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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도깨비-1 2014. 10. 21.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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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바로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

환풍구서 관람하다 다친 金씨… 평소 남 비판했던 태도 自責
"정부가 안전 규정 안 지켰다" 사고 나면 나라 책임만 따져
국민에게도 안전 매뉴얼 있어 피곤하고 불편해도 감수해야

 

입력 : 2014.10.21 05:48 / 조선일보 
김창균 부국장 겸 사회부장

 환풍구가 무너져 16명이 목숨을 잃은 판교 공연장 사고 현장에는 안전 요원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사고 당시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은 "스태프라고 쓴 목걸이를 한 사람 몇 명만 봤을 뿐 안전 요원 유니폼을 입고 통제 활동을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경찰이 조사해 보니 '안전 요원'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연 현장에는 행사 요원 38명이 배치돼 있었고, 행사 계획서상에는 이 중 4명이 안전 요원으로 등재돼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자신에게 그런 임무가 부여된 줄조차 몰랐다. 공연 계획을 경찰에 알리고 협조를 구하려면 안전 요원을 둬야 한다는 말을 듣고 구색을 갖추느라 서류상에만 그렇게 올려놨던 것이다.

행사 주최 측의 이런 무(無)책임하고 무(無)신경한 태도는 당연히 문제 삼아야 하고, 실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만약 현장에 안전 요원이 배치됐더라면 이번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 공연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좌석은 물론 공연장 주변까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고 한다. 뒤늦게 공연장에 도착한 사람들은 '명당' 자리를 하나 발견했다. 바로 환풍구 위였다. 회사원 김모(34)씨는 "환풍구는 지대가 높아 지정된 좌석 말고는 공연을 보기엔 최적 장소였다"며 "나도 올라가고 싶었는데 공간이 없었다"고 했다.

행사 진행자가 공연 시작 전 '가장 중요한 것이 안전'이라고 말하며 환풍구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내려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꿈쩍하지 않았다. 사고 당시 환풍구 위엔 30명가량이 있었다. 만약 누군가 자리를 비우고 내려오면 다른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를 꿰찼을 것이다. 그런 분위기에서 20대 안전 요원들이 환풍구 '로열석'을 차지한 30·40대 관람객들에게 "그곳은 위험합니다. 내려오세요" 하고 권했으면 "아, 그래요? 몰랐네요" 하고 순순히 내려왔을까. 주말 놀이공원에서 질서 통제 요원들과 관람객들 사이에 오가는 승강이를 떠올려 보면 답은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는 쪽이다.

공연장에서 5분 거리 직장에 근무하는 김모(45)씨는 퇴근 시간에 별다른 약속도 없어 테크노밸리 광장을 찾았다고 한다. 김씨는 공연을 좀 더 잘 보고 싶다는 욕심에 아무 생각 없이 환풍구 위로 올라섰다가 변을 당했다. 현재 흉부 골절상을 입고 입원 중이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평소 무질서한 우리나라 사람들을 속으로 흉보고, 이래서 한국이 문제라며 혀를 차곤 했다. 그런데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 부끄럽다"고 했다.

이번 사고를 뉴스로 접한 제3자들도 김씨가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개탄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다 큰 어른들이 걸 그룹 공연을 보겠다고 몰려가고, 그것도 모자라 위험한 데 올라가서 펄쩍펄쩍 뛰었다니…" 하며 혀를 찰 것이다. "자업자득 아니냐"는 반응이 나올 법도 하다. 그런 분들은 자기 자신도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이 붐비는 도로가 비좁다고 지하철 환풍구 위를 내달린 적은 없는지, 한 손으론 핸들을 돌리며 또 다른 손으론 휴대폰에 날아온 문자를 확인하는 곡예 운전을 한 적은 없는지, 화재 훈련 때마다 요리조리 도망 다니다 보니 소화기 작동법은 물론 사무실 어느 곳에 소화기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것은 아닌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다면 언젠가 김씨같이 스스로 한탄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

2월 마우나 리조트 체육관 붕괴, 4월 세월호 침몰, 5월 고양 버스터미널과 장성 요양병원 화재, 그리고 이번 판교 환풍구 붕괴까지 대형 사고가 두 달이 멀다 하고 꼬리를 물고 있다. 그때마다 우리는 정부가 매뉴얼을 제대로 지켰는지를 따진다. 사고가 발생한 것도, 현장에서 사람을 구조하지 못한 것도 모두 정부 탓으로 몰아간다.

100만 공무원이 5000만 국민 개개인의 안전을 챙겨줄 수는 없다. 국민 발목에 모두 안전 발찌를 채우고, 9만9720㎢ 대한민국 면적 전체를 CCTV로 감시한다고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다. 더구나 법원이 발부한 영장을 가지고 카카오톡을 감청하는 일조차 프라이버시 침해라고 반발하면서 국가가 국민 하나하나의 생명을 왜 지켜주지 않느냐고 따지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매뉴얼은 정부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도 나와 주변의 안전을 위해 지켜야 할 수칙이 있다. 매뉴얼을 지키는 것은 피곤하고 따분한 일이다. 노력과 시간이 든다. '나는 그 불편을 감수할 각오가 돼 있나'를 자문자답(自問自答)해 봐야 한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