 이남에선 오나라의 건업/남경이 수도가 된다.

이 지역 사람들의 말과 북방 중국어의 말이 다르다.

한국/일본/대만의 한자 발음은 남쪽 중국어와 비슷하다.

중국어도 일본어처럼 받침음이 별로 없다. 오히려 남쪽 사람들이 받침음이 많다.

어쩌면 원래 한자 발음은 지금 중국어보다는 한국어 한자 발음과 비슷했을 것 같다.

이렇게 북방 민족이 섞여 오면서 중국 한자 발음이 달라지게 된 것 같다.

<그림 : 삼국 통일 후의 서진 시대>

아직 북방에 있을 때

<그림 : 5호의 침략후 동진 시대>

남으로 쫓겨간 때

<그림 : 북방민족의 5호 16국 시대>

드디어 북방 민족의 시대가 열리며 중국인의 굴욕의 시대가 왔다.

북쪽의 어지러운 종족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간다.

이들은 결국 수나라와 당나라를 만들게 된다.

수/당 왕조는 북방민족(선비족)의 황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한족으로 동화한다.

그래서 육체는 유목민의 씨앗이나 정신은 한족이 된다.

이 혼란한 시기에 고구려는 최강의 국력을 자랑하게 된다.

그러나 통일이 된 후에 고구려에겐 불행이 시작된다.

아마도 흉노는 이 때 사라지고, 선비도 이 때 사라진다.

몽고 초원엔 돌궐이 나타나는데 몽고족은 돌궐의 후손일까?

어디서 정체 모를 부족들이 이렇게 많이 나타나는 것인지?

이 나라들을 통일한 나라가 수나라(선비계)이고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그 결과 수나라가 망하고

다시 당나라(모계가 선비계)가 통일을 하고 역시 고구려와 2차 대전을 벌인다.

1차는 패배, 그러나 2차에 고구려를 멸망시키며 한반도의 삼국시대는 끝나게 된다.

그 전에 나당 연합이 백제를 멸망시키면서 왜는 일본으로 독립하게 된다.

북쪽은 고구려의 후속국인 발해가 서면서 국제는 <당-발해-신라-일본>이 성립된다.

이 때부터 한국은 신라의 후손으로 갈리며 발해는 청나라로 이어지고,

일본은 독자의 길을 가게 된다.

이 때 중국에 잡혀간 고구려인들이 서쪽으로 남으로 흩어졌다.

그래서 이상한 곳에 가면 한국어와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쪽으로 간 사람들 중에 고선지장군이 있어 서양에 종이를 전해주게 된다.

<그림 : 북방 기마 유목민의 시대, 수/당-금/원/남송 시대>

고구려는 발해로 이어진다. 발해는 거란에 망한다.

그 땅에서 나타난 여진족은 당을 멸망시키고 나중에 금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몽고에서 징기스칸이 나오면서 원을 세우고 다시 중국을 압박하게 된다.

이로써 중국의 자존심은 <한-당-명>인 3개의 나라만으로 좁혀진다.

이 중에 당나라도 순수 한족의 나라는 아니다.

한족이 어디 있나? 이미 모두 섞였는데?

기타 중국의 다른 나라에선 중국의 자존심을 찾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는 <통신-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북방의 우리 친척은 <고구려-발해-금/원-청-중국>으로 이어진다.

고려는 원나라와 많은 문화적인 교류가 있고, 왕족 간의 결혼이 있었다.

그러나 서로간에 못할 짓을 많이 해서 원수지간이 되었다.

고려가 원에 협조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조선이 청에 협조를 했다면?

원은 일본을 침략하다 카미카제(신의 바람)을 만나서 모두 침몰한다.

그리고 이 징기스칸 덕분에

서양은 고려의 금속활자기술을 받고, 중국의 화약을 받게 된다.

4대 발명품이 모두 서양으로 너머가게 된다.

왜 4대 발명품인가?

서양을 과학시대로 이끌고 최강의 군사력을 가지게 만들었다.

먼저 동로마가 투르크의 대포에 멸망하는 아픔을 겪는다.

이렇게 중국 역사에서 한족이 차지하는 부분이 매우 적다.

북방 민족이 이렇게 지속적으로 강한데 과연 고조선이 무사했을까?

부여가 고조선의 후예라면 왜 고조선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는가?

고구려와 백제는 왜 부여만 조상으로 섬기나?

<그림 : 중국의 자존심 회복, 명나라>

원나라가 망하고 몽고족은 북쪽으로 도망간다.

그리고 명나라가 서게 된다. 그리고 우린 조선이 된다.

명나라와 조선은 망국적인 사상으로 살던 국가들이다.

유학을 받아들이면서 한자를 많이 아는 놈만 정치를 하게 된다.

무인들이나 한자를 모르는 사람은 무시당한다.

명나라 황제 중에 정상적인 놈이 없었고, 조선도 참으로 이상하게 답답하게 살았다.

사농공상이라는 황당한 경제 관념을 가지게 된다.

일본이 이 때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명은 후금(발해의 후손?)과의 전쟁에서 지게 된다

타타르가 도망간 몽고족인가?

지금의 타타르족은 러시아 쪽에 살고 있다. 지금 몽고족은 할하족이라 한다.

몽고가 이러하게 광대한 영토를 얻었는데

그 옛날 <흉노=훈, 돌궐=투르크=터키>가 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고대의 고조선이 기마유목민족이라면 그런 넓은 영토는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총이 나오기 전에는 기마유목민의 전투력이 전세계 최고였던 것 같다.

하지만 고조선의 이름을 기억하는 종족은 오히려 중국이다.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모두 고조선의 이름을 잊은 것 같다.

지배자들이 자기들 조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그림 : 다시 북방 기마민족의 세계로, 청나라>

앞에서 말했듯이 <고구려-발해-금-후금-청-중국>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통신-고려-조선-한국>으로 이어진다.

일본은 <가야/백제/왜-일본>으로 이어진다.

이 청나라가 한 일이 재미있다.

북방 몽고족이랑 통혼을 하고 몽고족도 자신의 지배하에 두었다.

북방 민족은 골치 아프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한족과는 통혼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의 영토를 엄청나게 넓혀주어서 지금 중국인들에게 큰 선물을 남겨 주었다.

결국은 한족으로 동화되어 통혼이 되고 언어도 사라져버렸고

청은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며 그 힘을 잃어 버린다.

몽고는 나중에 독립하게 된다.

동북공정은 이 청나라 역사(고구려~청)를 숨기는 것이다.

자기보다 큰 것을 삼키려고 하는 작은 물고기 같다.

청=현대중국=고구려의 후손=고구려인은 중국인!?

고구려는 중국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다.

서로 조상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림 : 청나라가 한족과 북방기마유목민을 구분하던 경계>

청나라도 처음엔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중국인들과 섞이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중국에 동화된 선비족과는 다른 태도다.

선비족들 중에도 중국화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다.

중국은 자신들의 뿌리를 한족에만 두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이 모두 형제처럼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림 : 청나라가 준 선물, 동남쪽 영토>

무협지에 잘 나오는 반청복명의 근거지가 대만이었다.

당시 대만 원주민을 명나라 잔류병이 쳐들어가서 대만이 결국 중국 영토가 되었다.

청이 이 반군을 섬멸하면서 대만이 중국영토가 된 것이다.

삼국지 게임에 나오는 <남만/산월/강족/오환>중에서 푸젠/광둥에 있던 산월도 없어진다.

광둥성이 홍콩 지역이다. 그러니 남만이 베트남이란 것은 상당히 무리라고 하겠다.

그 다음일은 잘 알고 있는 2차 세계 대전,

장계석-모택동 전쟁, 한국(6.25)전쟁 등이 있다.

장계석이 역시 대만으로 도망가서 대만은 또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인류의 역사는 민족간의 전쟁으로 서로 밀리고 밀려서 형성되었다.

훈족에 밀린 게르만족이 로마로 들어가서 로마가 망했다.

게르만족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동쪽에서 밀리면서 서쪽으로 이동해 간 것이다.

순수 단일 민족 없다.!

정리하자!

역사에서 보듯이 나라가 망하는 것은

국민들의 Sex가 문란해서도 아니고, 왕이 홀로 타락해서도 아니다.

주로 집권층(귀족/권력집단/장관/경찰/군인/공무원)의 타락이 주 원인이다.

또 다른 원인은 강력한 힘에 의해서 망하는 경우이다.

이 지구에서 한국을 망하게 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중국/러시아/일본> 뿐이다.

그 때는 우리 스스로가 타락하는 때가 될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체력이 약해지면 4개의 나라 중에 어느 하나가 먹어치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에는 KOEI만한 회사가 없는가?

정말 재미없고 비현실적이며 변태적인 이 삼국지 게임 싫다.

좀 잘 만드는 회사 없나? 말만 시뮬레이션이지 엉터리다.

전체 인구 100% 남녀 각각 50%, 인구 분포 = 피라미드형(피임불가)

나이 50~60 01% 노인
나이 40~50 04% 노인
나이 30~40 07% 장년(노동/병역)
나이 20~30 10% 청년(노동/병역)
나이 10~20 13% 소년
나이 00~10 15% 아이

노동 인구 = 인구의 17%(1男5人부양)
상비 병력 = 실업자 2~3%(100만대군 = 1억의 인구 = 당시 중국 전체 인구?)

당시 중국 인구는 4천만에서 5천만이라고 하니 약 50만이 병력이었을 것이다.

보급 병력 = 전투 병력의 2배(이유는 잘 모르겠음!)

공격군은 수비군의 3배여야 한다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음!

1人1日 식사량 = 700g, 1馬1日 식사량 = 700g, 1가마 = 40kg = 2개월 분량

실제로 물을 함께 먹기 때문에 순수 식량의 무게는 더 적을 것이다.

1일 평지 행군 거리 = 100리 = 40km = 10시간 = 시속 4km
1일 산악 행군 거리 = 25리 = 10km = 10시간 = 시속 1km

화살의 최대 사거리 = 300m, 유효 사거리 = 50m = 적중률 50%(포격 개념으로 사용한다.)

보통 활의 경우는 150m ~ 200m 수준이다. 고로 200m 거리를 두고 대치했을 것이다.

공성 병기 = 공포심을 주는 것이 주 목적임! (실제로는 이것으로 성을 깨기는 어려움)

기병은 보병의 약 2배의 이동 속도이니 최대 이동 거리도 2배로 보자.

십자궁(쇠뇌)는 갑옷을 뚫을 정도로 강하다.(고대의 소총이다.)

노동단위 = MM = Man(사람수) x Month(개월수) = 노동량 = 사람수 x 시간

토지의 식량 생산 능력은? 산지보다 평지가 소출이 많다.(영양물이 퇴적되기 때문에)

현대 농사 기술로는 1인당 1000평 정도가 있어야 안전 한다고 한다.

상업은 도로와 수레, 수로와 배, 상품 저장 창고, 교환 화폐 등이 있어야 발달한다.

화폐는 무한정 생산할 수 없다.(돈을 계속 찍어 내야 한다.)

식량은 무한히 저장할 수 없다.(썩는다.)

이 시대 전략 자원은 철과 말이다.

인구에서 어느정도가 군대로 착출 가능하고,

땅은 어느 정도의 식량 생산력이 있는가?

이 군대를 먹일 식량생산은 어느 정도이며,

이 식량을 운반하는 보급문제 또한 비현실적이다.

사실 식량생산보다는 보급이 더 어려운 문제이다.

식량은 수레와 배로 옮기는데 배가 더 효율적이다.

또한 궁병과 기병의 특징 또한 살리지 못하고 있다.

고대 무기는 <창/칼/방패/활/말/배> 6개가 전부다.

기병은 이동이 빨라서 기습/도망이 쉽다는 것이 특기다.

그래서 적은 수로도 많은 수의 보병을 상대할 수 있다.

야전에선 필수다. 공성이나 수성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과거의 화폐는 <금/은/동/철/쌀/소금/비단>등이다.

직접 사용하는 물질이지만 돈으로도 사용되었다.

물물간 거래가격은 어떻게 되는가?

경제 시뮬레이션이 되는가? 되기는 된다.

매점매석으로 무한 자금, 무한 식량을 축적할 수 있다.

쌀과 돈을 서로 바꾸어서 증폭시킨다.

무한 식량, 무한 돈. 서양의 씨빌라이제이션(문명)이라는 게임이 있는데

이것이 더 현실적이고 재미있다.

KOEI 삼국지에서 아주 황당한 것이 군대가 적보다 많음에도 불구하고

성문이 열리면 진다는 것이다!?

확실히 변태적이다.

유비는 병력을 끌고 남의 세력 밑에서 객장 노릇도 했다.

땅보다 군대가 더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물론 군대를 유지하는 것은 식량 공급능력이다.

보급개념이 없어서 황당한 진격로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당시 공군이 있을 리도 없는데 공중 수송이라도 하는가?

그리고 군대를 마치 물건처럼 수송하기도 하더라.

사람이 가는 것이나 물자가 가는 것이나 같을 것인데 어찌하여 뿅하고

저 멀리 날아갈 수가 있냐? 순간 이동 기술이라도 있나?

그리고 수성을 하면 적은 수로도 방어가 가능한데 그런 것이 없더라.

공성 병기가 너무 강하다. 보통 성은 포위해서 식량 부족 상태로 만들어 점령한다.

수비하는 병력이 많으면 굶기기로 나가고, 수비 병력이 적으면 성벽을 넘어가면 된다.

또한 컴퓨터가 공격을 할 때는 승산을 따져보지 않고 하는 것 같다.

어이없는 것이 많았다. 그래서 KOEI 게임에 실망이었다.

90%의 사실 + 10% 거짓말 = 100% 사실이다.

모든 사기와 종교와 소설에서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우린 진실을 알지 못한다.

삼국지 소설은 거짓말이 너무 많지만 사람들은 100%사실이라고 착각한다.

역사하고 소설은 다르다.

http://blog.daum.net/sunee8711/86

글쓴이 : 코삐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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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요약 설명

후한 말, 십상시의 부정부패가 극에 달하며 조정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백성들은 점점 조정에 불만을 품기 시작한다.
이런 가운데 장각이 이끄는 황건적의 난이라는 대규모 농민 반란이 발생한다.

조정에서 토벌대를 파견하지만 번번히 격퇴되자,

당고의 금을 당해 있던 청류파 호족들을 복권시키고 황건적의 토벌에 나서도록 한다.

이들의 활약으로 인해 난은 진압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구성, 장거와 장순 등의 군벌들이 반란을 꾀하면서 치안이 극도로 혼란해졌고

지방 통제력은 붕괴 직전에 도달한다.

이런 가운데, 영제가 죽자 외척과 환관 사이에 정권 다툼이 벌어진다.


하진이 십상시를 처단하기 위해 량주자사 동탁을 비롯한 각지 군벌들을 낙양에 소환하는데,

위협을 느낀 십상시들은 하진을 암살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하진의 부장이였던 원소는 병사들를 이끌고 궁궐에 난입하여 환관들을 몰살해버리는

무참한 사태를 이를 십상시의 난이라 한다.


하진과 십상시라는 양대 세력이 없어진 틈을 타, 동탁이 군대를 이끌고 무력 시위를 하여

수도를 장악하며 권력의 중추에 안착한다.


동탁은 소제와 하 태후를 살해하고 헌제 유협을 옹립하는 등

극악무도한 악행을 저지르니 황실의 정통성과 권위는 땅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행위에 각지의 군벌들이 서로 연합하여 동탁에 대항하여 낙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한다.
그런 가운데 군벌들의 여론은 둘로 나뉘었다.

동탁이 즉위시켰다고 해도 헌제는 정통성이 있다는 원술과
동탁이 즉위시킨 헌제는 정통성이 없으므로 명망이 있는 황족 유우를 즉위시켜야 한다는 원소가 있었다.


하지만 양쪽 모두 황실에 충성하려는 마음 따위는 전혀 없었으며,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고려한 일시적인 견해였으며 상황이 바뀌자 의견을 순식간에 뒤집어버렸다.

이렇게 원소와 원술의 대립이 점차 심화되기 시작하니,

군벌들은 각자 살 길을 도모하여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

한편, 왕윤은 동탁을 암살하며 황실을 재건하려 하지만 이각과 곽사의 잔당들에 의해

무위로 돌아가고 만다.


더 이상 견디다 못한 헌제는 혼란스러운 틈을 타 장안을 탈출하여 낙양으로 돌아가지만

이미 헌제한테는 아무런 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가운데, 헌제를 옹립하며 후한의 최대 실권자로 떠오른 조조는

유비, 여포, 원술 등을 정벌해나가며 입지를 다진다.


하지만 그런 조조라고 해도 공손찬, 장연 등을 격퇴하면서 당대 최대의 세력으로 자리매김한

원소한테는 아직 상대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 일전일퇴의 사투 끝에 마침내 원소를 격파하니 천하의 주도권은

조조가 쥐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소가 급사하고 그 세력은 후계자를 놓고 서로 분열하여 내전을 벌이다가

조조에게 각개격파 당하게 된다.

하북을 정리하고 나서 세력을 안정시킨 조조는 대군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형주를 침공한다.
어이 없는 항복에 형주는 조조의 손에 들어오게 되고,

형주의 객장이었던 유비는 급히 후퇴하여 강동을 다스리고 있는 손권과 연합한다.

조조는 손유 연합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화공을 예상치 못해 결국에는 적벽에서 대패하고 만다.


적벽대전에서 패한 조조는 형주에서 철수하고,

손권은 그 여세로 형주를 점령하고 영토를 분할하여 유비에게 빌려준다.

유비는 훗날 익주를 점령하자 손권은 반환을 요구하지만 거절 당하자 곧바로 유비를 공격하여

형주 남부를 점령해 버린다.


조조는 서량의 관중 군벌들과 전투를 벌이고 한중을 점령하면서 관서 지역을 장악하지만,

유비의 한중 침공을 저지하는데 실패하여 한중 지역을 잃는다.

이렇게 조조와 유비가 대립하기 시작하자,

손권은 형주 북부 지역을 기습하여 점령하는데 성공하고 형주를 다스렸던 관우를 죽인다.


유비는 이에 대응하여 직접 대군을 이끌고 형주를 침공하나, 이릉에서 육손에게 저지당하고

패퇴하고 만다.

이릉대전의 영향으로 유비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삼국의 경계선은 확정된다.

유비보다 먼저 죽은 조조의 뒤를 이은 조비는

헌제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에 등극하며 국호를 위라고 한다.


그는 손권을 오왕으로 봉하면서

그 정부의 정당성을 인정하지만 이것은 인정하나 안 하나 별 의미가 없었다.

유비는 죽기 전에 조비의 황제 등극에 반발하여 자신도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한이라고 한다.
이것을 그 이전에 있었던 한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촉한, 혹은 아예 줄여서 촉이라고 부른다.

손권은 그대로 오라는 국명을 사용하여 결국 위촉오라는 삼국이 들어서고

한나라 왕조는 그대로 소멸되고 만다.

유비는 죽기 직전에 제갈량에게 망해 없어진 한나라를 부흥하라는 부탁을 하고

제갈량은 그 유지를 바탕으로 촉나라의 모든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실질적인 촉나라의 일인자가 된다.


그 후, 제갈량은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북상해 위나라를 침공하지만,

번번히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퇴각한다. 결국 제갈량은 전쟁 수행 도중에 병사하고 만다.

제갈량 사후, 제갈량의 북벌을 방어해냄으로써 입지가 강력해진 사마의가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하고,
사마의가 죽자 그의 아들들인 사마사와 사마소 순으로 권력을 계승한다.

사마소는 대대적으로 촉나라 침공을 감행하며, 강유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촉나라는 멸망해버린다.

사마소가 죽고 그 아들 사마염은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진나라을 건국한다.


사마염은 침공군을 파병해 오나라를 멸망시키며 마침내 천하를 통일하기에 이른다.
언제나 요약되는 제갈량 사후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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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유명한 말은
《손자병법(孫子兵法)》〈모공편(謀攻篇)〉에서 유래된 말이다.

승리를 예측할 수 있는 5가지 방법을 서술한 뒤에 손무는 이렇게 이었다.

知彼知己者(지피지기자) 상대와 자기의 능력을 알면
百戰不殆(빽전불태)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不知彼知己者(부지피지기자) 상대를 모른 채 자기의 능력만을 알고 싸우면
一勝一敗(일승일패) 한 번 이기고 한 번 지며 (승패는 반반이며)
不知己不己者(부지기불기자) 상대와 자기의 실력을 다 모르면
每番必敗(매번필패) 싸울 때마다 항상 패할 것이다.

오늘 날 흔히 쓰는 [백전백승]이라는 말은 [백전불태(百戰不殆)]가 와전된 것.

정정당당(正正堂堂)

"적군이 원정해 오면 가까운 곳에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적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며
배부름으로써 적군의 굶주림을 기다린다. 이는 체력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또 군기(軍旗)를 들고 정연히 진격해 오는 적군을 요격하지 않으며
당당한 태세를 갖춘 적군을 공격하지 않는다(無遙正正之旗 勿擊堂堂之陣).
이는 상황의 변화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오늘 날 공명정대한 태도를 가리키는 정정당당(正正堂堂)이라는 말은
처음엔 이처럼 질서가 정연하고 위엄이 있다는 뜻의 말이었다.

우리가 보통 《손자병법(孫子兵法)》이라고 부르는 병법서는
중국 전국(戰國)시대 제(齊)나라의 병법가인 손무(孫武)가 지은 책이며 그는 손자(孫子)라는

존칭으로 불리는 일이 많다.

손무의 생몰연대나 그 밖의 사항에 관한 정확한 경력은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오나라 왕 합려가 그의 저서인 《손자병법(孫子兵法)》을 보고 초빙했기 때문에 가서
장수가 되어 초나라 공략에 공을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저서인 《손자병법》은 유가(儒家)의 사상인 인의(仁義)를 근본 이념으로 하여
전쟁의 방법을 개진하고 있다.

이 책은 전술 뿐만 아니라 제후의 내치ㆍ외교ㆍ행정의 비결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비범한 견해를 보이고 있어 후세의 병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전 세계적인 명저로 꼽혀 서양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조선(朝鮮) 시대에는 그의 병법이 역과(譯科) 초시(初試)의 교재로 쓰인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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