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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포커스] 선진국의 조건, 위기를 견디는 능력

도깨비-1 2014. 12. 2. 22:00

[글로벌포커스] 선진국의 조건, 위기를 견디는 능력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14.12.01 17:34:09 | 최종수정 2014.12.01 17:36:28

 

오랜만에 찾은 한국에서 “선진국의 조건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다.

어려운 물음에 내가 체류하는 영국을 떠올렸다. 영국 경제는 미국과 함께 견조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유럽 경기 둔화로 수출은 부진하지만 올해 3% 정도 실질경제성장을 전망하고 있다. 경기 회복 흐름은 부동산에서 개인 소비, 기업 투자로 순조롭게 이동해 실업률이 떨어지고 결국 임금상승률도 반등하는 조짐을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을 놀라게 한 영국 경제의 견고함은 중국과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신흥국 경제가 가진 위태로움과 대조적이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 축적과 영어권이라는 강점이 있지만 영국 1인당 소득은 4만달러 정도로 그다지 높지 않다. 교육 수준 저하와 격차도 탄식이 나온다. 하지만 국가관은 놀라울 정도로 굳건히 국민 사이에 공유되고 있다.

먼저 국가는 국민의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영국 현장 노동의 질은 빈말로도 높다고는 할 수 없다. 모든 것이 느리고, 노후한 인프라스트럭처와 지하철 등 대중교통 문제도 많다. 하지만 서비스 제공자가 능력 이상으로 무리를 하지 않고, 고객은 참을성 있게 줄을 서서 기다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대형 사고가 적다. 교통사고 사망률도 세계 5위권인 한국과 대조적으로 항상 하위권이다.

또 모든 곳에 감시카메라가 설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평화로운 대학 캠퍼스에서조차 의심스러운 자를 신고하라는 재촉이 끊이지 않는다. 안전 유지는 하드웨어가 아니라 ‘국민 참여에 의한 시스템’이라는 사고가 깊이 박혀 있어 살인 등 흉악 범죄나 상해 사건 발생률도 한국보다 훨씬 낮다.

국민 전체를 먹여살리는 것은 정치의 의무라는 것이 엘리트 의식 속에 포함돼 있다. 적임자가 없으면 중앙은행 총재조차 외국인에게 맡겨버리는 대담함도 이에 따른 것이다.

한편 흥국 경제는 내셔널리즘이 강해도 단위는 가족이다. 가족기업이 성장동력이며, 정치 엘리트와 관계를 형성하고 사회보장도 가족이 담당한다. 고성장일 때는 문제는 없지만 성장 둔화가 시작되면 국가는 공정하게 징수해 궁핍한 국민을 돌봐야 한다. 이 단계에서 좌절하는 신흥국이 적지 않다.

영국이라고 하면 민주주의 병리로 인한 사회보장 팽창과 포퓰리즘만 언급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사회안전망이 잘돼 있어 새로운 기업들이 생겨나고, 출산율이 유지되고, 성공한 자를 질투하는 메마른 정치·사회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부분은 과소평가돼 왔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보수적이지만, 다수파가 아닌 이단이나 괴짜를 오히려 소중히 받아들이는 관용도 영국의 기반이다.

금융업의 포트폴리오 구성, 컨설팅, 디자인 등 서비스업은 틀에 박힌 생각에 지배되지 않는 참신한 발상이 경쟁력의 원천이다. 저널리즘도 매우 다양해 정부의 말을 옮기는 것을 싫어하고 오히려 영국이 잘나갈 때 시니컬하게 사각지대를 찾아 비판한다.

한국은 어떤가. 프리덤하우스에서 발표한 세계 언론자유 순위에서 인도, 동남아시아 등과 같은 ‘일부 자유’ 수준이다. 법적·경제적 환경보다 정부와의 관계가 순위를 끌어내리는 데 기여했다. 영국을 포함한 ‘선진 7개국’에서 이와 비슷한 수준인 나라는 이탈리아뿐이다.

따라서 300년에 걸쳐 쇠락을 관리할 수 있었던 영국이 시사하는 바는 “당연한 일을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선진국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전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의 압도적인 힘이 화려한 안무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움직이는 기초능력의 높이에 기반했다는 것 떠올리면 된다. 선진국의 조건은 화려한 성장보다 위기에 견딜 수 있는 능력을 묻는 것이다. 위기에 무너지지 않으면, 어디선가부터, 내일은 꼭 오기 때문이다.

[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 정경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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