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한국 정통 언론의 ‘임박한 침몰’ [2014.05.05 제1009호]

도깨비-1 2014. 5. 5. 14:06

한국 정통 언론의 ‘임박한 침몰’ [2014.05.05 제1009호]
[표지이야기-1부 아무도 믿을 수 없다]신뢰가 붕괴된 상황에서 급히 방향을 꺾은 세월호를 닮아
정확성 요구되는 상황에서 자극적 언어 난무,
지난 10여 년간 품질 개선에 투자하지 않은 결과 나타나
타조처럼 지냈다. 공포에 포위되면 모래에 머리를 처박는 타조처럼, 뉴스를 외면하며 지난 열흘을 보냈다. 연수휴직을 빌미로 언론학을 공부하고 있는 나는 중간고사를 모래 둔덕 삼아 머리를 박았다. 현장도 기사도 섭렵하지 못했다. 다만 몇몇 논문을 살펴봤다. 이 글은 언론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주로 인용하는 거친 비평이다. 참담하게 격동하는 현실 앞에 이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다만 이른바 정통 언론의 ‘임박한 침몰’에 대해선 몇 자 적을 수 있을 것이다.

‘쇼 미’ 시대의 ‘트러스트 미’

» 세월호 침몰 사고로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임계점에 다다랐다. 오보와 보도자료 받아쓰기로 대변되는 ‘관변’ 언론 대신 소셜미디어와 인터넷 뉴스를 통해 의혹을 해소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뉴시스
2012년 8월, 월간 <신문과 방송> 지령 500호를 맞아 톰 로젠스틸은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의 인터뷰에 응했다. 기자 출신인 그는 세계 언론인의 필독서인 <저널리즘의 기본원칙>을 펴냈다. “과거 언론은 독자에게 ‘나를 믿어라’(trust me)고 주장했다. 지금은 (왜 언론을 믿어야 하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나에게 보여달라’(show me)고 독자가 요구하는 시대다.”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한국의 기자들은 이제야 알게 됐다. 세월호 참사는 ‘쇼 미’ 시대에 ‘트러스트 미’ 방식으로 보도한 한국 언론의 참사이기도 하다.

2011년 3월, 일본 동북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했다. 당시 일본 언론의 보도를 이연 선문대 교수가 분석했다. 내각은 재해 앞에 우왕좌왕했다. “(참사에 대한) 일본 정부의 리더십이 부재한 가운데 의 재난보도가 더 빛났다.” 대피 경보는 신속하게, 피해 상황은 정확하게 보도하면서 “일본인들을 진정시키는 소방수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정치에 대한 신뢰가 붕괴해도 언론에 대한 믿음은 더 강화된 셈이다.

반면 정치와 더불어 불신당하고 있는 한국 언론은 그런 종류의 상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실은 한국의 재난보도에 대한 세간의 비난이 처음은 아니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등이 발생할 때마다 언론 보도에 대한 비판이 학계를 중심으로 꾸준히 제기됐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제출된 여러 논문과 보고서를 거칠게 요약해 한국 재난보도의 특징을 꼽으면 다음과 같다. 원인 분석과 책임 규명은 제대로 하지 않는다. 피해 상황만, 그것도 흥미 위주로 보도한다. 심층보도 대신 선정보도로 경쟁한다. 단발 소나기 뉴스를 쏟아붓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냄비처럼 식어버린다.

한국 재난보도의 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 차원에서 비교한 연구도 있다. 백선기 성균관대 교수 등은 2011년 발표한 논문에서 미국 , 일본 , 한국 KBS의 일본 동북 대지진 보도를 비교했다.

일본 언론()과 미국 언론()은 사실적 언어를 주로 사용한 반면, 한국 언론(KBS)은 부각적·자극적·주관적 언어를 주로 썼다. 미국 언론은 한국·일본보다 3배 이상의 기획·심층 보도를 내보내면서 속보가 아닌 분석·탐사 보도에 매진했다.

미국·일본 언론은 재난학·지질학·원전학 등 전문가의 말을 명시적으로 인용해 보도한 경우가 한국 언론의 2배였다. 반면 한국 언론의 정부 인터뷰 보도는 미국·일본 언론의 1.5~3배였다. 한국 언론이 정부 발표에 크게 의존한 데 비해, 미국·일본 언론은 정부 발표 및 자체 취재 결과를 전문가의 검증을 거쳐 내놓은 것이다.

한국 언론은 극심한 피해를 부각하는 편집 기법을 썼지만, 일본 언론은 원거리 영상을 주로 활용했다. 피해자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전하는 것 자체가 고통을 더 가중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국 언론의 재난보도는 매양 그 수준이었다. 중요한 의문은 따로 있다. 왜 지금인가? 2014년 세월호 참사 보도에 쏟아지는 시민들의 비난은 왜 과거보다 더 거센가? 왜 이를 더욱 엄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미국 컬럼비아대학 교수이자 미디어사회학자인 허버트 갠스는 “전쟁이나 9·11 사태 등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뉴스를 뒤쫓지 않는다”고 했다. 뒤집어 말해 전쟁·혁명·재난 등이 일어나면 사람들은 일제히 뉴스를 집중적으로 소비한다. 동시에 모든 언론이 전력을 다해 대격변에 대한 뉴스를 생산한다. 일종의 뉴스 상품 박람회가 열리는 셈이다. 각 언론사가 내놓는 뉴스 상품의 품질도 만천하에 드러난다.

세월호 참사와 비교될 만한 가장 최근의 대참사는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사고였다. 무려 11년 만에 한국 언론은 생산라인을 총동원해 전 국민 앞에 뉴스를 내놓았다. 국민도 지상파, 종합편성채널(종편), 인터넷, 신문, 주간지, 소셜미디어 등을 가리지 않고 쏟아지는 뉴스를 두루 소비했다.

트라우마가 확산되지 않도록 냉정 유지해야

그 결과, 지난 10여 년 동안 변한 게 없거나 심지어 낙후돼버린 한국 언론의 뉴스 품질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편파 심의로 논란이 있긴 하지만) 현재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문제 삼고 있는 보도만 봐도 그 수준이 드러난다. 재난 주관 방송사인 KBS는 “뒤엉켜 있는 시신이 다수 발견됐다”며 오보를 냈다. SBS는 참사를 보도하는 기자가 웃는 모습을 그대로 내보냈다. MBC는 사건 초기부터 사망보험금을 소개했다. JTBC는 갓 구조된 학생과 인터뷰했다. MBN은 “해경이 민간 잠수부 투입을 막고 있다”는 미확인 인터뷰를 보도했다. 시간이 지나면 차차 정돈되겠지만, 인터넷 매체의 ‘어뷰징’ 기사와 종합일간지의 추측 보도도 적지 않았다.

‘언어 전략’ 차원에 집중해보면, 그 저열함이 더욱 분명해진다. 재난보도에선 속보가 중요하다. 그래서 외국 선진 언론은 지진·해일 등에 대한 경보를 신속하게 보도한다. 다만 피해 상황에 대해선 신속성보다 정확성을 우선시한다. 부정확한 정보는 2차 피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재난이 휩쓸고 간 피해 상황에 대해 속보 경쟁을 벌였다.

일상적 사건·사고 보도에서 외국 선진 언론은 이야기 방식을 빌려 심층보도한다. 일탈적 사건 자체가 구조적 위기를 알리는 징후일 수 있으므로 관련 인물에 주목해 세부적으로 재현한다. 다만 재난은 공동체 전체의 위기 상황이므로 트라우마가 확산되지 않도록 냉정을 유지한다. 그런데 한국 언론은 일상적 보도에선 기계적·형식적인 스트레이트 기법을 적용해오다가, 이번 재난의 참혹함은 세부적으로 재현하려 들었다.

재난을 이해하고 방지하려면 과학적 원인, 정치적 책임 등을 반드시 밝혀야 한다. 외국 선진 언론은 이를 추적해 탐사보도한다. 필요하다면 몇 년씩 투자한다. 미국 탐사보도 매체인 <프로퍼블리카>가 2005년 발생한 허리케인 카트리나에 대한 심층보도를 벌여 2010년 퓰리처상을 받은 것이 대표적이다.

“산업과 스포츠 등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갖고 있는 분야들이 있다. 그런데 (한국) 저널리즘의 사회적 기능만은 지속적으로 퇴화하고 있다”고 이재경 이화여대 교수는 지적해왔다.

‘안내적 저널리즘’의 몰락

이 교수는 그 이유로 세 가지를 꼽는다. 외국 선진 언론과 경쟁하지 않는 한국 언론은 저널리즘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래서 뉴스 품질 개선을 위한 연구에 투자하지 않고, 주로 판매 분야에만 투자했다. 그리고 1990년대 후반 ‘언론 전쟁’ 이후 저널리즘 정체성 자체가 혼란에 빠졌다.

양승목 서울대 교수도 언론이 신뢰의 위기에 빠진 기점을 1998~99년 무렵으로 본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한국 언론사의 시장 경쟁이 본격화됐다. 김대중 정부의 언론사 세무조사 이후 언론사 간 대립이 항구화됐다. 인터넷이 등장한 뒤 중소 언론 및 대안 언론이 크게 늘었다.

양 교수는 ‘언론 개혁 담론’에도 다소 비판적이다. ‘조·중·동’의 비정상적 독과점 구조를 개편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정파 간 대립을 격화시키고, ‘조·중·동’을 대체하는 언론의 새로운 표준을 형성하려는 시도 역시 지지부진해진 결과, 대중의 피부에 와닿는 ‘뉴스 품질의 향상’은 결국 구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언론 시장은 인터넷과 모바일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되었고, 조·중·동은 종편 진출을 포함해 여전히 시장 독과점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신문의 쇠퇴는 신문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신문은 ‘진지하고 심층적인 언론’을 대표한다. 장하용 동국대 교수는 정보 전달의 브로커 구실을 하는 ‘도구적 저널리즘’과 단순 정보가 아닌 그 의미·가치·배경을 설명하는 ‘안내적 저널리즘’을 구분하는데, 안내적 저널리즘을 갖춰야 할 대표 매체로 중앙 종합일간지와 지상파 종합뉴스를 지목했다. 그런데도 한국의 두 매체는 1990년대 중반 이후 뉴미디어와의 경쟁 압박에 떠밀리면서 더욱더 ‘도구적 저널리즘’에 매달리고 있다.

그 결과, 한국 언론은 재난적 상황을 맞았다. 한국 사회 재난의 구조적 원인을 연구한 이재열 서울대 교수는 재난을 이렇게 정의한다. ‘위기 징후를 놓치거나 무시하는 문화 속에서 축적된 위험 요소들이 한꺼번에 동일한 시간과 공간에서 집중해 나타나 한 사회 또는 그 하위 체계의 존속을 위협하는 사건.’ 그 개념 그대로 언론에 대한 신뢰가 붕괴하는 위기 징후를 무시하는 가운데 지난 10여 년 동안 축적·배양된 위험 요소가 이번에 집중적으로 폭발한 것이다.

한국 (정통) 언론은 세월호를 닮았다. 부실과 불량의 거대한 몸집으로 항구를 떠났다. 배를 조종하는 이들은 각자의 불안정한 미래를 고민하느라 직업적 자부심과 전문성을 높일 틈이 없었다. 이제 신뢰의 붕괴라는 거센 조류를 만나 급히 방향을 꺾었으나 갈피를 못 잡고 기우뚱했다. 끝내 가라앉을 것인가.

‘구식’ 작업으로는 만들 수 없다

박진우 건국대 교수는 월간 <신문과 방송> 4월호에서 “언론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새롭게 증명해야 한다. 뉴스 자체를 질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소셜미디어에서 주로 회자되는 평가이긴 하지만, <뉴스타파>와 JTBC 등이 이번 보도에서 두드러진 평가를 받는 배경도 여기에 있다. 두 매체는 피해 참상보다는 사고 원인 규명에 주력했다. ‘다른 뉴스’의 이미지를 형성했다.

톰 로젠스틸과 인터뷰한 <신문과 방송> 500호에는 비판적 미디어 연구자로 명성 높은 제임스 커런 영국 런던대 교수의 인터뷰가 함께 실렸다. “미디어 시장이 심각한 경쟁 상황에 돌입한 가운데 어떤 뉴스를 만들 것인지, 취재원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 등에 대한 저널리즘의 대응이 아주 미숙하다”고 그는 말했다. “독자가 바라는 뉴스는 ‘구식’ 작업으로는 만들 수 없다. 총체적 변화, 즉 저널리즘의 재건이 필요하다.”

그가 ‘재건’을 촉구한 저널리즘은 무엇인가. 언론이 앞장서 주조해낸 근대의 여명기에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이렇게 말했다. “진실로 좋은 기사 한 건을 쓰는 일은 학자의 (학문적) 성취만큼 어려운 작업이다. 기자의 실재적인 책임이 학자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은 일반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사실에 바탕을 두고 진실을 추적한다는 점에서 기자는 학자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그런 기자들이 돌아오기를, 그래서 다시 정통 언론을 신뢰할 수 있기를 대중은 닫힌 출구를 두드리며 기도하고 있을 것이다.

안수찬 <한겨레> 기자

■ 참고 문헌

백선기·이옥기, ‘재난방송 보도에 대한 국가별 채널 간 보도태도의 비교연구’, <한국언론학보> 57권 1호

양승목, ‘신뢰도 하락과 위기의 한국언론’, <민주화 이후의 한국언론>(나남)

이연, ‘2011년 도호쿠칸토대진재와 NHK의 재난방송’, <국제학논총> 16집

이재경, ‘한국 언론과 글로벌 스탠다드’, <민주화 이후의 한국언론>(나남)

장하용, ‘매체 간 경쟁의 심화에 따른 안내적 저널리즘의 약화’, <한국언론정보학보> 56호


<한겨레21> 1009호 세월호 참사 특집호 주요 기사

[표지이야기] 폐허에 성난 눈만이 서성인다
[표지이야기] 상처받은 10대 카톡 채팅
[표지이야기] 단원고 3일간의 기록 -“꽃 아직 예쁘다, 다 같이 사진 찍으러 가자”
[표지이야기] 돈만 좇은 ‘탐욕의 운항’
[표지이야기] 정혜신 박사와 나눈 ‘PTSD 포켓북’ 같은 인터뷰 “슬픔 속으로 뛰어드세요”
[표지이야기] 류희인 전 NSC 사무차장 인터뷰 “캐비닛에 처박힌 매뉴얼이 2800여권”