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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언어 탈선

도깨비-1 2014. 12. 10.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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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언어 탈선

입력 : 2014.12.10 05:45 / 조선일보 김태익 논설위원

 

1980년 이화여대 총장이던 김옥길씨가 문교부 장관을 할 때 그의 스타일이 화제가 됐다. 최규하 대통령이 새해 순시를 오자 그는 업무 보고를 하러 단상에 올라 이렇게 분위기를 풀었다. "대통령께서 오시게 돼 제가 키가 좀 커졌습니다." 김 장관은 '관가(官街) 언어'를 싫어했다. 이날 보고에서도 "○○를 강화하겠다"는 말을 꼭 "○○를 힘쓰겠다"로 바꿨다. "제고하겠다"는 "높이겠다"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후배 장관들이 이어받았으면 좋았을 것이다.

 

▶작년 초 어느 장관 후보자는 청문회에서 목에 힘주어 말했다. "클라우드와 빅데이터 시대에 대비해 소프트웨어 역량을 강화하고…서비스와 솔루션, 콘텐트와 애플리케이션 분야에서 창조경제의 새로운 블루오션을 만들겠습니다." 그의 야심 찬 청사진은 해당 부처 관료들이 만들었을 것이다. 화려하게 한 상 차린 것 같기는 한데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렵다.

만물상 칼럼 일러스트

▶민간단체인 한글사용성평가위원회가 지난 9월 447개 공공기관 홈페이지의 한글 사용 실태를 조사했다. '알go 챙기go 떠나go ~해외 안전여행 캠페인' '너do 나do 공공 외교 모자이크로 만나다'. 외교부 소식지와 공식 동영상에 나온 말들이다. 영어와 우리말을 섞은 말장난이 꼭 이래야 하나 싶을 정도다. 그런가 하면 일제(日帝)가 남겨놓은 어려운 행정 용어도 여전하다. 암거(暗渠·지하 도랑), 구배(勾配·기울기), 맹지(盲地·도로와 맞닿아 있지 않은 땅) 같은 말들이 무슨 뜻인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관공서에서는 '웃돌다' 하면 될 것을 굳이 '상회하다', '더욱더' 하면 될 것을 '가일층'이라고 한다.

 

▶사전에도 없는 정체불명 말을 순우리말인 것처럼 퍼뜨리고 있는 공공기관의 그릇된 언어 사용 실태가 어제 조선일보에 실렸다. 코레일코레일관광개발는 서해안 여행 상품을 '씨밀레'라고 이름 짓고 이는 '영원한 친구'를 뜻하는 순우리말이라고 선전했다. 서울시는 세종문화회관 지하에 '광화문 아띠'라는 식당가를 열고 아띠는 '친한 친구'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우리말 사전 어디에도 씨밀레나 아띠는 없다고 한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안경점, '햇살 담은' 간장, '속 시원한' 내과… 아름답고 한눈에 쏙 들어오는 우리말을 먼저 찾아나선 것은 보통 사람들이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에서 이뤄지는 우리말 파괴와 학대가 도를 넘었다. 국민 언어생활의 모범을 보이고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공공기관이 뒤늦게 민간을 흉내 내면서 이런 엉터리 짓이나 하고 있으니 이중 삼중 망신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