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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
1986년 4월26일 오전 1시23분 체르노빌 핵발전소가 폭발했다. 화재가 났고, 어마어마한 방사능이 대기로 치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새벽 5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고르바초프는 ‘폭발은 없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는 학술위원 알렉산드로프에게 전화를 걸었다. ‘모든 것이 정상적이다. 원자로는 절대적으로 안전하며, 거대한 사모바르(러시아식 주전자)를 붉은 광장에 세워 놓은 것과 같다’는 답을 받았다. 그날, 정상치보다 60만배나 높은, 나흘 뒤면 치사량에 이르게 되는 끔찍한 방사능이 넘실거리는 체르노빌 인근 도시 프리피야트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사고가 발생한 지 30시간이 지나서야 대피할 수 있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암에 걸렸고,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겪으며 죽었다.
바람의 방향이 체르노빌 인근 벨라루스 쪽으로 향했고, 그곳에도 대피령이 내려졌다. 농장의 책임자가 자동차 두 대에 가족과 세간을 모두 싣고 떠나려 했다. 초급 당 위원장이 차 한 대만이라도 양보하라고 했다. 탁아소의 아이들이 며칠째 대피를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 대표는 답했다. “집 안에 있는 물건에다 잼과 절임이 든 3리터짜리 유리병까지 다 싣고 가려면 차 두 대로도 모자란다”고 했고, 그는 유유히 떠났다. 벨라루스의 다큐 작가 세르게이 구린의 증언이다.
세월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침수가 시작된 지 한 시간이 지나서야 구조 요청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오전 9시에 조난 신호가 갔고, 10시30분에 배가 침몰했는데, 잠수지원 장비를 갖춘 구난함이 다음날 새벽에 도착했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는다. 구명정 46개 가운데 2개만 작동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니, 마음이 꺼져 내리는 것 같다.
믿을 수 없는 일을 너무 많이 겪다 보니 가능과 불가능의 경계가 사라져버렸다. 믿어야 할 것과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이 한 몸뚱어리로 엉켜 문드러져 버림으로 인하여 믿음 그 자체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저들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하나의 행동윤리만이 존재했을 것이다. “나서지 않을 것,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이라면 굳이 지지 않을 것, 인간의 고통보다 상부의 진노를 두려워할 것, 끝내 내 자리를 지킬 것.” 그리하여, 우리는 ‘대충’ 살게 되었다. 다만, 나와 내 가족만이라도 이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기만을 기도하면서. 그러나 때때로 재앙은 이렇게 형언할 수 없는 실상으로 우리 앞을 찾아오곤 했다.
수백명을 태운 배가 기울어 가는데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한다. 언제나 그러했다. ‘가만히 있으라, 기다려 달라.’ 우리는 가만히 있도록 교육받았고, 끝내 기다려야 했다. 목에 물이 차오를 때까지.
나는 지금 며칠 동안 산속 움막에서 잠을 자고 있다. 밀양 송전탑 싸움의 마지막 남은 농성 움막 네 곳에 대한 철거 계고는 지금 시시각각 어르신들을 옥죄어오고 있다. 지난 10년 정부와 한국전력은 그 세월 내내 이렇게 말했다. ‘우리를 믿어 달라! 가만히 있어 달라’고. 그리고 지난 2~3년 이래 전국적으로 알려진 어르신들의 격렬한 투쟁은 이 기다림과 신뢰의 언설에 대한 폭발이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고, 싸움은 나날이 기울어져 목에는 물이 차오른다.
그럴 것이다. 이 나라에도, 우리들 삶에도, 사회적 정의와 공평에도, 공적 준칙과 신뢰의 가치에도 물이 목까지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대한민국호의 승무원들은 언제나처럼 ‘가만히 있으라’고만 한다. 구명정은 쇠사슬에 묶여 있다. 그리고 여차하면 세월호의 그 누구들처럼 가장 먼저 탈출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