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칼럼
死生觀
입력 : 2014.07.10 05:39/조선일보/ 양상훈 논설주간
죽음의 공포 앞에서 나부터 살겠다는 사람들 눈에 띄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사람도 많이 있다
동부전선 GOP 총기 난사 때 소초장이던 중위는 자고 있었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친 그는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군 공격이라 생각하고 달아났을 수 있다는 얘기다. 암담해진다.
누구나 죽음이 무섭다. 살고 싶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때에 불행하게도 죽음이 앞에 닥쳐오는 순간을 맞게 되는 경우가 있다. 더 불운하게는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이 세상에 아무도 없고 자기 자신만 홀로 남게 되는 그 순간에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는 사람의 사생관(死生觀)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세월호 선장과 많은 선원에겐 살고 싶다는 본능적 욕망 외에 아무것도 없었다. 수사기관에서도 "그때는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들의 사생관은 '내가 사는 게 최우선'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팽개쳤다.
반면 세월호 사무장 양대홍씨는 거의 90도로 기울어진 배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배가 많이 기울어졌다. 통장에 있는 돈은 아이 등록금으로 쓰라"고 했다. 그는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가 "지금 상황이 어떠냐"고 묻는다. 양 사무장은 "지금 아이들 구하러 가야 해. 길게 통화 못 해. 끊어"라고 했다. 그게 유언이 됐다.
배에 있는 학생들이 승무원 박지영씨에게 "왜 언니는 구명조끼 안 입어요"라고 물었다. 박씨는 "너희가 모두 탈출하면 나도 나갈거야"라고 했다. 침몰하는 배에서 구명조끼를 남에게 주는 것은 죽음까지 생각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박씨의 죽음으로 학생 20여 명이 생명을 건졌다.
양씨와 박씨의 사생관은 무엇이었을까. 저 혼자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선장과 동료들 사이에서 스스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아내에게 마지막 말을 전한 양씨를 생각한다. 그도 살고 싶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지켜야 할 자식이 있다. 그러나 양씨에게는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가족의 안위만큼이나 중요했던 무엇이 있었다. 그 '무엇'을 거창한 말로 포장하고 싶지 않다. 양씨나 박씨 스스로도 그 순간에 그게 무엇이었는지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한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순간에 달아나고 싶고, 살고 싶은 본능을 향해 '그래도 그럴 수는 없다'고 붙잡은 것은 대단한 희생정신이기에 앞서 사람의 마음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일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 죽음의 위협 앞에서 제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양심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이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해본다. 양씨나 박씨, 석해균 선장과 같은 사람이 많은지 아니면 세월호 선장·선원 같은 사람이 많은지 생각한다. 동부전선 GOP의 도망친 중위 같은 군인이 많은지, 아니면 포탄이 쏟아지는 연평도 부대로 되돌아가다 전사한 해병대원이나 한주호 준위 같은 군인이 많은지 생각한다.
중국인이 쓴 '조선전쟁(6·25)'이란 책은 읽어 가기가 힘이 든다. 한국군의 실상 때문이다. 중국인의 시각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미국인이 본 한국군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중국군은 '어떤 불가능한 작전도 한국군을 상대로는 가능했다'고 했다. 너무 많은 군인이 너무 쉽게 도망쳤다. 중국군 1개 중대에 후방을 차단당했다고 한국군 1개 군단이 무너져 도망치는 일까지 있었다. 그 일로 자기 나라를 지키려고 자기 땅에서 싸우는 부대가 도우려고 온 외국군(미군)에 의해 해산 명령을 받았다. 중국인은 그 일을 '세계 전쟁사에서 희귀하고 기이한 일'이라고 기록했다.
신생 국가의 초창기 군대였다고 애써 생각했다. 전쟁 후반엔 한국군도 달라졌다. 그래서 이제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위했다. 그러나 총소리에 놀라 부하를 버리고 무기고 열쇠까지 갖고 달아난 지휘관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중위는 전역을 두 달 남겨놓고 있었다. 그는 나라를 지키려고 입대했을까, 그저 병역필 도장을 받으려고 입대했을까. 나라를 지킨다는 생각이 있었다면 그렇게 쉽게 달아났을까.
지금 우리 군인 중에 죽음 앞에서 '그래도 내가 달아날 수는 없다'는 사생관을 가진 사람이 훨씬 더 많아야 하고 그럴 것으로 믿는다. 많은 이가 "대통령, 국회의원, 장관들이 병역기피 하는데 누가 죽음을 무릅쓰겠느냐"고 걱정하지만, 그래도 이 순간 세월호 실종자를 찾으러 춥고 캄캄한 바다로 들어가는 군인들이 있다.
어느 신문에 전쟁터에 나간 미(美) 여군의 얘기가 실렸다.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아버지가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이 목숨을 걸 만큼 가치가 있느냐를 생각하라'고 하셨어요"라고 답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입대하는 자식에게 "네가 가는 길은 목숨을 걸 가치가 있다"는 사생관을 말해주는 부모가 많았으면 한다. 세계 역사에서 강대국은 사생관이 서 있는 사람이 많은 나라들이었다. 단 하나의 예외도 없다. 우리 사회도 아직은 부족하지만 그 길로 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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