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分 다하는 개인, 그를 존중하는 사회
김낭기의 태평로
입력 : 2014.10.21 05:48/조선일보 김낭기 논설위원
한 미군이 여객기에서 일등석 승객들로부터 좌석 양보를 제의받은 이야기〈본지 14일자 A20면〉는 건강한 사회, 선진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지난 9일 국내선 여객기 일반석에 타고 있던 미 육군 앨버트 마를 일등상사가 승무원에게 제복 상의가 구겨지지 않도록 상의를 옷장에 보관해 달라고 부탁했다. 승무원은 "옷장은 일등석 승객용"이라며 거절했다. 그러자 이 장면을 본 일등석 승객들이 앞다퉈 마를 상사에게 "내 자리에 앉으시라"고 제의했다. 마를 상사가 정중히 사양하자 일등석 승객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해줘 고맙다. 옷이라도 보관하게 해달라"고 다시 요청했고, 마를 상사는 마지못해 상의를 건넸다는 이야기다.
마를 상사는 어떤 군인이었까. 그의 제복 상의 양쪽 가슴에 주렁주렁 달린 10여개의 화려한 표지가 대답을 대신해 주고 있었다. 상의 오른쪽 맨 위에 붙어 있는 파란 배지는 마를 상사가 실제 전투에서 적과 싸운 전사(戰士)임을 알려줬다. 배지 아래 빨강·노랑·파랑 등 알록달록한 네모 표지들은 그가 공적(功績)을 세워 여러 가지 훈장과 포장을 받았음을 보여줬다. 훈포장 아래 금속 배지는 마를 상사가 공수, 공중 강습, 특수전, 유격 등 각종 훈련과 교육·평가에서 합격점을 받았음을 증명해줬다. 상의 왼쪽 명찰 위에 있는 삼색(三色) 표지는 마를 상사의 소속 부대가 표창을 받은 사실을, 그 아래의 휘장들은 마를 상사가 우방국과 실시한 합동 훈련을 성공적으로 마쳤음을 보여줬다.
마를 상사는 훈련과 전투라는 군인의 본분(本分)을 다한 사람이었다. 일등석 승객들이 마를 상사에게 경의를 표시한 것은 미군은 늘 본분을 다하고 그런 미군은 존중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국민 사이에 형성돼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리 군복을 입었더라도 승객들이 그렇게 경의를 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본분을 다한다는 것은 요령 피우거나 딴짓하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 충직하고 성실한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 사회는 '본분을 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호 참사는 그 결정판이다. 그러나 세월호뿐만이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대형 인명 사고의 뒤를 따져 들어가 보면 제 할 일을 다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어김없이 드러난다. 민간인이고 공무원이고 가릴 게 없다. 본분을 다하지 못한다는 질책에 '나는 예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교사가 돈을 받고 학생기록부를 조작하고, 그 교사에게 돈을 준 학부모는 "다들 그러는데 왜 나만 갖고 그러느냐"고 오히려 당당하게 나오는 게 우리 사회다.
자기 본분을 다하는 사회가 되려면 그런 사람이 정당한 대우를 받고 존중받는 풍토가 돼야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반대다. 본분에 충실한 사람은 고지식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받기 십상이다. 아부와 뒷거래, 편법과 술수에 능해야 유능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출세도 한다. 이런 사회에서 누가 묵묵히 자기 일에만 충실하려 할까.
마를 상사와 승객들 이야기는 자기 본분을 다하는 개인, 그런 사람을 존중해주는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그런 사회가 얼마나 아름답고 살맛 나는 사회인가를 깨닫게 해줬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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