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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상 /고려 문화의 힘

도깨비-1 2014. 10. 26. 13:49

만물상

고려 문화의 힘

 

김태익
논설위원실
E-mail : tikim@chosun.com
논설위원
    입력 : 2014.10.22 05:34 /조선일보

     

     

    '팔만대장경'은 가로 24㎝, 세로 68~78㎝ 목판 8만1258장에 불경을 새겨 넣었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한 장 양면에 644글자를 새겼으니 모두 5233만152자나 된다. 500년 역사를 담은 조선왕조실록이 5600만 자다. 목판을 팠던 이들은 한 자씩 새길 때마다 부처님께 삼배(三拜)를 했다. 불경의 한자(漢字) 중에는 한 글자가 64획이나 되는 것도 있었다. 장인(匠人)들은 한 판에 수백 글자를 팠다가도 한번 칼끝을 잘못 놀렸다 싶으면 처음부터 다시 팠다. 추사 김정희가 "이것은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라고 한 것도 그래서다.

    ▶팔만대장경에는 부처님 힘에 의지해 외적(外敵)의 침입을 막으려는 고려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러나 위대한 문화유산은 소망만으론 만들어지지 않는다. 절절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적 기량이 사회에 축적돼 있어야 한다. 이런 기량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도 아니고 한 분야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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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시대에 중국 송나라 서긍이라는 사람이 사신으로 온 일이 있다. 그는 고려청자를 보고 놀랐다. 중국에서 받아들인 청자 기술일 텐데 빛깔이 은은했다. 그는 귀국 보고서에 고려청자 '비색(翡色)'의 아름다움을 써 중국에 알렸다. 서긍은 고려 나전칠기를 보고는 "기법이 매우 정교해 귀하게 여길 만하다"고 썼다. 송나라 문인 소동파는 고려청자와 함께 고려의 종이를 천하 명품 열 개에 넣었다. 중국인들은 고려 종이를 '황금과 같이 변하지 않고 오래가는 종이'라는 뜻으로 금령지(金齡紙)라 불렀다.

    ▶어제 그제 조선일보 1면에 고려를 대표하는 미술품 사진이 잇따라 실렸다. 세계에서 아주 뛰어난 종교 미술품 중 하나로 꼽히는 고려 불화(佛畵) '수월관음도'와 고려 나전칠기다. 둘 다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다가 일본에서 열리는 전시회에 나온 것이다. 우아함과 세밀함을 아우른 아름다움이 700년 세월을 넘어 다가온다.

    ▶'고려' 하면 흔히 거란·몽골의 침입과 숱한 내부 권력 다툼, 민란(民亂) 같은 것을 떠올린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500년 왕조가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문화의 힘 덕분이었다. 고려는 과감하게 나라 문을 열어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고 자기 것을 더해 독창적 문화로 발전시켰다. 고려 불화는 지금 남은 160점 가운데 150점이 외국에서 떠돌고 있다. 나전칠기는 16점 가운데 국내에 있는 것이 하나뿐이다. 고려의 선조들이 남긴 문화재를 지키지는 못했어도 그들이 남긴 정신마저 잊을 수는 없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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